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SPDC
K대 캠퍼스의 디자인학부는, 아침부터 무척이나 분주했다.
오늘은 SPDC의 본선 일정이 잡혀있는 날.
올해 K대학교는 가장 많은 본선 진출자를 배출해 냈고, 그것이 아침부터 캠퍼스가 분주한 이유였다.
다들 아침 일찍부터 자신의 모형을 포장해서, 서울 디자인재단 건물이 있는 용산으로 이동해야 했으니까.
보통의 학생들은 우진처럼 본인의 작업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대부분 학교 작업실이나 과실에서 공모전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철컹-!
학교 차원에서 대절한 버스가 디자인대 건물 앞에 도착했고, 측면의 트렁크 문이 열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꼼꼼히 포장된 자신들의 모형을 하나씩 차곡차곡 그 안에 쌓아 넣었다.
“올해 본선 진출 팀이 열 한 팀이라고?”
“그렇습니다, 학과장님. 역대 최고 숫자인 것 같습니다.”
“그래?”
“본선 진출 팀이 두 자릿수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SPDC에서 본선에 선발되는 인원은, 총 36팀이다.
때문에 11팀이라는 숫자는 전체 합격 인원의 30%에 육박하는 수치였고, 그것이 한 학교에서 나온 숫자라는 건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작년이 몇 팀이었지?”
“여섯 팀입니다.”
“거의 두 배수가 됐군.”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 윤치형 교수의 얼굴에, 흐뭇한 표정이 어렸다.
그가 학과장으로 부임한 게 올해부터였으니, 이 또한 그의 실적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창밖으로 버스에 오르는 학생들을 지켜보던 윤치형 교수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였다.
오늘따라 커피 향이 그윽한 게,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번에 본선 진출자가 많은 데에는, 신입생들의 선전이 큰 몫을 했습니다.”
조교수의 이야기에, 윤치형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본선에 올라간 열 한 팀 중에, 1학년이 무려 세 팀이나 되거든요. 4 학년이 네 팀, 3학년이 세 팀……. 한 팀밖에 올라가지 못한 2학년보다도, 오히려 많은 숫잡니다. 처음 있는 일이죠.”
“오호……?”
“작년과 재작년에 한 팀도 본선 진출을 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로 특별한 일입니다.”
윤치형의 기분이 더더욱 좋아졌다.
자신이 부임한 해의 신입생들이 이렇게나 역량이 뛰어나다면, 장기적으로 그의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K대학의 학과장 임기는 3년이었고. 이 뛰어난 신입생들은, 그 3년 동안 K대의 이름과 자신의 실적을 드높여 줄 것이었다.
“혹시 신입생 팀 중, 우수상까지 바라볼 만한 작품이 있을까?”
윤치형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조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대충 살펴봤는데, 그 박준민 교수가 멘토링 하고 계시는 팀 하나는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오……! 그래?”
“그 이번에 수석 입학했던 류선빈이라는 학생이 리더인 팀인데, 퀄리티가 진짜 괜찮더라고요. 어중간한 3학년 팀보다 나았습니다.”
“후후, 기대되는군. 그럼 나머지 두 팀은?”
“한 팀은 본선 턱걸이로 보이고, 나머지 한 팀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작업을 학교에서 안 하고 외부에서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감이 잘 안 옵니다.”
윤치형 교수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래. 뭐, 한 팀만 우수상 이상 받아도, 신입생 수준에선 훌륭한 결과지.”
본선에 진출한 서른여섯 팀은, 사실상 ‘입선’까지는 수상이 확정된다.
그 절반인 열여덟 팀은 ‘특선’ 수상이 확정되며, 다시 그 절반인 아홉 팀이 ‘우수상’ 이상을 받을 수 있는 팀.
그 중 ‘최우수상’을 받는 팀이 세 팀이며, 한 팀이 대상을 받게 된다.
‘세 팀 정도만 우수상 안쪽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 기왕이면 대상도 하나 나왔으면 좋겠고 말이지.’
친구인 S대의 교수 박명철을 떠올린 윤치형은,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올해 본선 진출자의 숫자가 오랜만에 S대를 앞질렀기 때문에. 다음 모임에서 만나면, 친구의 속을 좀 긁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상 수상자가 S대에서 나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 오후 일정, 비어있지?”
“예, 교수님.”
“최종심사 시간에 맞춰서, 용산으로 가봐야겠어.”
“직접 참관하실 생각이십니까?”
윤치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새끼들 상 받는 건, 봐야지 않겠나. 하하.”
최종심사에는, 우수상 이상 받을 아홉 팀만이 올라온다.
만약 그 중 K대 학생이 아무도 없다면 허탕을 치겠지만, 윤치형은 그럴 일이 없다고 확신했다.
K대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실에는, 오늘따라 훈훈함이 가득하였다.
* * *
아침부터 미용실에 들러 한껏 멋을 부린 김기태는, 용산까지 자차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학교에서부터 땀을 뻘뻘 흘려가며 모형을 이동시키고 있었지만, 기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준비한 것은, 판넬 디자인 파일과 발표 PPT가 담겨있는 작은 USB 하나뿐.
모형은 업체에서 용산까지 직접 배달해 준다고 했으니, 같은 팀 후배들과 함께 여유 넘치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기태는 같은 3학년 여자 후배 둘과 한 팀이었고, 그들 또한 기태의 차를 타고 함께 용산으로 이동 중이었다.
“선배, 아침부터 저희 때문에 고생하시고……. 죄송해서 어쩌죠?”
“죄송하기는. 그냥 가는 길에 태워 가는 건데.”
