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일 잘하는 돈, 일 못하는 돈
5월이 WJ 스튜디오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달이었다면, 6월은 만들어진 기반을 발판으로 사업을 정비하는 달이었다.
때문에 조금은 한가해질 줄 알았던 우진의 기대는, 월초부터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대표님, 이번 주까지 새로 들어온 발주가 총 다섯 건입니다. 이거 다 수용 가능할까요?”
“소름 돋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지, 석구.”
“대표님을 대표님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합니까. 하하.”
우진이 홍보관 시공으로 인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석현이 총괄하는 모형 작업장은 완전히 시스템이 자리 잡혔다.
석현을 제외한 총 여섯 명의 작업 인원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발주 들어온 모형들을 제작하고 있었으며.
석현이 수업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상주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관리 감독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일감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우선 천웅건설에서만 추가 모형 발주가 세 건이 들어왔고, 이제 업계에서도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었으니까.
특히나 업체 평균 가격보다 두 배 이상 비싼 WJ 스튜디오의 프리미엄 모형 발주가 전체 물량의 절반이나 차지한다는 것은, 우진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 페이스로 굴러가면, 보수적으로 봐도 매달 삼사천 정도는 순이익으로 떨어지겠어.’
인원을 더 늘리고 작업실 규모를 더 키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우진은 그렇게까지 욕심부리진 않기로 했다.
규모가 더 커지면 필연적으로 관리의 어려움이 생기고.
그렇게 급격하게 속도를 키우다가 모형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테니 말이다.
다른 업장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극한의 퀄리티를 무기로 삼는 WJ 스튜디오의 작업실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거 전부 진행하면, 매출총액이 얼마가 더 늘지?”
“대충 1억 2천 정도?”
“그렇게나 많이?”
“대부분 프리미엄 건이거든.”
“젠장.”
우진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고, 석현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 할지 알지?”
“나도 한 손 거들라는 얘기겠지.”
“빙고.”
“왜 이 회사는, 대표가 제일 바쁜 거야?”
“아주 바람직한 회사의 표본이야.”
“후우…….”
우진은 겉으로야 한숨을 쉬고 있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점점 회사가 커가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진태 형도 슬슬 시스템에 적응한 것 같던데…….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봤단 말이지.’
이제 완전히 업계에 자리를 잡은 모형 파트와 달리, 아직까지 시공 파트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천웅건설의 프리미엄 홍보관이라는 훌륭한 포트폴리오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모형처럼 그게 곧바로 다음 일거리까지 이어지긴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모형의 퀄리티는 오롯이 WJ 스튜디오의 능력이었으나, 완성된 홍보관의 퀄리티는 WJ 스튜디오와 천웅건설의 지분이 반반 정도였으니까.
‘일단 박 부장님이 일거리 한두 개 정돈 더 주신다고 했으니, 그거 진행하면서 따로 또 움직여 봐야겠네.’
우진이 생각하는 시공 파트의 다음 스텝은, 디자인과 설계다.
단순한 시공업체가 아닌 건축사무소로서 완전히 자리 잡기 위해선, 디자인 능력과 설계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요건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역량은 되지만, 그것은 아직 우진 혼자만의 생각이다.
시공능력을 이번에 증명한 것처럼, 디자인과 설계 능력도 증명해 낼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설계, 시공까지.
우진에게는 이제, 이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진행하여 완공해 낸 완벽한 포트폴리오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건설사의 외주를 벗어나서, 독립적인 프로젝트의 수주를 성사시켜 내야만 했다.
‘아니면 내 돈으로 땅 사서, 직접 공구리 쳐올리던가.’
잠시 생각에 빠졌던 우진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도 충분히 빨리 달리고 있건만, 아직도 목마른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던 탓이다.
우진은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의 결재를 기다리는 석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알겠어. 그럼 일단 지금까지 들어온 일은 전부 다 소화해 보는 방향으로 가자고.”
“오케이!”
“작업은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는 거지?”
“이미 처음 받았던 발주는, 어제저녁부터 작업 시작했어.”
“좋아, 잘했어. 그럼 나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합류할게.”
“음……?”
오늘 모형작업은 빠지겠다는 우진의 이야기에, 석현의 눈이 살짝 게슴츠레해졌다.
“뭐야. 오늘 오후에 수업도 없다면서.”
“좀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어. 대신 내일부터는 최대한 도울 테니까, 오늘 하루는 좀 봐 줘라.”
“흐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헬보이 오늘 수업 끝나면, 작업실로 소환해 볼게.”
“콜!”
우진은 책상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어 올리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이것 참, 내가 대표인지 노예인지…….”
“아마 둘 다일걸?”
씨익 웃는 석현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인 우진은, 그 길로 작업실을 나와 어디론가 바삐 향했다.
중요하고 바쁜 일이 있다는 우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 * *
우진이 향한 곳은 세무사 사무소였다.
