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48화 (48/315)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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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서북쪽.

광화문에서부터 이어진 통일로를 따라, 은평구의 초입에 있는 ‘녹번동’을 지나면.

우측으로 멋들어지게 솟아오른 북한산의 봉우리와 함께, 오르막을 따라 불광동의 모습이 드러난다.

2010년에 불광동은, 평범한 서울 외곽의 주거지역이었다.

아파트보다는 빌라가 많이 들어서 있고.

대로변을 따라 늘어선 상업지역에도, 대부분 5층 정도의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

하지만 평범한 도시의 모습과 달리, 불광동의 배후에 있는 북한산은 장엄한 경관을 연출한다.

해서 버스를 타고 불광동까지 도착한 소연은, 예상치 못했던 멋진 풍경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와, 강북 도심에도 이렇게 공기 좋은 곳이 있었네.”

끼이익-!

버스가 멈추고 독바위역 인근에 내린 소연은, 약속장소인 1번 출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독바위역은 출구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장소를 헷갈릴 일은 없었다.

시계를 확인한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너무 일찍 출발했나? 아직 20분이나 더 남았잖아?”

출구 앞을 둘러본 소연은, 우진과 제이든이 보이지 않자 팔을 들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

출구 바로 옆에 있는 카페건물에서 한 커플이 커피를 들고 나왔고.

그것을 본 소연의 두 눈은, 화등잔만 하게 확대되었다.

‘뭐야? 저거 서우진이잖아?!’

소연은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나무 뒤에, 슬쩍 몸을 숨겼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서우진! 우진 오빠 맞네. 그런데 저 여자는 대체 누구지?’

소연이 알기로 우진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분명히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야, 거짓말을 했던 거였어? 아냐. 그건 아닐 거야. 손을 잡고 있거나, 바짝 붙어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잖아? 그럼 혹시, 소개팅인가?’

우진의 옆에서 제법 다정해 보이는 늘씬한 여자는(사실 그냥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대충 봐도 압도적인 비주얼까지 가지고 있었다.

호기심, 당혹스러움. 그리고 왜인지 모를 질투.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소연은, 우진의 앞에 나타날 타이밍을 놓쳐서인지 계속 둘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와……. 대박! 서우진 배신자! 아니, 저렇게 예쁜 여자는 또 어디서 소개받았대?’

소연이 지켜보기 시작한 뒤에도, 우진과 그 의문의 여자는 커피숍 앞 벤치에 앉아 삼사 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연은,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근데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 얼굴이지 왜?’

우진과 함께 잠시 커피를 홀짝이던 여자는, 곧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 뒤 커피숍 앞에 서 있던 차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차의 후방에 붙어 있는 엠블럼까지 확인한 소연은, 무의식중에 부들부들 떨었다.

‘시, 심지어 부잣집 딸래미였어! 세상,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기분 좋게 버스를 타고 왔던 소연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왠지 모르게 우울해진 그녀는, 휙 뒤돌아 나무 옆에 있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뭐……. 서우진이라고 연애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괜히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찬 뒤,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여는 한소연.

그런데 잠시 후, 그런 소연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 * *

우진이 임수하와 커피숍에서 나온 이유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저기 커피숍 하나 있네요.”

“으, 아무래도 졸려서 안 되겠어요. 시간도 좀 있으니,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사서 가야겠네요.”

독바위역에 우진을 내려준 임수하는 그저 졸음운전을 피하기 위해 커피숍에 들어갔던 것뿐이고.

졸음을 쫓기 위해 그 앞에서 잠시 우진과 얘기를 나눈 것뿐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심지어 이런 것이었다.

“이런 서울 외곽에도 이제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오네요.”

“아, ‘북한산 The Village’ 말씀하시는 거죠?”

“네. 저기 짓고 있는 저거.”

“대충 보니 2달 정도면 완공되겠네요.”

“와, 그런 걸 그냥 보면 알아요?”

“별 것 아닙니다. 현장 조금 다니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요.”

직업병 말기환자(?)인 우진이 커피 마시며 보이는 아파트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던 것.

“아마 여기 짓고 있는 단지가, 북한산 The Village 3차일 거예요.”

“이 근방 아파트들 브랜드가 전부 다 The Village인데, 업계에서는 북한산 시리즈라고…….”

다행히 우진의 입에서 나오는 쓸데없이 많은 정보들을, 임수하는 제법 재밌게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배우님.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저도 오늘 고마웠어요.”

이렇게 달달함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을, 소연은 어떻게 소개팅의 현장이라고 짐작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덕에 소연은 심기가 불편했고, 우진은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너, 오늘 어디 아프냐?”

“몰라. 아니, 안 아파.”

“그런데 왜 그래?”

“내가 뭘?”

“내가 약속 시간에 늦었나? 흠……. 그건 아닌데…….”

“나,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흐음. 그렇게 잔뜩 인상 쓰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혼자 있고 싶으니까, 저쪽으로 가 줄래?”

오늘따라 까칠한 소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 보는 우진과.

지금 자신의 기분이 왜 이런지도 제대로 인지 못 한 채, 우진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우울한 소연.

이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소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우진에게 물어보고 말았다.

“그나저나 오빠. 그 여자는 누구였어?”

“여자? 그게 무슨 말이야.”

소연은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별 관심 없는 척 물어보았다.

“생각해보니 아까 오빠 누구랑 얘기하고 있던 것 같아서, 갑자기 궁금해졌거든.”

그제야 소연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은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아, 그분?”

“그분……?”

“연예인이야.”

“뭐……?”

“임수하 배우님이라고, 혹시 알아?”

“아……!”

