54화
SPDC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애써 부정하곤 한다.
지금 김기태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으며, 그 부정의 대상은 당연히 서우진이었다.
‘오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 일학년 세 놈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장시킨다.’
이제 갓 입학한 새내기들로 인해, ‘대상’ 이라는 그의 목표가 좌절될 수도 있는.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
처음에 김기태는, 극도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또한 아버지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발랑 까진 1학년 연놈들이, 편법을 써 가며 자신의 대상을 가로채려 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흥분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그의 생각에 이건 부정행위가 확실하였고.
그렇다면 그 부정(不正)을 밝혀내는 것으로, 결국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아직 상황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부정한 방법으로 본선에 올라온 녀석들이라면, 자신들이 가져온 설계와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으며.
그렇다면 최종심사 때 발표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멍청한 녀석들.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한 건지, 이번 기회에 뼈저리도록 느끼게 해 주지.’
기태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발표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줌으로써, 계획했던 대로 대상을 수상한다.
어차피 편법으로 올라온 1학년 녀석들은 최우수상 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기태는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조금만 쑤셔 보면, 먼지가 탈탈 털려 나오겠지.’
시상식이 끝난 뒤 아버지께 부탁하면, 1학년 녀석들의 구린내 나는 편법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해서 그 증거를 충분히 확보한 다음.
치밀하게 기사화해서, 녀석들의 최우수상 입상실적까지 깔끔하게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앞으로 이 바닥에, 발붙일 곳도 없게 만들어주지.’
그리고 기태의 그 계획은, 첫 번째 순서인 자신의 발표가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될 듯 보였다.
“김기태 학생, 훌륭합니다. 학부생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디자인이었습니다.”
“확실히 요양원이라는 시설에 대한 이해도 뛰어나고……. 디자인도 감각이 있어요.”
준비해온 모든 말을 마친 김기태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참관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같이 이 자리에 온 후배님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발표를 들은 모두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고.
심지어 그들 중에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K대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 윤치형 교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태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방금의 발표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했으니 말이다.
‘다시 기회를 준다 해도, 이보다 더 잘할 자신은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우진’이라는 녀석의 발표 차례가 다가올수록, 그는 조금씩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머리로는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되었지만, ‘감’이라는 것이 자꾸 적신호를 보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후우. 진정하고 기다리자. 내 생각이, 틀릴 리가 없어.’
그리고 잠시 후, 마지막 차례인 서우진이 발표를 위해 단상 위에 올라섰을 때.
기태와 잠시 눈이 마주친 우진의 입술은, 분명 살짝 비틀려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웃음.
혹은 기태 자신을 향한 비웃음.
기태는 꽉 틀어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지금부터 30분 동안은.
저기 단상 위에 올라온 1학년, ‘서우진’의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 * *
우진은 긴장했다.
이 디자인재단 건물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1차 질의 심사에서 심사위원들과 마주 앉았을 때도.
단 한 번도 긴장하지 않았던 그였건만, 최종 발표를 위해 걸음을 옮기는 지금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과연 SPDC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우진의 시야에, 몇몇 저명한 인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울시 건축디자인의 미래가 될, 학부생들의 발표를 보기 위해 왕림한 관계자들.
참관석에는 우진도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몇몇 보였고, 우진은 침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디자이너로서의 본격적인 데뷔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 프레젠테이션을 보이느냐에 따라,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뀔 수도 있는 자리임을 깨달았다.
참관석 뒷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경쟁자들?
그들은 이미 우진의 안중에도 없었다.
학부생들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설계를 믿었고, 팀원들과 함께한 한 달 동안의 피나는 노력을 믿었다.
‘준비한 전부를 보여주고 내려올 수 있다면, 결과는 중요치 않아.’
처음 공모전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진의 목표는 명확했다.
이 심사가 전부 끝난 뒤, 그의 손에 대상 트로피를 쥐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상으로 걸어 나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진의 목표는 조금 바뀌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서우진이라는 존재를 똑똑히 각인시키는 것.
그래서 단지 ‘잠재력 있는 학부생’의 수준이 아니라, 한 사람의 디자이너로서 그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진의 목표가 된 것이다.
물론 그런 완벽한 발표를 보여줄 수 있다면,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대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한들 만족스럽지 못한 발표로 오늘이 마무리된다면.
우진은 그게 대상보다, 훨씬 더 아쉬울 것 같았다.
