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44화 (44/315)

44화

첫 번째 공모전

우진에게 걸려온 전화는, 최근 그에게 가장 자주 전화를 거는 세 사람 중 한 명의 것이었다.

그 세 사람이란 바로, 어머니와 소연, 그리고 제이든.

“제이든.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또’ 라니! 난 오늘 처음 전화했다고, 우진.]

“무튼. 그래서 무슨 일인데?”

[지금 인터넷 볼 수 있어?]

“아니, 밖이야.”

[젠장, 잠깐만. 내가 문자 하나 보내줄게.]

웬일로 전화를 건 제이든의 목소리는 진지해 보였고, 그래서 우진은 그가 보낸다는 문자의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잠시 후.

위이잉-

진동과 함께 우진의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는, 제법 장문의 것이었다.

[-안내-]

[서울시 디자인재단에서 알려드립니다.]

[2010,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공공 디자인 공모전 SPDC(Seoul Public Design Contest)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본 공모전은, 서울시 공공건축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기획된 공모전으로…….]

우진은 휴대폰 통화음을 최대로 키워놓은 채 문자를 읽고 있었고.

그래서 문자를 읽는 와중에도,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제이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진, 네가 말했던 공모전이야.]

“보고 있어.”

[정확히 3분 전에 발표된 따끈따끈한 소식이라고.]

“훌륭하네.”

[역시 제이든밖에 없지?]

“1인칭으로 얘기하지 말랬지.”

[제이든은 1인칭이 뭔지 몰라.]

“후……. 잠깐만 조용히 좀 해줄래?”

제이든에게 퉁명스레 이야기하긴 했지만, 우진은 속으로 그에게 제법 고마워하는 중이었다.

‘우리 헬보이……. 좀 귀찮기는 해도 역시 쓸모가 많은 친구라니까.’

한두 달 전 우진은, 제이든에게 이 SPDC 공모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학부생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인지도 높은 공모전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우진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이든은 분명 이렇게 얘기했었다.

[공모전? 흠……. 별로 관심이 생기진 않지만, 네가 같이하자고 한다면 특별히 팀원이 되어줄게.]

관심이 얼마나 없어야 발표 3분 만에 우진에게 전화할 수 있는 건지는 미스테리였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이든 아니었으면 잊을 뻔했는데…….’

SPDC는 우진이 꼭 참가하려 했던 공모전 중 하나였고, 제이든 덕에 놓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집중해서 문자의 내용을 읽던 우진은, 잠시 후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올해 주제가……. 요양원?”

[그래, 우진. 설마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난 한국인이야 제이든.”

SPDC의 주제로 나온 시설물이, 그가 갖고 있던 기억과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잠깐. 내 기억으론 분명……. 10년도 주제가 문화복합공간이었는데?’

우진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물론 미래지식을 이용해, 기존 수상작의 아이디어를 베끼거나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을 이용한다는 개념을 넘어서,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다만 우진이 놀란 이유는, 너무 명확하게 ‘바뀐 미래’ 때문이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바뀐 미래가 벌써 나타난다고?’

우진의 행보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쳐 공모전의 주제를 바꿨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부분이었고, 지금 우진에게 중요한 것은 이 공모전에서 수상해야 한다는 사실.

게다가 달라진 것은, 주제가 되는 시설물의 종류뿐만이 아니었다.

“공동작업 가능한 팀원은 최대 셋……. 총상금 규모는 5천만 원 정도…….”

[상금은 중요하지 않아, 우진. 중요한 건……. 이 제이든님과 한 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지.]

제이든은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지금 우진의 귀에 그런 것은 들리지 않았다.

‘공동작업 가능한 팀원 숫자와 상금 규모도 바뀌었어.’

지금 우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이 공모전을 발판삼아 한 번 더 도약할 방법에 대한 모색이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내용을 다 읽은 우진이, 전화통에 대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홈페이지를 확인해 봐야 알겠네.”

[아니, 나를 만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걸? 이 제이든님이 이미 분석이 다 끝났으니까.]

우진은 제이든의 헛소리에 대답해주는 대신, 중요한 부분들을 짚었다.

“출품 마감일까지는 정확히 한 달 남은 거지?”

[한 달이면 충분하지. 제이든님과 함께라면…….]

