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49화 (49/315)

49화

User Experience

K대 공간디자인과의 3학년이자 학회장인 김기태는, 최근 거의 학교에서 사는 중이었다.

학회장으로서 해야 하는 학과 일에, 빡세기로 유명한 3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

더불어 SPDC 공모전 준비까지,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몸이 힘들고 고달플지언정, 그는 항상 자신감과 여유가 넘쳤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 4학기 동안 단 한 번도 학점이 평점 4.2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었으며.

2학년 때부터 이미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싹 다 휩쓸며 학교를 다녀온 그였으니 말이다.

‘이제 기말과제는 얼추 다 끝나 가니……. 공모전에만 집중하면 되겠어.’

하지만 공모전 수상경력이 그렇게나 많은 김기태에게도, SPDC는 무척이나 중요한 공모전이었다.

어중간한 공모전 수십 곳에서 상을 받는 것 보다, SPDC에서 제대로 된 상 하나를 받는 것이 훨씬 더 값어치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2학년 때도 이 공모전에 출품했었지만, 겨우 ‘입선’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작년에는 SPDC를 내가 너무 우습게 봤었지. 하지만 올해는 분명 다를 거야.’

김기태는 이번 공모전을 정말 칼을 갈며 준비하였다.

컨셉 디자인부터 수 없이 교수님들께 컨펌받으며 갈고 닦았고.

그렇게 해서 나온 디자인은, 아버지 회사의 도움을 받아 실시설계 수준의 도면으로 세분화해서 뽑아내었다.

대지에 대한 분석이나 건축법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기태의 아버지는 업계 최상위 건설사인 명성건설의 상무이사였고.

아버지의 말 한마디면 입지 분석부터 설계까지 싹 다 해줄 사람이, 회사에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설계를 맡긴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공간 자체는 기태가 직접 짠 것이 맞았으며, 기본적인 러프 설계안도 기태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다만 개략적으로 그린 도면을 구체화시키고 시공 가능한 수준까지 퀄리티업을 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도움을 ‘조금’ 받았을 뿐이었다.

‘어차피 내 디자인인데 뭐. 난 그냥 시간을 아낀 것뿐이야.’

건축모형도 명성건설의 하청업체 중 한 곳에 의뢰하였으니 조만간 완성되어 배송될 것이고.

기태가 남은 시간 동안 해야 할 것은, 이제 그럴싸한 판넬을 제작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부릴 생각은 아니었다.

기태는 남은 시간을 최대한 쏟아부어서, 그가 디자인할 수 있는 최고의 판넬을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대상. 무조건 그걸 받아야 해. 다른 상은 필요 없어.’

이제껏 살면서 실패라는 걸 경험해 본 적 없는 기태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볼 땐 참가자격이 학부생으로 제한되는 SPDC 공모전의 특성상, 자신만큼 작품을 뽑아낼 수 있는 팀이 서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단순한 비교 우위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번 공모전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대상을 거머쥐리라 생각했다.

‘다음은…… 없으니까.’

기태는 3학년을 마치고 나면, 스페인 건축대학으로 교환학생을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올해가 사실상 SPDC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이었고, 그래서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서울에 내 이름 박힌 건축물 하나 정도는 남겨놓고 가야지. 그래야 서울에 미련이 남지 않을 거야.’

SPDC에서 기태가 대상을 받는다면, 그의 디자인은 무조건 채택되어 시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통 SPDC 대상 작품이 시공되지 못하는 이유는, 해당 설계에 입찰해주는 건설사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을 때인데.

명성건설을 등에 업고 있는 기태에겐, 그럴 일이 절대로 없었으니 말이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한 기태는, 컴퓨터 앞에 앉아 더욱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건축가 ‘김기태’의 이름으로 지어진 첫 번째 건축물이, 벌써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 * *

“저기, 단차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는 반지하 주차장 말이야. 우리도 어쩌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제이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소연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미 제이든과 같은 곳을 보고 있던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맞아. 나도 저걸 보고 있었어.”

뒤늦게 구조물을 발견한 소연도,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우와, 주차장을 저런 식으로 설계할 수도 있네?”

세운 요양병원이 지어진 부지는, 지대가 낮아질수록 넓어지는 사다리꼴 형태의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 부지 내의 단차는, 마치 분지(盆地)처럼 벌어진 디귿자 모양으로 푹 패여 있는 모양새였다.

만약 이 부지 위에 별생각 없이 건물을 설계했다면, 병원 동과 요양원 동을 오갈 때마다 한 층 정도의 높이를 오르락내리락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어졌다면, 진짜 최악의 설계였겠지.’

물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브릿지를 놓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리 영리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디자인적 요소로서 브릿지가 들어가는 것이라면 모르되.

어쩔 수 없이 그런 구조물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디자인이라기보단 공간 낭비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세운 요양병원을 디자인한 건축가는, 무척이나 영리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푹 패인 넓은 부분을 아예 지하주차장으로 만들면서, 그것으로 병원동과 요양원동의 단차를 깔끔하게 상쇄시켰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일석이조네. 단차도 없애고, 주차장 공사비도 아끼고.’

지하주차장의 면적은, 건축물의 용적률을 산정할 때 제외되는 부분이다.

지하주차장을 넓고 깊게 판다고 해서, 대지 위에 지을 수 있는 건물의 면적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건축주들이 지하주차장을 충분히 짓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공사비 때문이었다.

지상 면적과 달리 주차, 혹은 창고 용도로밖에 쓸 수 없는 지하층에 공사비를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건축주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요양원 건물처럼 단차를 이용해 지상층 같은 지하주차장을 설계한다면.

땅을 파내는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공사비를 크게 아낄 수 있다.

