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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47화 (47/315)

47화

User Experience

아침부터 우진은 바쁘게 움직였다.

홍보관 오픈시간인 10시에 맞춰 청담에 가서, 임수하의 계약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말이다.

오후에 있을 공모전 답사 준비까지 미리 해서 출발해야 했으니.

아침 8시부터 분주할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

“지금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겠지?”

사실 임수하의 계약을 도와주는 것은 시공관계자인 우진의 역할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정도야, 적당히 포장하면 그뿐.

계약 관련해서 지인 하나를 도와주기로 했다고, 박경완에게도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딱히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상담 창구에 미리 얘기해 놓도록 하마.]

“고마워요 부장님.”

[그나저나 53평…….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거 참. 괜찮다니까요. 벌써 지르셨으면서, 왜 이렇게 걱정이 많으실까.”

[흐흐. 얌마. 집이 한두 푼이냐? 너 같이 괴상한 놈이나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거지.]

우진은 경완과 통화하면서, 몇 가지 정보들도 슬쩍 물어보았다.

임수하의 계약을 도와줄 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 말이다.

“옵션은 어떻게 했어요?”

[거의 풀옵션이야. 이번에 우리 쪽에서도 작정하고 고급화에 올인해서, 시스템에어컨이나 빌트인(Built in)*[공간을 설계할 때부터 기본적으로 포함된] 가구들까지 싹 다 원가 수준으로 발라놨거든.

지하철에 타면서 시작된 경완과의 통화는, 홍보관에 다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간단하게 통화하고 말 생각이었지만,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이십 분 가깝게 통화한 것이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너, 진짜 무슨 간신배인 줄 알았어.]

“간신배라뇨, 말이 또 너무 심하시네.”

[무슨 스물두 살짜리 꼬맹이가, 전무님 앞에서 그렇게 사바사바를 잘 하냐?]

“그런 거 아닙니다. 전 있는 사실대로만 말했을 뿐이죠.”

[뭐라 그랬더라? 프리미엄 브랜드는 천웅이 선택한 최고의 혁신이었습니다? 발전 없고 고여 버린 제운건설이나 명성건설 정도는 조만간 잡을 수 있겠죠?]

“역시, 있는 그대롭니다.”

[하여튼 서우진……. 이 능구렁이 같은 놈.]

“여튼,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부장님.”

[그래. 다음 계약 건 때 보는 거지?]

“아마도요?”

걸음을 옮기는 우진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쩌다 보니 박경완과의 친분은, 전생에서 십 년 가까이 쌓았던 친분보다도 더 돈독해져 있었다.

‘하여간, 귀여운 아재라니까.’

전화를 끊은 우진은, 표찰을 목에 걸고 홍보관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했다는 임수하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 저 지금 들어가요!]

“네, 배우님. 안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7번 창구로 오세요.”

* * *

사실 분양권 계약 절차라는 게,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계약서와 자신이 당첨된 동호수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본 뒤, 시공사에서 만들어 놓은 절차를 따라 옵션을 선택하고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끝이니 말이었다.

해서 우진이 임수하에게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은, 사실 옵션선택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처럼 계약되지 않은 잔여 물량이 많았더라면, 다른 동호수를 고를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 클리오 아파트의 분양상황은 이미 완판이었으니, 계약자에게 다른 선택권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시스템 에어컨은 전실에 싹 다 풀로 세팅하세요.”

“거실에 방 세 개에. 거기에 부엌까지……. 다섯 개나 넣으라고요?”

“지금 몇백 아깝다고 에어컨 빼시면, 여름에 더울 때 에어컨 없는 방은 창고 되어 버립니다.”

“으음…….”

“실거주 안 하고 세입자 받는다고 해도, 무조건 에어컨 풀세팅 된 매물이 제일 비싼 값에 제일 빠르게 빠져요.”

“그래도 부엌은 좀 과하지 않아요?”

“음, 거긴 사실 배우님 성향에 맞춰서 빼셔도 돼요. 요리 좋아하셔서 부엌에 오래 계시면, 있는 게 좋다고 보긴 하지만요.”

“오케이. 알겠어요. 그냥 다 넣죠 뭐.”

“넵.”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꽤나 고민하는 표정이었던 임수하는, 계약으로 마음을 확정해서인지 무척이나 신이 난 모습이었다.

“이거 발코니 확장은, 하는 게 맞죠?”

“확장은 무조건 해야죠.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 옵션 같은 겁니다.”

