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소연의 이야기
지금껏 학교생활을 하면서, 소연은 단 한 번도 동기들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물론, 둘이나 되는 그녀의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사를 꼭 숨겨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가정사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으며 자라왔고, 때문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 이었다.
그녀가 항상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웃는 얼굴을 보이려 애쓰는 것도.
어쩌면 우울함이 남아있는 자신의 내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월이 흘렀고, 이젠 그 상처들이 제법 아물어 가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오늘따라 엄마가……. 보고 싶네.’
소연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린 시절, 암 투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당시 10대 초반이었던 소연에게는, 이겨내기 힘들 정도로 아픈 시련.
그렇다고 기댈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신 것도 아니었다.
소연은 아버지의 얼굴을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더 어렸던 시절, 어머니와 이혼하고 해외로 나가셨으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라고는, 그녀를 어릴 적부터 키워주신 외할머니 한 분이 전부였다.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쩔꼬…….]
[흑……. 흐아아아앙……!]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아버지가, 꽤나 부유했다는 사실.
어머니는 이혼하실 때 아버지께 꽤나 많은 위자료를 받으셨고.
지금까지도 소연은, 양육비 명목으로 꼬박꼬박 평범한 직장인 월급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소녀 가장인 소연에게 넉넉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돈이 아니었다면, 소연이 이렇게 대학에 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아버지의 위자료가 아니었다면 구할 수 없었을 테고 말이다.
끼이익-
오늘도 바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소연은, 조용히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지금 시간이면 아마 집에 들어온 동생이, 방문을 닫아놓고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동생은, 두 살 터울의,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었다.
“가연아, 저녁은 먹었니?”
“먹었어.”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언니가 말 안 해도, 열심히 하고 있어.”
예민한 고3인 가연은, 퉁명스럽긴 해도 착한 동생이었다.
반에서도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똑똑한 동생이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이제 중학교 3학년인 셋째 아연만큼, 귀여운 맛은 없었지만 말이다.
“가연 언니 오늘 예민해. 그 좋아하는 치킨도 안 먹고 남겨놨어.”
“치킨? 치킨이 어디서 났어, 아연아?”
“할머니가 사주셨어. 하굣길에 할머니 보고 왔거든. 헤헤.”
셋째 아연의 성향은, 가연과 완전히 반대였다.
매사에 살갑고 애교가 많았으며, 큰언니인 소연을 잘 따르고 무척이나 긍정적인 아이.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아연이 너도, 이제 기말고사 기간 아니야?”
TV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던 아연이,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얘기했다.
“맞아. 내일부터 시작이야.”
“근데, 공부 안 해?”
“공부 다 했어.”
“……?”
“내 목표는 어차피 반 30등이거든.”
“너네 반, 서른다섯 명 아냐?”
“정확해.”
“으음…….”
“하지만 어쩌면 25등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언니. 어쩌다 보니 공부를 좀 많이 한 것도 같거든.”
“그, 그래…….”
소연은 배시시 웃는 막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가방을 풀고 외투를 벗어 걸었다.
공부에 조금 소홀하기는 해도, 그녀는 아연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커서 뭘 해도 자기 앞가림은 할 녀석이니까.’
아연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도, 항상 사랑받을 줄 아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아연에게는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재능이 있었고.
소연은 그것이, 그 어떤 재능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툭-
가방과 함께 등에 메고 있던 도면 통을 내려놓은 소연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 넓지 않은 침대에 대자로 뻗어 드러누운 소연.
빡빡한 하루로 인해 피곤했던 것인지, 소연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작은 보조개가 파인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가볍게 걸려 있었다.
* * *
소연에게는 사실, 며칠 전부터 고민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소연의 고민은,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공모전 팀플 장소에 대한 고민일 뿐이었으니까.
‘확실히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한번 다녀오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소연과 그녀의 동생들을 길러주신 외할머니는, 퇴행성 질환으로 인해 몇 년 전부터 요양원에 계셨다.
때문에 팀플을 하며 자료조사를 할수록, 할머니께서 머물고 계시는 요양병원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소연과 그녀의 팀원들이 생각하는 이번 공모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사용자의 경험이었고.
그러한 측면에서 실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볼 수 있다면, 제법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운영 중인 요양원을 방문하는 것을 넘어, 그곳에 머물고 계신 할머니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들어보는 것은.
좀 더 UX차원에서 심도 있는 고민을 할 수 있게 해 줄, 훌륭한 소스가 될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지만 소연은 선뜻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할머니께서도 손녀가 친구들을 데려오면, 기뻐하실 게 분명했지만.
이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다.
정말 마음을 터놓고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왔던 그녀의 원칙.
그것이 지난번 우진과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도,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어릴 적 받았던 수많은 상처들이, 아직까지 완전히 아물지 못한 탓이다.
‘분명 할머니의 요양원에 간다 해도 별일은 없을 텐데…….’
물론 우진과 제이든을 빼고 소연 혼자 할머니를 찾아가서, 요양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소연이 갈등하는 본질은, 더 깊숙한 곳에 있었다.
만약 이런 계기가 있음에도 우진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진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다시 마음을 열기 힘들 것이라는 마음속 걱정.
때문에 소연은 쉽사리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어제, 불광동 답사가 예정되어있던 전날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쩌지……. 내일 팀플이 끝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결정해야 하는데.’
하지만 오늘 소연에게는, 어쩌다 보니 너무도 확실한 계기가 다시 한번 생기고 말았다.
예정되어 있던 <세운 요양병원>답사에서, 불가피한 이유로 병원 내부답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제법 기울었던 소연은, 결국 우진과 제이든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저…… 오빠.”
“응?”
“답사 장소, 성동구 쪽으로 옮기는 건 어때?”
“성동구? 갑자기 성동구는 왜?”