제이든은 단순히 창의적인 구조에 감탄한 것이었지만, 우진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감탄한 것이었다.

‘역시, 현장에 와야 보이는 게 있다니까.’

재밌는 설계구조를 발견한 우진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꼼꼼히 요양원의 외관 구조를 살폈다.

하지만 이 단차를 활용한 반지하 주차장을 제외한다면, 요양병원 건물의 구조는 평이한 편이었다.

디자인적 아름다움보다는 현실적인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지어진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특이점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슬슬 건축물 외관에 대한 관찰을 마무리한 우진은, 이제 건물 내부의 답사를 위해 걸음을 돌려 움직였다.

하지만 우진은 곧,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음……?’

우진이 건축물 외관에 대한 분석을 정리하는 동안.

어느새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은 제이든이, 요양병원의 전경을 옐로페이퍼 위에 스케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걸 왜 하는 거지?’

슥슥-

스케치의 의도가 궁금했던 우진은, 제이든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이건, 왜 그리는 거야 제이든?”

우진의 물음에, 제이든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림으로 남겨 둬야 회의 때 보면서 얘기할 것 아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우진은, 더욱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다시 말했다.

“그런 용도면, 그냥 폰으로 사진 찍으면 되잖아.”

“……?!”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그림을 다 그리고 있어?”

“그, 그러니까. 그게……!”

“제이든. 혹시 바보……?”

건수를 잡은 우진은, 특유의 맹한 표정으로 버벅거리는 제이든을 맹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도 제이든을 구해준 것은, 우진의 뒤에 있던 소연이었다.

“제이든의 스케치가 느낌 있잖아.”

“음……?”

“공모전 출품할 때 A1사이즈 판넬도 하나 만들어서 걸어야 되더라고.”

“그래서?”

“제이든이 아이디어 스케치한 것들을 판넬 한 쪽에 모아서 예쁘게 꾸며 두면, 프로세스 보여줄 때 좀 더 그럴싸해 보일 수 있을 거야. 물론 일러스트로 좀 예쁘게 다듬은 다음에, 포샵으로 리터칭도 해야겠지만 말이지.”

소연의 말을 들은 제이든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여, 역시 소연이 똑똑해. 우진은 이 제이든 님의 깊은 뜻을 바보같이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이건 제이든의 뜻이 아니라 소연의 뜻인 것 같은데?”

“아냐. 그건 오해야. 결코 그렇지 않아, 우진.”

우진은 웃으며 제이든을 놀리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소연의 이야기에 조금 놀란 상태였다.

우진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소연이 캐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판넬을 어떻게 꾸밀지도 미리 생각해 둬야 하네?’

SPDC 공모전에 출품해야 하는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하나는 디자인의 컨셉부터 시작해서 프로세스, 설계도, 투시도 등이 담겨있는 A1사이즈의 2D판넬.

다른 하나는 설계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가로 세로 높이 70cm 이내 크기의 건축모형.

건축모형이야 당연히 걱정할 일이 없는 부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사 수준의 퀄리티로 모형을 뽑아내고 있는 WJ 스튜디오의 작업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진의 소유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판넬은 달랐다.

공모전에 출품되는 판넬이란, 이 설계와 디자인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심사위원들이 볼 수 있도록 시각화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진이라 해도, 딱히 다른 신입생들보다 뛰어난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건축모형만으로도 다른 출품작들을 압도해 버릴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건축모형의 디자인이 아름답고 설계가 아무리 잘 뽑혔다고 한들.

그것을 설명하는 역할인 판넬의 디자인이 그럴싸하게 나오지 않는다면, 작업물의 퀄리티가 반감되어 보이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적어도 이 판넬디자인에서 감점 요소를 받는 일은 피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간과하고 있던 우진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디자인이라는 게 알맹이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걸 감싸는 포장지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이니까.’

솔직히 지금 제이든이 그린 요양병원의 스케치는, 디자인과 설계를 하는 데 별로 도움 되는 그림은 아니다.

그냥 이미 지어진 요양병원의 구조와 외형을 그대로 보면서 그린 것뿐이었으니, 새로운 디자인에 도움 될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판넬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디자인 초기 단계에서 나온 스케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심사위원의 입장에서는 더 깊은 고민의 흔적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알맹이 없이 그럴싸하게 포장지만 바른 디자인은 최악이지만……. 알맹이만 덩그러니 보여주는 것도, 그것 나름대로 성의 없어 보이겠지.’

하여 제이든이 스케치를 전부 끝낼 때까지 잠시 기다리던 우진과 소연은, 잠시 후 우쭐거리는 제이든을 대동하여 올라왔던 언덕길을 다시 걸어 내려갔다.

“아까 보니까, 요양원 안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던데. 거기로 가는 거지?”

“맞아.”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세 사람의 현장답사는, 곧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답사를 위해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우진의 일행을, 요양원의 보안팀에서 막아섰으니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보호자로 등록되신 분들이 아니라면, 8월까지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저……. 빠르게 한 번 돌아보고 나오는 것도 안 될까요?”

“병원장님 방침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A형 독감이 심하게 유행하고 있어서……. 면역력 약하신 어르신들께는 치명적일 수가 있거든요.”

출입을 통제하는 이유 또한 너무 당연하고 명확한 것이었으니, 우진 일행의 입장에서는 들여보내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상황.

“음……. 어떡하지?”

하여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 요양원 밖으로 나온 우진은, 잠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A형 독감이 유행하는 것이 불광동에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었고.

그렇다면 답사를 위해 다른 요양원에 가더라도 별로 다르지 않은 상황일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진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저……. 오빠.”

“응?”

옆에서 뭔가 우물쭈물하고 있던 소연이, 우진을 향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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