원래 뭐가 됐든 쇼핑이란 즐거운 법이었는데, 그 쇼핑의 대상이 전 재산에 가까운 거액을 들여 고급스런 집을 장만하는 것이었으니.

사실 그녀가 신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후아. 이제 끝났네요.”

“고생하셨어요.”

“제가 뭘 고생은요. 대표님이 설명해주신다고 고생하셨지.”

계약서에 명시되어있는 임수하의 동호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비당첨으로 분양받은 것 치고, 되게 로얄 호실이 걸리셨네.’

20층 이상의 고층에, 지하철역도 두 번째로 가까운 로얄동 43평 아파트.

우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딱 2년만 더 지나면, 수하가 계약한 이 아파트에 프리미엄이 3억 정도는 가볍게 붙을 것임을 말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임수하가 43평을 분양받은 가격으로, 클리오 아파트 25평조차 사기 어려워질 것이었다.

‘쩝. 확실히 여기만 한 투자처도 없는데. 계약 취소분이라도 안 나오려나.’

어차피 당장은 투자할 돈도 없었지만,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기는 우진.

그는 임수하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홍보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요.”

“그러게요. 배우님께서 고민을 거의 안 하고 지르셔서…….”

“이게, 처음에는 계약할까 말까 고민도 좀 했었는데, 오늘 홍보관 다시 와서 한 번 더 구경하니까……. 그냥 자연스레 마음이 결정되더라고요.”

“하하, 그래요?”

“자재부터 시작해서 집 구조까지 싹 다 마음에 들어서……. 그냥 질렀어요. 우리 대표님께서 투자가치도 확실하다고 하셨으니까.”

능청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임수하를 보며, 우진 또한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맞아요. 돈만 있으면 저도 하나 샀을 겁니다.”

“그 얘길 들으니, 더 든든하네요.”

“그래도, 투자결과에 대한 책임은, 항상 본인 몫인 거 아시죠?”

“당연하죠. 저, 그렇게 대책 없는 여자 아니에요.”

어차피 성공할 수밖에 없는 투자였지만, 우진은 일부러 불확실성에 대한 언급을 덧붙였다.

너무 확실하다는 듯이 계속 이야기하면, 약장수 같은 이미지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표님, 다시 들어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저도 마침 외부 일정이 생겨서……. 가봐야 할 곳이 있거든요.”

“오, 그래요?”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임수하의 차 앞에 다가섰다.

그녀의 차는 아담하고 귀여운 디자인의, 독일제 소형 SUV였다.

“좋은 차 타시네요.”

“대표님 차는요?”

“아, 저는 아직 차 없습니다.”

우진의 대답에, 수하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요? 의외네?”

“왜요?”

“대표님이시니, 당연히 차는 좋은 차 타실 줄 알았죠.”

“하하, 조만간 살 생각은 있는데, 아직 시간적 여유가 없었네요.”

우진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차피 이제 괜찮은 차 한 대 정도는, 조만간 법인 리스로 뽑을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운전석에 오른 수하는, 시동을 걸며 우진을 향해 물었다.

“다음 일정은 어디신데요?”

수하의 물음에, 우진은 별생각 없이 대답하였다.

“불광동입니다.”

“불광동이면……. 녹번, 연신내. 그 쪽?”

“오, 잘 아시네요.”

하지만 다음 순간, 우진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잘 알죠.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길인데.”

“예……?”

“자, 타세요. 가는 길에 태워드릴 테니까.”

이렇게 배우님의 차까지 얻어 타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 했으니 말이었다.

* * *

불광동 인근이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길이라는 임수하의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배우님은 어디 가시는데요?”

“일산 KBC요.”

“아, 그래서…….”

“요즘 일정이 그쪽으로 많이 잡혀서, 주 3회 정돈 왔다 갔다 하거든요.”

KBC의 일산 사옥은,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삼송동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통일로’를 지나야만 한다.

광화문 인근에서부터 서북쪽으로 쭉 뻗어 나가 판문점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국도.

이 통일로는 3호선 라인을 따라 서울 외곽을 지나는 도로였고, 때문에 정확히 불광역을 지나는 도로이기도 했다.

해서 우진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약간의 의문은, 곧바로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진짜 태워줄 만한 위치라서 태워주는 거였네.’

잠깐이나마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던 우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귀 이후 나이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 잊고 있었지만. 임수하와 우진의 나이 차이는, 거의 열 살이었다.

“매번 통일로를 지나다니시는 거예요?”

“거의 그렇죠?”

“거기 출퇴근 시간에 진짜 지옥인데…….”

“맞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그 시간대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죠.”

