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소연의 이야기
옅은 밤 그림자가 깔린 K대학교의 후문.
아직까지 가로등 없이 걸을 수 있는 초저녁 수준의 어둠이었지만, 시계는 벌써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6월이 끝나가면서, 해가 길어지고 있는 탓이었다.
“저, 떡볶이 5인분 주세요.”
“떡볶이면 돼요?”
“음, 튀김도 한 3인분에 어묵탕도 2인분 정도. 아, 여기 치즈스틱도 맛있던데, 그것도 세 개 추가해주세요.”
후문 골목에 있는 분식 맛집에서 떡볶이를 잔뜩 산 소연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으아. 떡볶이 냄새 진짜, 엄청나잖아……? 빨리 먹고 싶다.”
소연의 손에 들려있는 떡볶이를 비롯한 분식들은, 절대 혼자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연은 이것을 동생들을 주기 위해 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오랜만에, 우진의 작업실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 오빠 작업실은, 초기 오픈 때 이후로 한 번도 안 가봤네.’
우진의 작업실은 학교에서 가까웠지만, 소연이 방문할 일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우진이 동기들을 작업실로 부르는 일 자체가 없었으며, 최근에는 우진조차 작업실에 잘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궁금했던 소연은, 제이든에게 한번 작업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이든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Hell’ 이라고 했다.
[우진의 작업실? 거긴 Hell이야.]
[근데 넌 왜 맨날 거기 들락거리는 건데?]
[그야 난 일개미고, 거긴 개미지옥이니까.]
[……?]
[악덕 업주 우진의 마수에 한 번 걸리고 나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 소연도 조심해.]
[…….]
제이든의 평가가 어떻던, 우진의 작업실로 향하는 소연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오늘은 지난 한 달 가깝게 그녀와 팀원들이 디자인한 작업물 중 하나가, 완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그 작업물이란 바로, SPDC 공모전에 출품할 요양원 건축물의 모형.
우진의 말에 의하면 오늘 모형이 완성될 것이라 하였고, 때문에 소연은 오늘 깜짝 방문을 계획하였다.
어차피 며칠 뒤면 모형을 보게 될 테지만, 당장 지금 궁금해서 보고 싶었으니까.
‘제이든이 아주 자신만만해하던데……. 뭐, 우진 오빠가 만든 모형이니, 어련하겠어.’
모형이 완성단계에 이를 때까지, 같은 팀원인 소연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우진과 제이든이 모형 쪽을 맡아 작업하는 동안, 그녀는 모형 옆에 붙일 판넬 디자인 작업을 맡았으니 말이다.
판넬 작업도 하루 이틀 만에 끝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고.
그것을 혼자 만들어낸 소연 또한, 우진과 제이든 못지않게 제 몫은 단단히 한 셈이었다.
“이쪽 근처였던 것 같은데……. 찾았다!”
우진의 작업실 건물을 찾은 소연은, 환하게 웃으며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구식 건물이었지만, 우진의 작업실은 2층이었기에 딱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딩동-
소연은 천천히 계단으로 올라가 조심스레 작업실의 벨을 눌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작업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지? 잘못 왔나……? 그럴 리는 없는데…….”
* * *
“야, 우진! 큰일 났어!”
우진과 다른 방에서 모형작업을 하던 석현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우진을 향해 뛰어왔다.
“뭔데, 석구. 나 지금 집중해서 작업 마무리해야 하니까, 조금 있다가 얘기하면 안 될까?”
우진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석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조금 있다 말해?”
“무슨 문젠데.”
“이상한 사람이 작업실 벨을 눌렀단 말야.”
“이상한…… 사람?”
“그냥 문 열어줬다가, 장기라도 털리는 건 아니겠지? 저어기 태평양 새우잡이 배에 팔려간다거나?”
석현의 말을 들은 우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어 반문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개 뼉다구 같은 소리야?”
하지만 석현의 흥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미친! 말도 안 되게 예쁜 여신님이 우리 작업실 벨을 눌렀다고!”
“……?”
“뭔가 목적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공대 강의실만큼 시커먼 이 모형 작업실에 예쁜 여자라니. 안 그래 제이든?”
마치 랩이라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뒤, 제이든의 동의를 구하는 석현.
하지만 어이없는 표정의 우진과 흥분한 석현과는 다르게, 제이든은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석현, 어쩌면 이곳에 제이든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지도 몰라. K대 캠퍼스에는, 이 제이든 님을 흠모하는 미녀들이 아주 많거든. 바로 어제만 해도 이 제이든 님은…….”
