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일 잘하는 돈, 일 못하는 돈
부동산 투자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투자방식 중 하나가 바로 재건축, 재개발에 대한 투자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제법 낯익은 단어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얘기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재개발 재건축 물건을 사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복잡한 용어들도 많고 알아야 할 절차들도 많았기 때문에, 선뜻 큰돈을 쓰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우진은, 어쩌면 가장 쉬운 부동산 투자 중 하나가 재개발 재건축이라고 생각했다.
재개발 재건축은 가치투자이기에 앞서, 돈을 시간으로 사는 단순한 투자였으니 말이다.
‘개발에 필요한 시간 동안 기다려서, 그 개발로 인한 시세차익을 보는 투자. 개발이 엎어지지만 않는다면……. 확실한 이익이 보장된 투자니까.’
부동산 투자는 어떤 측면에서, 주식이나 금융상품 투자와는 그 결이 좀 달랐다.
자산증식만을 목적으로 부동산을 매입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실수요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주할 집이 필요해서 집을 사면서, 기왕이면 투자가치도 있는 곳을 사고 싶어 하는 것이 집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낙후된 집을 사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진입장벽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건,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우진은 달랐다.
낙후된 지역에 살면서 세입자로서 재개발을 경험해 보기도 했으며, 개포동의 재건축 예정아파트에 살면서 조합원으로써 재건축을 경험해 보기도 했다.
게다가 건설사의 직원으로서 개발과정을 수없이 지켜봤던 그였으니.
이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우진은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재건축 재개발에 대해 빠삭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재건축 때문에 배 아파 보기도 했고, 억울해 보기도 했고……. 마흔 즈음에는 크게 이득을 보기도 했었고…….’
그리고, 그런 우진이었기에.
이 세영아파트 재건축의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물론 전생의 기억 속에서 얻은 단서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흔해 빠진 일이지. 재건축 사업장에 소송이 걸린다는 건…….’
재건축은 단순히 거주민들만의 일이 아니다.
공동주택이 지어져 있는 공간을 전부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올려야 하는 사업이다 보니.
그 땅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장 재건축이 진행되는 아파트를 배후지역으로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밥줄이 끊길 수밖에 없으며.
모든 거주민들이 새 아파트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우진이 경험해 본 바론,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사업장은 단연코 한 곳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하고 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은, 흔해 빠진 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조합설립인가 무효 소송이, 1심에서 패소하게 되는 경우는 흔한 경우가 아니지만 말이야.’
애초에 조합설립이 인가 났다는 것은, 해당 재건축 사업이 국가에서 타당하다 생각하여 허가를 내려준 것이다.
때문에 이게 뒤집히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세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의 소송 패소는, 비록 1심 패소라고는 하지만, 여파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사업이 엎어지는 순간, 지난 세월 동안 개발로 인해 상승한 아파트 가격이 그대로 날아가 버릴 테니까.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투자자들이 불안에 떨며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던지는 이 상황에서.
대체 우진은 왜 그 던지는 물건들을, 받으려고 생각한 것일까?
“정말……. 계약하시는 거죠, 대표님?”
“한다니까요.”
“그런데 정말 외람되지만, 몇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우진의 대답에, 김 씨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계셨던 거죠?”
“뭐,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대체 매수를 왜 하시는 겁니까?”
김 씨가 가진 의문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고, 때문에 우진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김 씨는 앞으로도 우진에게 도움 될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알려줘도 된다고 생각했다.
“투자자가 물건을 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당연히, 차익을 보기 위해서겠죠?”
“그렇습니다.”
우진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2심에서 다시 승소할 테고, 결국 최종 패소하는 쪽은 비대위일 거거든요.”
“……!”
김 씨는 부동산 업자임과 동시에 전문 투자자다.
때문에 우진의 이 말을 들은 순간, 그가 뭘 노리고 이 투자를 선택한 건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이 남자의 말대로 되기만 한다면, 단기간에 엄청난 차익을 보게 되겠지만…….’
생각에 잠긴 김 씨를 향해, 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사실 투자자들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습니다. 세영아파트 비대위가, 엄청나게 강성이라는 사실을요. 그게 세영아파트의 시세가 오르는 것을, 꽤나 강하게 눌러주고 있었고요. 6억대에서 시세가 정체된 지, 벌써 몇 년은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했지요.”
비대위가 강하다는 말은, 재건축 사업을 방해하는 세력이 강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해서 세영 재건축조합은 모든 요건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진행이 꽉 막혀있던 상황이었고.
그것이 세영아파트가 7억을 넘지 못하고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번에 조합에서 승소하고 비대위가 무너진다면, 사업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전화위복을 넘어, 기존에 사업을 막고 있던 장애물까지 해소된다.