“사실 우리 외할머니께서, 성동구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계시거든.”
“……!”
소연은 간략하게나마, 우진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우진은 잠시 침묵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아무리 A형 독감이 유행한다 해도……. 소연이는 확실한 보호자니까, 들어갈 수 있겠네.”
“그렇지.”
“게다가 할머니께 실제 요양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도 현실감 있게 들어볼 수 있을 테고.”
소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빠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던 게, 그거잖아.”
해서 소연을 포함한 세 사람은, 그 길로 내려와 제이든의 차에 탔다.
제이든의 아버지가 한국에 버리고 갔다고 했던 차는, 무려 삼각별 로고가 박혀있는 독일제 중형 세단이었다.
제이든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우쭐한 표정으로 자화자찬을 시작하였다.
오늘 아버지의 차를 끌고 나온, 자신의 선택이 나름 뿌듯했던 모양.
“역시 제이든은 훌륭해. 미래를 내다볼 줄 알지.”
물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진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운전이나 해, 헬보이. 면허는……. 있는 거지?”
“후우. 우진은 제이든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데 제이든. 네 아버지가 버리고 가신 이 차 말이야, 혹시 나한테 싸게 넘길 생각은 없어?”
“그건 곤란해 우진. 만약 그랬다간, 최소 세 달 동안 용돈이 끊길 거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두 사람의 만담을 뒷좌석에서 지켜보며, 소연은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덤앤더머도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 성수동의 요양병원으로 가 소연의 외할머니를 만난 세 사람은, 그곳에서 무척이나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 요양원의 생활.
그곳의 경험을 가진 할머니의 값진 이야기들.
거기에는 실제로 이 생활을 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 밀도 있게 담겨 있었고.
밤늦게 성수동 요양원에서 나온 우진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요양원 디자인에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
그렇게 우진을 비롯한 세 사람의 실질적인 공모전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스페인 최고의 건축디자이너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인 브루노 산체스(Bruno Sanzchez)는, 지난 일 년 동안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개인적인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서울에 머무는 이유는, 단지 일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일 년 전에 서울시에서 열었던 국제 건축 공모전에 자신이 디자인한 설계를 출품했었고, 그것이 당선되어 서울에서 일하게 된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산체스는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제법 호감이 생겼다.
서울은 그가 가봤던 세계 어떤 나라의 도시보다도 치안이 훌륭했으며, 대중교통부터 시작해서 많은 시스템들이 편리하게 자리 잡혀 있었으니 말이다.
‘난개발 때문에 아직까지 낙후된 지역들도 분명히 있기는 했지만……. 그런 곳들까지 전부 다 정비되고 나면, 서울은 분명히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할 거야.’
하지만 바로 며칠 전.
브루노는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불쾌한 일을 겪게 된 것이다.
그 발단은, 그가 속해있는 스페인 건축디자인 협회에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자네, 이번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공공건축 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관하게 됐다는 사실을 들었네.]
“협회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마티아스에게 들었지. 아니, 그 전에……. 자네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먼저 들었다는 얘기가 더 정확하겠군.]
브루노는 자신이 속한 협회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현직 협회장인 ‘로드리고’는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는 건축가라기보다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성은 딱히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 걸려온 그의 전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브루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아마 자네가 심사하게 될 작품 중에, K대학교 출신의 학생 ‘김기태’의 작품이 있을 거라네.]
“…….”
[협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포터의 부탁이야. 자네의 한 표를, 그에게 행사해 줬으면 해.]
“협회장님. 저 이런 일 싫어하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공익을 위해서 때론 약간의 불합리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하지.]
“이게 어떻게 공익입니까. 이건…….”
[끝까지 듣게, 브루노. 나도 그렇게까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은 아니야.]
“그게 무슨……?”
[그 ‘김기태’라는 학생의 작품이 자네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턱없이 부족한 클래스라면, 내 요구를 거절해도 아무 말 않겠다는 말일세.]
“음…….”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작품들이 마지막까지 올라온다면, 그의 손을 들어달라는 정도가 내 부탁이지.]
“협회장님.”
[어때. 이 정도면 할 수 있지 않겠나? 아니, 이건 협회를 위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네.]
협회장은 이래저래 포장했지만, 결국 부탁을 가장한 협회장의 명령은 ‘청탁’의 성질을 가진 것이었고.
브루노는 협회장의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어야만 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끊습니다.”
뚝-
협회장 로드리고의 영향력은 스페인 내에서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때문에 그의 눈 밖에 나는 순간, 협회에서도 소외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탁 같은 것을 받기엔, 건축가로서 그의 자존심이 너무 고고했다.
“김기태라고 했나? 어지간하면 그 작품은, 뽑지 말아야겠어.”
브루노의 불쾌한 감정은, 비단 로드리고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협회장에게 들어간 그 청탁의 발원지는 분명히 이 한국일 것이었고.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하려 했던 공모전 심사 자체가,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오랜 경험상 이런 경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심사위원들에게도 청탁이 들어갔을 것이었으며.
아마 자신의 의지가 어떻던, 그 청탁을 받은 학생이 입상할 확률이 무척이나 높을 것이었다.
‘이런 청탁을 하는 놈들은, 보통 비빌 언덕이 있을 때 머리를 들이밀지.’
브루노가 알기로 이번 서울시의 공모전 심사위원은, 자신을 제외한다면 전부 한국인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협회까지 움직이게 할 정도의 존재가 청탁의 배후라면.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이미 매수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심사위원 요청을 거절하는 건데…….”
쓴웃음을 지은 브루노는,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덮으며 일어섰다.
‘이런 청탁이나 나오는 공모전이라면, 그 수준을 안 봐도 뻔히 알겠어.’
브루노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진한 에스프레소를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어서 작업실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