하지만 그 헛소리가 계속 길어지자, 우진은 문득 제이든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너, 혹시 나랑 같은 팀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Holy……! 설마 다른 팀원을 구했어?]

격한 제이든의 반응에, 우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연기를 계속했다.

“으음……. 이미 생각해 둔 팀원이 있기는 한데…….”

[Bloody Hell!]

“그중에 멀대같이 길고 맹하게 생긴 영국인도 한 명 포함돼.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진 말라고, 제이든.”

[후우. 자꾸 날 화나게 하지 마, 휴먼.]

우진이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한 명은, 내가 원하는 사람을 영입하고 싶은데.”

우진의 말에, 제이든은 잠시 고민하는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제이든은 우진도 잘 아는 친구의 이름을 꺼내었다.

[선빈? 그 기린같이 생긴 친구를 생각하는 거라면, 아마 어려울 거야.]

우진은 선빈과 함께하려던 것이 아니었지만,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에 물어보았다.

“왜?”

[선빈은 이미, 예전부터 이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더라고.]

“오호, 그래?”

[아마 다른 팀원들이 따로 있나봐. 그러니까 다른 친구를…….]

물론 선빈은 동기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실력을 가진 친구였다.

우진이 생각해도 팀원으로 영입할 수 있다면, 제법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인물.

하지만 우진은 그를 선택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를 배제한다면, 절교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걱정 마, 제이든. 내가 생각하는 나머지 한 명은, 소연이야. 한소연.”

[오우, 소연? 좋아, 그녀라면 찬성이야. 물론 제이든만큼은 아니지만, 소연도 똑똑하고 실력 있지.]

소연은, 우진이 가진 어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더라도,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는 동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나 그녀가 팀원으로서 훌륭한 이유는, 우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소연이가 모델링이나 실무설계가 좀 서툴긴 해도, 평면디자인 감각이 확실히 뛰어나단 말이지.’

여기서 우진이 얘기하는 평면디자인이란, 건축의 평면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3D가 아닌 2D의 평면적 공간 위에서 이뤄지는, 일련의 디자인들을 의미하는 것.

우진이 모델링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것만큼, 소연은 일러스트, 포토샵을 기가 막히게 잘 다뤘고, 우진이 계산적인 디자인에 탁월하다면 그녀는 감각적인 디자인을 잘하는 타입이었다.

‘아무래도 포샵 실력은, 다년간의 셀카 보정경험 덕분인 것 같지만…….’

그러니까 우진에게 있어서 소연은, 정말 객관적인 관점으로 놓고 봐도 확실히 훌륭한 선택이었다.

“일단, 소연이한테도 전화해서 의사를 물어볼게. 내가 영입하고 싶다는 거지, 아직 소연이 대답을 들은 건 아니니까.”

[나와 함께한다고 해. 그러면 분명히 혹할 테니까.]

“음……. 너랑 같은 팀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인데…….”

순간 소연과 제이든이 함께하는 그림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본능적으로 느낀 우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전히 전화 너머에 있는 제이든은 신나서 떠드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통화하면서 우리 집으로 와, 우진. 일단 컨셉기획부터 한번 시작해 보자고.]

“오늘은 너무 늦었어, 제이든.”

[What? 뭐가 늦어? 이제 겨우 여섯 신데.]

“일단 끊어. 소연이한테 전화해 봐야 하니까.”

[젠장, 너무 느긋한 거 아냐?]

“네가 너무 급한 거야.”

툭-

제이든의 전화를 끊은 우진은, 곧바로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소연으로부터 승낙을 얻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소연에게도 예전에 SPDC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부터 이미 관심을 보였었으니까.

“그래서 시간은, 대충 한달 정도 있는 셈이야.”

[기말고사랑 좀 겹치기는 하겠지만……. 그거야 다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지 뭐.”

[좋아, 재밌겠네.]

“그럼, 콜?”

[콜!]

사실 제이든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꺼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특이하긴 해도 제이든이 나쁜 녀석은 아니었고, 소연이 그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우진은 어쩌면 이 팀의 구성 자체가, 지나치게 성급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연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우진은 마치 데자뷰를 경험하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오빠가 지금 학교로 와.]

“뭐?”