“모형 작업도 거의 선배 혼자 하셨잖아요. 저희 둘이 한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아, 아냐, 아냐. 너희가 한 게 없다니. 예진이 네가 이미지 보정 다 했고, 유민이가 판넬 거의 다 만들었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잘 해줬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기태의 팀원인 김예진과 이유민은, 같은 3학년이었지만 두 학번이 차이나는 후배였다.
그리고 말은 이렇게 했어도, 기태는 본인이 이 프로젝트를 9할 이상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말이다.
‘지들 한 거 없는 거. 다행히 알긴 아네.’
예진과 유민은 실력이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성건설이라는 인프라를 등에 업은 기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작업은 기태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두 여학생들은 시쳇말로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태는 그것이 기분 나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걸 알고도, 그 둘에게 먼저 팀플 제안을 했던 게 기태였으니 말이다.
예진과 유민이 오히려,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노력했을 정도였다.
‘이제 남은 건, 최종심사 피티할 때 입에 기름칠 좀 하는 것뿐이려나? 내 덕에 대상까지 받게 되면, 유민이도 날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
사실 기태가 두 후배들을 팀원으로 섭외한 데에는, 처음부터 목적이 있었다.
08학번이 신입생일 때부터, 신입생 중 가장 예쁘기로 유명했던 유민.
기태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다보니 그녀와 친한 예진도 함께 팀에 끼게 됐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팀원이 하나 더 는다고 불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에는 오히려 더 좋을 테니 말이다.
끼이익-
디자인 제단 건물의 지하에 주차한 뒤 배송된 모형을 수령 한 김기태는, 후배들과 함께 느긋한 표정으로 심사장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발표 연습도 충분히 했고. 아버지께서도 도움 좀 주시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대상 못 받으면, 김기태 나가 죽어야지.’
아직 본선 첫 번째 심사도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기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정확히 어떤 도움을 주시는지 까진 알지 못했지만, 그게 자신의 대상 수상을 확정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짐작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명성건설의 상무이사라는 직책은, 이 바닥에서 그 정도 힘은 가지고 있는 자리였으니까.
“자, 후배님들. 음료수나 한 잔씩 뽑아 먹고 긴장 좀 풀자고.”
“예, 선배.”
“저희야 뭐……. 발표하시는 선배님이 걱정이죠.”
“하하, 연습 많이 했다니까? 대상까진 몰라도, 최우수 이상은 받아야지, 우리.”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김기태.
그런데 바로 그때.
먼저 3층에 올라와 모형을 제출하는 한 팀을 발견한 기태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살짝 꿈틀거렸다.
“……!”
SPDC 관계자가 수령하고 있는 모형이, 얼핏 봐도 미친 수준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지? S대 놈들인가?’
학과 내에서 다른 팀들의 작품을 봤을 때도 속으로 코웃음을 쳤던 김기태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경각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모형의 퀄리티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외관 형태까지도.
자신의 작품에 비해 꿀릴 것이 전혀 없는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어디서 튀어나온 작품이지? 어디 해외 디자인업체에, 몰래 의뢰라도 해서 가져온 건가?’
자신 또한 명성건설의 인프라를 빌렸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은 것인지, 눈앞에 보이는 작품을 보며 속으로 부들부들 떠는 김기태.
그런데 다음 순간, 더욱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와, 쟤들 1학년 아냐?”
“맞아! 그때 3학년 대면식 때, 우리 테이블에 앉았던 우진이잖아?”
“대박! 모형 퀄리티 개쩐다!”
그의 옆에 있던 예진과 유민이, 모형을 제출 중이던 학생에게 아는 척을 하며 쪼르르 달려간 것.
‘뭐? 우리 과 1학년이라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김기태는, 곧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모형의 퀄리티는 도저히 1학년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고.
때문에 어디 해외 디자인업체의 손을 빌려, 편법으로 작업한 것이라고 확신했으니 말이다.
국내업체라고 생각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기태가 아는 국내 모형업체 중에는, 저만한 퀄리티를 뽑을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팀원들 중 멀대 같은 외국인까지 하나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기태가 볼 때,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 선배 안녕하세요, 선배도 SPDC 본선 출품하러 오셨나 봐요?”
“우리 그때 동갑이라고 말 놓기로 했었잖아, 우진아.”
“아, 그랬었나?”
“후배 님, 나는 기억해? 대면식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유민인데.”
“당연히 기억하죠, 제가 또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은 편이거든요.”
“또, 존댓말 한다, 우진이. 우리 전부 동갑이라, 그때 다 같이 말 놓기로 했잖아.”
“야. 우진이 쟤, 기억력 나쁘지 않다는 거,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은데?”
우진이라는 1학년 새내기에게, 팀원인 예진과 유민이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보자.
기태는 더욱 속에서 열이 뻗치기 시작하였다.
‘저 속 없는 것들은 저기 쪼르르 가서 뭐 하는 거야?’
해서 기태는, 온 힘을 다해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확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학회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무너질 것이었으니 말이다.
‘침착하자.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고……. 1학년 정도는 피티에서 눌러버리면 돼. 발표까지 외주로 돌릴 수는 없을 테니까.’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우진에게 다가간 기태는,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처음 보는 신입생이었지만, 어쩐지 인상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가워요, 후배 님. 학생회장 김기태라고 해요.”
그리고 김기태의 손을 맞잡은 우진은, 씨익 웃으며 기분 좋게 대답하였다.
“아, 오티 때 봬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10학번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우진과 기태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맞부딪쳤고.
그 순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1학년부터 못 돼 처먹은 것만 배워가지고……. 내가 네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떨어뜨린다.’
‘김기태, 이놈도 본선까진 올 줄 알았지. 오늘 한번, 제대로 밟아줘야겠어.’
맞잡은 두 사람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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