“후…….”
우진은 제이든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제이든도 제이든이었지만, 요즘 석현까지도 ‘제이든화’ 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둘이 매일 밤 헤드셋을 쓰고 밤새워가며 게임하기 시작한 뒤부터.
석현이 조금씩 제이든에 동화된 것이 분명하였다.
둘은 요즘 무슨 일만 있으면, 자신들이 영혼의 듀오라고 떠들어대곤 했으니까.
“그나저나 예쁜 여자라니.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지?”
철컥-
호들갑을 떤 석현과 달리, 우진은 별생각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문 앞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우진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말았다.
솔직히 예쁜 여자라기에 조금은 기대했는데, 정확히 세 시간 전에도 마주 보고 있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물론 소연이 예쁜 건 맞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열어?”
“휴우.”
“지금 그 불량한 태도, 뭐냐. 팀원님이 이렇게 떡볶이까지 사 들고 오셨는데, 보자마자 한숨이라니!”
짧은 한숨 뒤, 뒤늦게 반가운 표정이 된 우진이, 소연의 떡볶이를 받아들고는 그녀를 작업실 안으로 안내하였다.
우진은 팔자 눈썹까지 만들며 째려보는 소연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 준 뒤, 그녀가 기분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던져주었다.
“작업실에 있는 친구 놈 하나가, 너보고 여신님이래.”
“……?”
“들어와. 인사시켜줄게. 네 첫 번째 신도인 것 같으니까.”
잠시 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소연은, 곧 그 뜻을 깨닫고는 거만한 표정이 되었다.
“후훗. 오빠 작업실에도 뭘 좀 아는 분이 계셨잖아?”
“뭘 모르는 바보가 하나 있었지.”
“그리고 첫 번째 신도라니. 틀렸어, 오빠”
“……?”
“내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이제 오빠도, 내 미모에 대해 좀 깨달을 때가 됐어.”
“제발 제이든 같은 소리 하지 마.”
제이든이라는 우진의 얘기에, 밝아졌던 소연의 표정이 다시 구겨진다.
“철학가라고 불러도 좋으니까, 어지간하면 제이든이랑은 비교하지 말아 줄래?”
“제길. 내 작업실에 제이든이 셋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몰라도 돼.”
소연을 데리고 들어온 우진은 석현에게 그녀를 인사 시켜주었다.
늦은 시간이라 직원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기에, 작업실에는 그들 네 사람뿐이었다.
재밌는 것은, 방금까지 흥분상태로 날뛰었던 석현이 마취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조용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야, 석구. 여신님 들어오셨는데, 왜 이렇게 조용해졌냐?”
“소연. 여기 석현이, 너 엄청 예쁘대. 아까 막 흥분하더니, 덤블링까지 하면서 뛰어다녔어.”
“내가 언제!! 님들, 제발 그러지 마. 부탁이야. 제발.”
얼굴이 잔뜩 빨개진 석현은 어쩔 줄 몰라 했고, 그런 석현을 놀리는 게 재밌는 우진과 제이든은 깔깔거리면서 웃어대었다.
다만 그런 석현이 안쓰러워 보인 소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을 뿐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이예요. 오빠가 이해해요.”
“네……? 넵!”
처음 보는 석현의 귀여운 모습에, 우진은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보면 석현은 남중 남고 공대를 나온 전형적인 공돌이였고.
매일같이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 공부한 석현의 눈에, 소연 정도면 여신으로 보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여신소연. 오늘만큼은 특별히 여신님이라고 불러주도록 할게.”
“뭐야, 아재 몇 살이세요? 갑자기 왜 이래 이 오빠.”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떡볶이를 사 왔으니까.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라도 사 먹으러 나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거든.”
놀림의 대상으로 장작처럼 활활 불타오른 석현 덕분에, 소연은 금세 작업실 분위기에 동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떡볶이를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던 소연은, 곧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과 함께 웃고 노는 것도 재밌었지만,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오빠. 모형은 어디 있어?”
“아, 한소연 갑자기 어쩐 일인가 했더니, 그거 보러 왔구나?”
“궁금하잖아.”
“잠깐, 이쪽으로 와봐.”
우진은 아직까지 떡볶이를 먹으며 신나서 떠들고 있는 영혼의 듀오를 구석방에 남겨둔 채, 소연을 자신이 작업하던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우진을 따라 들어온 소연은, 잠시 후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와…….”