우진이 물었고, 김 씨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식간에 사업이 진행되겠지요.”
“그럼 시세가 그저 회복되는 것으로 끝날까요?”
김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곧바로 7억 초반 매물부터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김 씨의 대답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진은 순식간에 8억을 넘어 9억까지도 시세가 튀어 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굳이 거기까지 얘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예언자 내지 사이비 교주 취급을 받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잘 아시네요. 그게 제 투자 이윱니다.”
“그렇……군요.”
우진의 말이 끝나고,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김 씨에게는 아직, 의문이 하나 남아있었다.
사실상 가장 큰 의문이 말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김 씨가 운을 떼자, 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확신하는지. 그게 궁금하신 거죠?”
김 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진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부사정을 제가 잘 알고 있었다는 정도로만 대답하죠. 그 이상은 좀……. 곤란하거든요.”
우진의 대답을 들은 김 씨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더 이상 우진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난 놈이야, 난 놈……. 앞으로도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해 봐야겠어.’
오늘로 김 씨는 확신했다.
우진의 이 투자가 맞아떨어지던 그렇지 않던, 그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을 말이었다.
* * *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전세는 3.5억 이상으로 맞춰주셔야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한강변 매물은 전세 4억에 세입자가 들어가 있으니까요.”
“40년 다 돼가는 재건축 아파트치고, 전세가율이 엄청 높네요.”
“여기가 학군이 괜찮습니다.”
6억짜리 아파트에 전세가 4억이 들어가 있으면, 그 아파트를 사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돈은 2억 정도다.
세입자가 나갈 때 돌려줘야 할 전세금 4억은 ‘부채’의 개념이었는데, 아파트를 매수할 때 그 부채까지 같이 승계받는 개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가진 돈으로 로얄 물건 한 채를 매수할 수 있었다.
재건축이 진행될 시, 한강이 훤히 보이는 로얄 중의 로얄 호실을 배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물건.
물론 우진은 세영 재건축이 완공될 때까지 계속 보유하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늦어도 가을이 오기 전에는, 팔 생각으로 샀으니 말이다.
다만 가장 좋은 물건을 산 이유는, 팔고 싶을 때 최대한 빠르고 비싸게 팔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매도자분 계좌 있으시면, 가계약금 먼저 바로 쏘겠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김 씨에게서 매도인의 계좌를 받은 우진은, 가계약금으로 아예 5천만 원을 쏘아버렸다.
그러자 김 씨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계약금을……. 이렇게나 많이 보내신다고요?”
우진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파기당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
문자 기록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보낸 가계약금은,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매도인이 이 계약을 파기하고자 우진이 보낸 가계약금을 돌려주려면, 배액 배상의 원칙에 따라 그 두 배인 1억의 돈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진이 보낸 5천만 원은, 파기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엄포 같은 것.
하여 가계약금 송금까지 끝난 우진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목적은 확실히 달성했으니, 부동산에 오래 앉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계약 날짜는 최대한 빠르게 잡아 주세요.”
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매도인분께선 아마……. 한시라도 빨리 팔고 싶어 하실 겁니다.”
“잔금까지 늦어도 보름 이내로 끝냈으면 좋겠군요.”
“현찰로 전부 가지고 계신가 보네요.”
“그렇습니다.”
우진의 대답을 들은 김 씨는, 좀 더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이러한 계약 건의 경우 잔금까지 늘어질수록, 중개인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상황이 많이 발생하게 되니 말이다.
계약 날 이후 시세가 크게 오르거나 내릴 경우, 매도자 혹은 매수자 한쪽이 파기하겠다고 생떼를 쓰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꼴은, 우진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부동산에서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욕을 퍼붓는 사람도 봤었지.’
분명 우진에게 물건을 판 사람은, 정확히 한 달 뒤면 배가 아파 쓰러질 것이다.
개발이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라 판단하여 싸게 내놓은 것이었는데,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한 달만 지나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싸게 나온 매물을 낚아가는 우진을 나쁘다고 할 수 있냐면,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어차피 파는 사람도 매수자들이 소송 패소 사실을 알기 전에 재빨리 팔아넘기려고 물건을 싸게 내놓은 것이었으니.
누구를 나무랄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복비는……. 100만 원만 받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앞으로, 자주 뵙게 될 분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투자란 본래 그런 것이다.
부동산이 됐건, 주식이 됐건.
버는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있는 법이고, 투자의 모든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는 것.
‘일 잘하는 돈이 있으면, 일 못하는 돈도 있는 법이지.’
김 씨의 호의로 복비까지 싸게 해결한 우진은, 기분 좋게 문정동을 나섰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여섯 시.
그런데 집으로 향하던 우진의 전화기에,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