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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53화 (53/315)

53화

SPDC

SPDC의 본선 1차 심사는,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른여섯 팀이나 되는 본선 진출자들의 PPT를 일일이 다 들어볼 수 없었으니.

심사위원들이 각 팀원들에게, 작품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 던지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한 것이다.

그 질문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설계하신 평면을 보면, 물리치료실과 영상 의학실이 2층과 3층으로 다른 층에 배치되어있습니다.”

“예, 심사위원님.”

“혹시 이렇게 설계하신 이유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물리치료실은 환자분들이 거의 매일같이 이용하시는 시설입니다. 반면 영상 의학실은 특정 주기에 한 번 정도로, 사용 빈도수가 좀 낮은 곳이지요.”

“그래서요?”

“물리치료실이 2층의 병동 병실들과 가장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환자분들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한 결과입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 3분 휴식 후, 다음 팀의 질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팀당 질의를 나누는 시간은, 거의 5~7분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다.

휴식시간까지 포함해서 10분에 한 번씩, 다음 팀의 질의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진행해도 모든 팀의 질의를 마치려면 총 360분.

여섯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김 위원님. 지금부터는 좀 더 속도를 내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오전 9시부터 시작된 1차 심사는, 거의 오후 세 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중간에 점심 식사 시간이 빠지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3분도 안 걸려서 심사가 끝난 팀도 있었다.

그런 팀의 경우, 두 가지 케이스였다.

“병동으로 들어가는 데까지, 모든 경로가 계단을 통해야만 하는군요?”

“그, 그것이…….”

“휠체어는 이용하지 말라는 소리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건물 후문으로 이어지는 슬로프가 있습니다. 경사면을 따라 이동하면…….”

“간병 일주일만 하면, 온몸에 알배겨서 도망가겠습니다.”

“…….”

“다음 팀으로 넘어가죠.”

설계 자체에 큰 하자가 있다거나, 다른 본선 진출팀들보다 디자인 퀄리티가 확연히 떨어진다거나 하는 팀의 경우.

혹은…….

“경사 지대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단차를, 주차장 설계를 통해 해결하셨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설계하면, 높은 지대까지는 환자분들이 자연스레 자동차를 타고 올라오게 될 것이며, 주차장 공사를 위해 땅을 파내는 데 드는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가를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왕래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텐데요?”

“건물 후면의 산책로가, 북한산 둘렛길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또, 주차장 측면에 보시면 엘리베이터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환자분께서 직접적으로 언덕길을 오르시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요. 훌륭합니다.”

“전 더 물어볼 거 없습니다.”

“다음 심사 때 뵙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처음 심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불합격은 고려하지 않은, 압도적인 퀄리티의 작품을 출품한 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올해는 정말 눈이 즐겁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재작년쯤이었나? 뽑을 작품이 없어 힘들었던 해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사실상 최종심사에 올릴 네 작품은 이미 결정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가 좀 애매하긴 한데, 나머지 세 작품은 확실하죠.”

그리고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인사 중, 전직 K대 디자인과의 명예교수였던 강문식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중에 K대 작품이 두 개나 되다니. 강 심사위원께서는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임 교수님께서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두 작품이 아니라 세 작품이 될 수도 있죠.”

“아, 세 작품이 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일학년 작품 중 하나는 최우수까진 보지 않거든요.”

“하하, 겸손하십니다. 투표 결과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저는.”

오늘 큰 기대 없이 심사위원으로 왔던 강문식은, 모교 후학들의 선전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는 중이었다.

김기태라는 3학년 학생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1학년 학생들의 작품 두 개가 거의 졸업반 수준의 퀄리티로 본선까지 올라왔으니 말이다.

‘올해 애들 수준이 왜 이래?’

오히려 4학년의 작품들은 우수상 수준이 한계였는데, 신입생의 작품이 이렇게 감탄스러울 정도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보고도 믿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예년 같았더라면, 류선빈? 그 친구가 리더로 있는 팀의 작품만 해도 충분히 최우수상 이상을 노려볼 수 있었을 거야.’