임수하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소연은 조금 전에 느껴졌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소연 또한 들어본 적이 있는 배우였고, 그래서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이번에 일하면서 어쩌다가 알게 됐거든. 방송국 가시는 길에 태워주셨어.”

“…….”

우진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소연은, 잠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우진의 태도나 제스쳐를 통해, 그녀와 정말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뭐야, 나 왜 이러지?’

하지만 소연은 부끄러움과 별개로, 기분 자체는 훨씬 더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찝찝하고 답답했던 기분이, 진실을 알게 된 순간 확 풀어졌으니 말이다.

‘에이 씨, 그럼 그렇지.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서우진한테, 여자가 있을 리 없잖아……?’

소연은 시선을 돌려, 남은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우진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우진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었다.

“헤이, 친구들. 들어봐. 난 정말 한 시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고.”

약속 시간에서 10분 정도 늦게 도착한, 제이든의 시끄러운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오, 저 도움 안 되는 영국 놈이 진짜.’

티 나지 않게 제이든을 흘겨 본 소연은, 슬쩍 우진의 옆으로 가깝게 붙어 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우울했던 기분은, 어느새 오간 데 없이 사라진 소연이었다.

* * *

“헤이, 친구들. 들어봐. 난 정말 한 시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고.”

“그런데?”

“차가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어. 통일로? 거기 완전히 지옥이야. Hell이라고.”

우진은 제이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 또한 임수하의 차를 타고 통일로를 지나왔으며, 그 지옥 같은 정체구간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왠지 제이든을 놀려주고 싶었다.

“게으른데다 비겁한 제이든.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다니.”

“Oh, Shit! 거짓말이라니. 그렇지 않아. 제이든은 정직하다고.”

“어제 또 밤늦게까지 게임을 한 거지? 석구한테 다 들었어.”

“젠장, 이게 다 석현 때문이야.”

“왜?”

“한 판만 이길 때까지 하려고 했는데, 결국 한 판도 못 이겼어.”

“……?”

“석현이 못해서 우리 팀이 자꾸 졌다고.”

“그 말, 석구한테 전해도 돼?”

“제길, 지하철이나 탈걸. 차는 괜히 가져왔어.”

그러나 우진은 제이든을 그리 오래 놀릴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소연이, 궁금한 표정으로 제이든을 향해 물어봤으니 말이다.

“그런데 차는 무슨 차? 너, 차도 있었어?”

“내 건 아냐. 아빠 차지.”

우진 또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차는 어디에 댔는데?”

“골목 안쪽에 자리 있어서 대고 왔어.”

“아버지 차면……. 좋은 차 아냐? 그렇게 막 대도 돼?”

“별로 좋은 차 아냐. 아빠가 한국에 버리고 간 차거든.”

“…….”

우진은 제이든의 아버지가 버리고 갔다는 그 차가 뭔지 잠깐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답사를 지체해서는 안 됐다.

오늘 계획한 일정을 전부 소화하려면, 이제부턴 바삐 움직여야 했으니 말이다.

“뭐, 어쨌든 이제 전부 모였으니, 답사나 빨리 시작하자. 벌써 두 시가 넘었어.”

말을 마친 우진이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제이든과 소연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 일행은, 금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세운 요양병원>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보이는 위치에 있었으니 말이다.

“와, 이거 공모전에 주어진 부지보다 두 배도 넘게 크겠는데?”

가장 먼저 건물을 발견한 소연이 작게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세운 요양병원의 규모는, 지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우진 또한 소연의 말에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병원 부지를 제외하고 보면, 그럭저럭 비슷하기도 해.”

“아하.”

요양병원의 앞에 도착한 우진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측면의 골목길로 걸어 올라갔다.

그 길은 또다시 언덕길이었고, 이미 숨이 차기 시작한 제이든이 황급히 우진을 불러 세웠다.

“멍청한 우진! 입구는 이쪽이라고!”

“나도 알아.”

“그런데 왜 거기로 가?”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어서.”

“제발……! 꼭 퍼킹 언덕으로 올라가야겠어?”

제이든이 끊임없이 구시렁거렸지만, 우진은 말없이 길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산비탈에 지어진 건물의 특성상 건물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고.

내부 답사를 하기에 앞서 우진은, 주변 환경과 더불어 건축물 전체의 전경을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요양원의 특성상, 건물 안에서부터 북한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분명히 만들어 뒀을 거야.’

안락하게 조성된 산책로는, 노쇠한 환자들의 요양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하물며 이렇게 공기 좋은 산자락에 인접한 요양병원이라면.

산길을 따라 조성할 수 있는 친환경적 산책로를,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우진의 예상대로, 잘 정돈된 산책로가, 곧 모습을 드러내었다.

“역시.”

건물의 뒤편에서부터 이어져 나와, 사실상 등산로의 형태로 북한산까지 연결된 산책로.

그것을 발견한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여 그렇게 십여 분 정도를 더 걸었을 즈음.

우진은 원했던 수준의 만족스런 전망이 확보되는 고지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자, 둘 다 그만 헥헥거리고, 이쪽으로 와보라고.”

꽤나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는 요양원의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온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요양원의 건축구조에서, 우진은 특이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저기 부지 안에서도, 제법 크게 단차가 존재하잖아?’

노쇠한 환자들이 기거하는 요양원에서, 가파른 언덕이나 계단은 치명적인 요소이다.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할 때는 물론, 휠체어가 돌아다니거나 기력 없는 노인들이 이동할 때도. 생각보다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요양원의 부지 안에는, 분명 건물 한 층 높이 이상의 높은 단차가 존재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을 제법 현명한 건축설계로 극복하고 있었다.

계단이나 언덕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건축물의 구조만으로 가파른 대지의 높이 차이를 극복해 낸 것이다.

제이든도 우진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요양원을 내려다보며 문득 입을 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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