저벅- 저벅-
모두의 시선이 우진에게 모여들었고, 단상 위에 선 우진은 다시 한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똥 씹은 표정을 한 김기태와 눈이 마주쳤을 때.
굳은 표정이던 우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김기태의 작은 그릇이 눈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저놈은, 뭐가 저렇게 억울할까.’
밥그릇 뺏긴, 비루먹은 강아지 마냥. 부들부들 떨며 우진을 노려보는 김기태.
나름대로는 표정 관리를 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우진의 눈에 그것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웃기는 놈.’
이제 우진은, 김기태를 경쟁 상대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결정되는 순위와 별개로, 그는 이미 오늘 우진에게 패배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웃으며 발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기태 덕분에, 전신을 옥죄던 긴장감마저 스르륵 녹아내린 것이다.
전면의 심사위원들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우진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표를 시작하였다.
“K대학교 1학년, 서우진입니다.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 발표순서이기 때문인지.
박수와 함성 대신, 긴장감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방금 전만 해도 우진이 쥐고 있던 그 긴장감이, 참관석으로 전이된 모양이었다.
이어서 우진은 레이저 포인트를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고.
지이잉-!
그곳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투박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제이든의 수많은 아이디어 스케치들이었다.
* * *
“모든 디자인은 작은 점 하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그 선이 모이면 또 하나의 면이 만들어지죠.”
“점과 선과 면.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결국 ‘건축’일 것입니다.”
이번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우진은 제이든에게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우진, 그렇게 설계 위주로 디자인을 짜기 시작하면, 결국 ‘기능’이라는 틀 안에 갇혀버리지 않을까?]
[물론 우진의 디자인도 훌륭하지만, 난 좀 더 멋진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세상에 없었던 건축을 하는 게, 디자이너 제이든의 꿈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부터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우진은 디자인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구조에 대한 고민과 실용성을 먼저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최적의 효율을 보여줄 수 있는 평면디자인과 공간배치가, 모든 것에 우선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우진은 생각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였다.
[난 그렇게 생각해, 우진. 디자이너의 건축물은 멋있어야 해.]
[모두가 편리한 건축만을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건물은 육면체가 되고 말 거야.]
제이든의 이야기들은, 보는 시각에 따라 신입생의 망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무와 현실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학부 1학년 학생이, 건축에 대한 ‘이상’만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이상’이야말로, 학부생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소양일지도 몰랐다.
실무를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
그리고 현실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들.
그것은 하얀 백지상태인 학부 신입생들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특권’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현장에서 이십 년이 넘게 구른 우진에게는, 꽤나 오래전에 마모되어버린 것들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디자인 프로세스를 한번 바꿔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속 알맹이들을 만들고 그 위에 껍질을 씌웠다면.
이번에는 먼저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내용물을 끼워 맞춰 보기로 한 것이다.
요양원이 지어지게 될 장소.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감성.
그리고 그 안에 담기게 될, 휴먼 스토리.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다양한 건축 조형에 대한 심상을, 그대로 먼저 스케치에 표현한다면.
기능과 설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제법 그 알맹이들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아름답게 디자인된 ‘틀’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봐, 우진! 훨씬 더 나이스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우진과 제이든, 그리고 소연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각자 수십 장의 스케치들을 쏟아내었다.
하여 그 스케치들이 점점 더 많이 쌓여갈수록, 그들의 손에서 빚어진 투박하고 추상적인 ‘틀’이 점점 날카롭고 예리한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하였다.
“저희가 가지고 있던 심상이 모여, 이렇게 점과 선과 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수많은 점, 선, 면들이 모여, 저희 팀만의 독창적인 조형이 완성되었습니다.”
우진이 레이저 포인트를 누를 때마다, 그들이 그렸던 수많은 스케치들이 빠르게 스크린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1차원적이고 단순한 도형에 가까웠던 스케치들이 점점 쌓이면서.
그것들은 형태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고, 건축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백 장이 넘는 스케치가 지나갔을 때.
비로소 그들의 디자인이 담길 ‘틀’이 완성되었다.
“건축이란, 수많은 제약과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진의 말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고요한 가운데 모두가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제약’과 ‘현실’ 안에는……. 건축물이 지어질 환경, 그것의 기능. 그리고 건축주가 가진 예산과 국가에서 만들어 둔 건축법까지. 그 모든 것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킨 우진이,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희는 이 수많은 제약들 속에, 한 가지 제약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Desig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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