수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까진 안 밀릴 거예요.”

“그거, 희망 사항이죠?”

“하, 하하…….”

네비게이션 위에 빨갛게 물들어있는 통일로를 보며, 수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불광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한 시간 20분으로 찍혀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지하철로 가는 것보단 빠른 것 같네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조수석에 앉은 우진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오전 일정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는 충분히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으니까.

해서 뜻밖에 오랜 시간 같이 이동하게 된 두 사람은,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대표님은 그럼, 천웅건설이랑 연계된 시공사를 운영하시는 거네요?”

“네. 뭐 비슷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와,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 나이, 말씀드린 적 있나요?”

“아뇨. 그래도 뭐, 대충 짐작으로 알 수 있죠.”

“몇 살 같은데요?”

“대충 스물여덟쯤 되셨겠죠, 뭐.”

“…….”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듯,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하는 수하.

우진은 속으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의 짐작을 따로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 노안인가…….’

어차피 그 정도의 나이로 생각하는 게, 여러모로 이야기하기 편할 테니 말이었다.

그리고 수하가 우진의 나이를 20대 후반 정도로 짐작한 것은, 사실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우진이 가진 지식과 업체 대표라는 직책.

거기에 요상하게 아재 같은 말투까지.

그런 것들이 무의식 속에 조합되면서, 스물여덟이라는 나이가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우진의 외모는 그의 이미지를 20대로 유지시켜주는 데, 큰 기여(?)를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 별개로 충격을 받은 우진은,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배우님, 다음 작품은 정하셨어요?”

“아뇨. 아직 못 정했죠. 왜요? 추천해주고 싶으신 작품이라도 있으세요?”

“어…….”

잠깐 움찔했던 우진이, 자연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무슨 연예계 종사자도 아니고……. 작품 추천을 어떻게 합니까? 하하.”

“모르시는 게 없길래, 이것도 대답해 줄 줄 알았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작품 이야기를 꺼냈던 우진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네.’

우진은 조만간 수하가 찍을 작품을 하나 알고 있었다.

2012년쯤 개봉하여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초대박 작품, <한남동 로맨스>.

수하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줄 작품을 하나 알고 있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입 밖에 꺼낼 뻔했던 것이다.

‘쓸데없이 곤란해질 뻔했어.’

만약 이 작품을 언급했다면, 우진은 후에 진짜 약장수를 넘어 점쟁이 취급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인생에 처음으로 주연 제의를 받은 영화가, 이 <한남동 로맨스>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명은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우진의 입에서 이 이름이 튀어나온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말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우진은, 작품 대신 다른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도 이 정도 이야기는 해 줘도 되겠지.’

수하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을 떠올린 우진이,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배우님은 혹시, 예능 쪽으로는 생각 없으세요?”

“갑자기 예능은 왜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향해, 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냥요. 요즘 배우분들 예능 쪽으로도 많이 나오시잖아요.”

“아하, 그건 그렇죠.”

“기회 되면 한번 해 보세요. 입담도 좋으시고……. 임 배우님 예능에 나오면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팬심 비슷한 거라고 해 두죠.”

원래대로라면 수하는, 2012년쯤 <한남동 로맨스>가 빵 터진 뒤 본격적으로 예능씬에 데뷔한다.

특유의 거침없는 입담과 내숭 없는 모습으로, 범국민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하는 계기.

그때 수하가 출연했던 예능은 <우리 집에 왜 왔니> 시즌 2였는데, 우진은 그녀가 조금 일찍 예능에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올해 연말에 시작되는, <우리 집에 왜 왔니> 시즌1에 말이다.

‘영화출연과 순서가 바뀐다고 해서 있던 예능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더 빨리 뜰 수 있을 테니, 배우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겠지.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시즌 1부터 대박이 터질 예능이기도 하니까.’

사심도 조금 있었다.

연말쯤 되면 우진은 WJ 스튜디오를 훨씬 더 크게 키워놓을 자신이 있었고.

만약 그 시점에 임수하가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출연이라도 한다면, 콩고물을 꽤나 크게 받아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집에 왜 왔니>는, 우진의 사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예능이었으까.

그래서 우진은, 입이 근질거린 나머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올해 안에 꼭 예능 하나 해 보세요, 배우님.”

“어머, 갑자기 왜 이리 적극적이래. 누가 보면 제 매니전 줄 알겠네요.”

“그냥 감 같은 겁니다. 그리고 제 촉이 좀, 좋은 편이거든요.”

결국 개인적인 사심(?) 때문에, 점쟁이의 길을 선택한 우진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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