강문식은 1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류선빈 팀이 제일 안타까웠다.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뽑아내고도, 대진운이 너무 좋지 못했던 탓에 우수상에서 그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가장 놀라운 팀 또한, K대의 1학년으로 구성되어 있는 서우진 팀이었다.

정말 사심 하나도 보태지 않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대상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작품을 내어놓았으니 말이다.

이제 갓 입학하여 1학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신입생.

그 햇병아리들로만 구성된 팀이 말이다.

‘기가 찰 노릇이군. 하하.’

설계부터 시작해서 외관디자인. 거기에 모형의 퀄리티까지.

만약 이 작품이, 유명한 건축사무소에서 출품한 설계라고 했더라도.

강문식은 아마 별 의심 없이 믿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판넬에서 1학년 티가 좀 나긴 하지만……. 이것도 모르고 봤다면 보일 수준은 아니지.’

강문식은 들고 있던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흡족한 표정으로 남은 심사까지 끝마쳤다.

이어서 우수상 이상의 작품들과 최우수상 이상의 작품들을 선별하기 위한 심사위원 회의가 열렸고.

“좋습니다. 이대로 가시죠.”

“이견 없으시면, 사회자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약 30분 만에, 별다른 논쟁 없이 그 결과가 발표되었다.

“최종심사에 출품이 확정된 팀을 발표합니다.”

공모전의 사회자가 대기실에 들어서자, 백여 명에 육박하는 참가인원 전원이 쥐죽은 듯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K대학교의 3학년, 김기태 팀!”

“와아아!! 선배! 됐어요!”

“기태 선배!”

최우수상 이상이 확정된 팀이 하나하나 호명될 때마다, 대기실이 가득 울릴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S대학교의 4학년, 유지선 팀!”

“와아앗! 언니! 축하해!”

“W대학교의 4학년, 고민성 팀!”

“민성이, 대박!”

“축하해! 최우수라니……!”

하지만 마지막 팀이 호명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K대학교의 1학년, 서우진 팀!”

장내는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1학년?”

“1학년이라고? 미친 거 아냐?”

심사위원의 입에서 호명된 1학년이라는 단어가, 대기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으니 말이었다.

* * *

서울시 디자인재단의 사외이사인 고석진은, 오늘 SPDC의 본선 심사가 진행되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제 아들이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기태 이놈. 이번에 정말 작정하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보시면 바로 아시겠지만……. 전년도 대상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겁니다.]

사실 1차 심사의 첫 열 작품 정도가 지나갔을 때만 해도, 그는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오늘 그가 한 표를 행사할 수밖에 없을 작품의 퀄리티가, 충분히 그 표를 받아갈 만한 수준이었으니 까.

‘흐음. 김진명 이사가 그렇게나 장담을 하더니……. 확실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심사 초반에 차례가 왔던 ‘그’ 작품의 퀄리티는, 분명 팀들을 압도할 정도로 훌륭했다.

[녀석이 턱도 없는 수준의 디자인을 제게 보여줬다면……. 이런 부탁, 드리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심사가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이건 점입가경이었다.

김기태의 작품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이, 뒷 순번에 몰려 있었던 탓이다.

‘하, 김진명이 이거 어떡하지. 받아먹은 게 있으니,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S대학교 학생들의 작품이나 W대학교의 작품만 있었더라도, 충분히 김기태의 작품을 밀어볼 만하였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태와 같은 K대학교의 1학년 학생들 작품이었다.

아직 최종 발표 심사가 남아있었지만.

거기서 김기태가 서우진 팀에게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면, 김기태 팀에 표를 주는 그림이 이상해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일학년 애들이니까, 발표는 잘 못하겠지?’

어차피 고석진은, 김기태의 팀에게 표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를 받고도 김기태가 떨어진다면, 자신이 어떤 표를 행사했던 김진명은 분노할 것이었다.

명성건설과 그사이에 얽혀있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 좋지 못한 결과였다.