작업실 정 중앙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모형의 퀄리티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우리 모형이야?”
“보면 알잖아. 같이 디자인한 건데.”
“미친……. 대박…….”
소연은 우진이 모형작업을 잘한다는 사실을 O.T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우진이 전력을 다해 작업한 모형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석현과 작업실 직원들의 도움까지 받아 미친 듯이 퀄리티를 올린 노가다의 결정체였으니.
소연의 입이 벌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선 채로 모형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연을 향해,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상 완성된 모형이야. 마무리작업이 조금 남긴 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 나지도 않을, 디테일 작업들만 조금 남은 거니까.”
우진의 말을 들은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애초에, 이 모형이 완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냥, 사진 같아 오빠.”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연을 향해, 우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이번 공모전, 대상 타게 해주겠다고.”
“사기진작 차원에서 해본 말인 줄 알았지.”
“맘에 드십니까, 여신님?”
“지금 감동하고 있었는데, 꼭 그렇게 분위기 깨야겠어?”
우진에게 핀잔을 준 소연은, 모형의 앞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이어서 그녀는 가방을 열어, 다른 동기에게 빌려온 고가의 DSLR 사진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작업한 판넬에는 아직 모형 사진이 배치될 공간들이 비어 있었고.
소연은 한시라도 빨리 이 모형 사진을 빈자리에 삽입해서, 판넬 디자인 파일에 Final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었으니 말이다.
“아직 완성 아니라니까?”
“있어 봐. 어차피 티도 안 날 거라며.”
“그래도 그 미묘한 차이가…….”
“시끄럽고, 사진 찍는 거나 좀 도와줘 봐.”
우진은 소연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집기들을 깔끔하게 치워줬다.
그리고 모형 사진을 찍기 위해, 하얀 실크 스크림(Silk Scrim)*[실크재질의 망사로 조밀하게 짜인 그물망. 조명 앞에 설치하여, 빛의 강도를 낮추고 부드럽게 퍼지는 빛을 만들 때 사용한다.]과 반사판을 적당히 설치했다.
우진이 WJ 스튜디오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사용하던 장비였다.
“좋았어.”
생각지 못했던 장비까지 세팅이 되자, 소연은 더욱 신난 표정이 되었다.
이어서 그녀는, 거의 삼십 분이 넘도록 모형 구석구석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며 셔터를 눌러대었다.
소연은 불을 다 끈 상태에서 LED조명을 키고, 야경 버전의 사진까지 수십 장을 찍어낸 다음에야 사진 찍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에 쌓인 사진들을 쭉 훑어본 뒤, 만족스런 표정으로 우진에게 말했다.
“오빠, 나 이만 가볼게.”
“벌써?”
“당장 집에 가서, 사진 보정 작업을 시작해야겠어.”
“벌써 가면 석구가 서운해할 텐데…….”
“어쩔 수 없어. 나 바빠. 간다!”
DSLR을 보물처럼 싸서 가방에 집어넣은 소연은, 제이든과 석현에게 대충 인사를 남긴 뒤 빠르게 작업실을 나섰다.
우진은 갑자기 후다닥 작업실을 나서는 소연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기꺼운 표정이 되었다.
‘뭐, 열정적인 건…….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그렇게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다이나믹 했던 하루가 또 지나갔고.
어느덧 6월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우진을 비롯한 세 사람은 무리 없이 일정 안에 작업물을 완성하였고.
마지막까지 소연이 밤을 새워가며 작업한 A1사이즈의 디자인 판넬 파일을, 기한에 맞춰 SPDC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었다.
SPDC 공모전의 예선은 모형 실물 없이 판넬 디자인만으로 결과가 결정되기에, 모형은 계속 우진의 작업실에 보관되었다.
물론 판넬만 제출한다고 해서 모형의 영향력이 적은 것은 아니다.
판넬의 내용 안에는 필수적으로, 직접 제작한 모형 사진이 첨부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7월의 둘째 주 수요일인 7월 7일.
우진과 소연, 제이든의 휴대폰에 같은 내용의 문자가 동시에 날아왔다.
[서우진 님, SPDC 공모전에 출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선 심사 통과를 축하드리며, 본선 일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SPDC의 본선은 서울 디자인재단 건물에서 진행되며…….]
처음부터 예선탈락 같은 결과는 생각도 않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합격이라는 소식은, 기분 좋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본선이라……. 이제 시작인가?’
합격 소식을 확인한 우진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목표는 당연히 대상.
그리고 우진은, 자신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