[나 방금 수업 끝났으니까, 과실에서 컨셉 기획이나 짜보자고.]

“오늘은…… 너무 늦었어.”

[뭐가 늦어? 이제 겨우 여섯 신데.]

“제, 젠장. 혼란스러우니까 일단 끊어.”

[혼란스럽다고? 뭐가? 여보세요? 오빠, 들려?]

전화를 끊은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일단 집으로 향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우진의 머릿속을 강하게 채우기 시작하였다.

* * *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선빈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떴다. 드디어 떴어.”

동기들에게는 말한 적 없었지만, 선빈은 지난 두 달 동안 오직 이 날 만을 기다려 왔었다.

SPDC 공모전의 주제가 발표되어,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될 날을 말이다.

‘주제도 얼추 예상한 범주 내에서 떴어. 역시 교수님 예상이 맞았던 거야.’

그간 선빈은 박준민 교수의 도움을 받아, 실무에 대한 지식들을 위주로 열심히 공부해 왔다.

1학년인 선빈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아무래도 전문적인 건축 지식들과 컴퓨터 툴(Tool) 사용능력.

하여 박준민 교수는 그런 부분들 위주로 선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덕분에 지금 선빈은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였다.

객관적으로도 지금 선빈의 실력은, 신입생 수준을 훌쩍 벗어나 있었으니 말이다.

‘요양원이라……. 결국 UX(User Experience) 디자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주제겠는걸?’

공모전 공고를 꼼꼼히 읽는 선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들어찬 것은 ‘주제’와 관련된 고민이었다.

하지만 당장 잠깐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기에, 선빈은 다른 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만 할 문제.

‘기간은 한 달이고, 최대 세 명까지 한 팀이 될 수 있군.’

그것은 당연히, 함께 공모전에 출품할 팀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세 명이라……. 적당한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 것 같기도 한 숫자네.’

선빈은 몇 달 전부터 공모전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팀원을 모으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모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었다.

SPDC는 매 회마다 팀원 제한 숫자가 들쑥날쑥하였고, 재작년의 경우에는 팀플레이가 아예 금지되었던 주제도 있었으니 말이다.

공고가 뜨기 전에 미리 팀원을 꾸리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입대상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지난 공모전들의 케이스를 살펴봤을 때. 솔로 플레이보다는 팀플레이가 될 확률이 훨씬 더 높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선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우진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

하지만 선빈은 가장 먼저 떠오른 우진을, 가장 먼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우진은 좋은 형이고 뛰어난 실력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같은 팀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형이랑은, 롤(Role)이 너무 많이 겹쳐.’

선빈이 아는 우진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실무와 관련된 지식들과 설계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의 선빈에게도 가장 자신 있는 부분들.

그는 자신 있는 분야에서 본인이 가장 돋보이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우진과 함께할 수 없었다.

선빈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것은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우진이 팀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이 서브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박준민 교수의 관심도 우진에게 옮겨갈 것이고, 선빈은 결코 그런 결과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선빈은, 곧바로 다음 사람을 떠올렸다.

‘우진이 형 빼면, 그다음으로 괜찮은 멤버는 인하.’

선빈이 떠올린 인하는, 10학번 과 대표 김인하였다.

그녀는 선빈이 아는 동기들 중에 가장 의욕적으로 수업을 듣는 친구였으며, 그만큼 성실하고 실력도 있는 학생이었다.

‘소연 누나도 좀 탐나고, 재욱이도 진짜 괜찮은데……. 누구부터 연락을 해보는 게 좋을까?’

선빈은 미리 생각해뒀던 동기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리며, 동시에 행복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신입생 최초로 SPDC에서 우수상 이상을 수상한, K대학교의 슈퍼루키 디자이너 류선빈.

물론 특선보다 높은 성적인 ‘우수상’을 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수상을 받기 위해선, 전체 출품작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만 했으니까.

지금까지 K대 역사상 우수상을 받았던 학생 중엔, 신입생은커녕 2학년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선빈은 정말로 자신 있었으며, 그 자신감에는 ‘노력’이라는 근거도 있었다.

‘내가, 최초가 되는 거야.’

최초라는 타이틀을 떠올린 선빈의 양쪽 입꼬리가, 귀밑까지 걸려 올라갔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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