‘제길. 이번 심사위원……. 괜히 한다고 했나?’

힘 안 들이고 생색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건만, 어쩌면 본전도 건지기 힘들지도 모르는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이 작품은……. 정말 대단하긴 한데, 학부 1학년생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심스럽지만……. 어떤 부정한 방법을 쓴 건 아닌지, 그게 우려 되서 그럽니다.”

심사위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그 말을 들은 고석진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

지금도 눈앞에서 보고 있지만.

정말 말도 되지 않는 하이 퀄리티의 설계와 디자인. 그리고 모형이다.

애초에 그런 가정 자체를 해보지 않아서 생각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런 의문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졸업반이 했다 해도 기가 막힐 수준의 작품이야. 그런데 1학년이 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사용자 동선을 배려한 꼼꼼한 설계와, 자로 잰 듯 치밀하게 작업 된 모형.

실무 담당자 몇 붙여다가 며칠만 뜯어고친다면, 그대로 시공 입찰에 들어가도 될 정도의 완벽한 도면.

한번 의심이 시작되자,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식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셋이서 작업한다면, 디자인에 설계만 뽑는 데도 한 달이 넘게 걸릴 작품이야. 그런데 이런 실사 같은 모형까지 한 달 안에 만들어냈다? 이건, 확실히 냄새가 나.’

고석진의 생각은, 결코 주관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학생이라는 전제를 빼고 보더라도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진 설계와 디자인이 뽑혀 나오려면, 한 달도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형까지 이제껏 보지 못한 퀄리티로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 담긴 스토리와 디자인 철학도 뛰어나다.

이것은 물리적인 시간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진의 경우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체계화된 모형제작 스튜디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1학년 학생에게 그런 인프라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전제였다.

‘후후.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군.’

무겁게 얹혀 있던 마음의 짐을 조금 덜은 고석진이, 의문을 제기한 심사위원에게 다가가 그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저도 내내 그 부분이 걸렸었는데……. 이 위원님께서 먼저 얘기를 꺼내 주시는군요.”

한 사람이 더 입을 열었다.

“그런 상황은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심사가 전부 끝난 뒤에 조사는 한 번 해봐야겠습니다.”

몇 사람이 제기한 의견 때문에, 열 명 정도가 앉아있는 심사위원 대기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심사위원장 안정묵의 칼칼한 목소리가 장내에 내리깔렸다.

“다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

“지금 이 자리가, 그런 얘기나 나누자고 모인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위원장님…….”

고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안정묵은 그 말을 대번에 잘라내었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우리 디자인재단에서 누구 보다 앞장서서 밝혀낼 것입니다. 하지만……!”

주름진 안정묵의 눈동자에, 묵직한 안광이 내리깔렸다.

“그런 색안경을 미리부터 끼고 작품을 보는 것은,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SPDC의 심사위원장이자, 서울시 디자인재단 이사장인 안정묵.

그는 한국 건축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거장이었고, 사실상 이 SPDC라는 공모전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래서 장내의 그 누구도, 그의 말에 쉽게 토를 달 수 없었다.

“그 어떤 확인되지 않은 주관이 SPDC의 심사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면, 전 무척이나 실망할 겁니다.”

말을 하던 안정묵의 시선이, 대기실의 구석에 잠깐 머물렀다.

묵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유일한 외국인 심사위원 브루노 산체스.

그를 잠시 응시한 뒤, 정묵은 굳은 표정으로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안정묵은. 그 어떤 불공정한 정황도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심사위원들께서는, 이곳에서 오직 작품만을 봐 주시길 바랍니다.”

조용해진 대기실에서, 심사위원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묵이 이야기한 말 중에,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내심 여론이 형성되길 바랐던 석진의 미간에는, 깊게 골이 패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노인네, 혼자 깨끗한 척은.’

예기치 않은 이야기들로 인해, 대기실에 어색한 침묵이 지속됐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곧 최종심사가 시작됩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심사위원 대기실에 울려 퍼진, 사회자의 경쾌한 목소리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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