집에 남아있던 부채는 생각보다 더 자질구레하고 복잡하게 꼬여 있었고, 그것을 최대한 깔끔하게 해결하기 위해 작정하고 전문가를 찾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돈이 옮겨간다면, 별다른 문제 없이 깔끔하게 해결될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감사합니다, 세무사님.”
“별말씀을요. 젊으신 분이 세법도 빠삭하시고, 이렇게 큰 부채도 갚으시고……. 부모님께서 아주 든든하시겠습니다.”
“하하, 앞으로 더 든든한 아들이 되어 드려야죠.”
어머니께 장담했던 것처럼, 바로 다음 날 집안에 남아있던 부채를 싹 다 털어버린 우진.
우진이 갚은 것은 큰고모에게 진 빚뿐 아니라, 여기저기 남아있던 모든 채무였다.
때문에 이자에 채권 말소 비용에 증여세까지, 도합 칠천만 원 정도의 거액이 통장에서 홀랑 사라져 버렸지만.
우진의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후련했다.
가슴 속 묵직한 곳에 얹혀 있던 돌을, 훌렁 털어 낸 기분이랄까.
그리고 사실 일억 넘는 돈이 깨질 것을 각오했던 우진으로서는, 칠천만 원의 비용이 싸게 먹힌 느낌이기도 하였다.
‘생각보다 빚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네. 엄마가 정말 고생 많이 하셨구나…….’
해서 은행까지 돌아 모든 일을 싹 다 처리한 우진은, 어머니 계좌로 용돈도 오백만 원 정도 보내드렸다.
그러자 우진의 개인계좌에 남은 금액은, 정확히 이억 사천만 원이었다.
“이억 사천…….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남았네.”
모든 빚을 해결하고 홀가분한 마음이 되자, 우진의 머릿속이 다시 팽팽 돌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돈 벌 궁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데, 내 돈이 통장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는 꼴은 볼 수가 없지.’
본래는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에 투자하려 했던 자본이지만, 당연히 대체할 만한 투자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클리오 아파트 인근에 분양 준비 중인 다른 사업장의 재개발 투자만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수익을 낼 자신이 우진에겐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연인지 때가 맞은 것인지, 은행을 나서는 우진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위이잉-
그리고 휴대폰에 찍힌 번호를 확인한 순간, 우진은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캬, 타이밍 죽이고.”
그가 두 달 전 던져둔 낚싯대에서, 드디어 입질이 올라온 것이었으니까.
[문정동 김씨아저씨]
우진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에선 깐깐한 김 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통화 괜찮으십니까?]
이미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예상한 우진은, 반대로 그에게 되물었다.
“세영아파트, 매물 나왔나 보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때가 됐으니까요.”
[…….]
당황했는지 잠시 말을 않던 김 씨 아저씨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매물 두 채 확보했습니다.]
“어떤 물건들이죠?”
[하나는 5.95짜리 강변 고층 매물. 또 하나는 5.7짜리 대로변 중층 매물입니다.]
5.95와 5.7이라는 숫자 뒤에 생략된 단어는 ‘억’이다.
우진이 김 씨에게 이야기했던 6억 언더의 매물이, 드디어 시장에 나온 것이다.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한 우진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최근 실거래보다 거의 5천 가까이 싸게 나온 매물……. 확실하군. 드디어 터졌어.’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긴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지금 시간 되시나요?”
[물론입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마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작업실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에 타려던 우진은, 그 길로 걸음을 돌려 택시를 잡았다.
‘상황 봐서 법인 명의로, 업무 차량이라도 한 대 사야겠어.’
우진의 목적지는, 문정동 김 씨네 부동산이었다.
* * *
툭-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 씨는,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전화할 줄, 알기라도 한 눈치였어.’
발단은 지난주 주말이었다.
한창 재건축 추진으로 인해 시세가 상승세를 타고 있던 세영아파트에, 기다렸다는 듯 변고가 생긴 것이 말이다.
[김 씨, 거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세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이, 조합설립인가 무효 소송에서 패소했다는구먼.]
[뭐? 자네, 지금 뭐라 했어?]
[추진위에서 조합 설립 인가받던 당시에, 가짜 동의서로 동의율을 조작했다고 하더라고.]
[그, 그게 사실이야?]
[말도 마시게. 지금 내부적으로 쉬쉬하고 있긴 하네만, 곧 기사 뜨면 모두가 다 알게 될 거야.]
[대체 어떻게 이런……!]
[자네 고객 중에 세영 투자자 있으면, 최대한 빨리 던지라고 하시게. 오늘 내일 중으로 6억 초반 정도에 내어놓으면, 빠르게 계약되긴 할 테니 말이야.]
약 두 달 전, 자신의 부동산에서 분양권을 거래했던 어린 손님은, 6월이나 7월쯤 던지는 매물이 나올 것이라 얘기했었다.
심지어 가격까지도, 정확히 6억 언더라고 짚어주면서 말이다.
당연히 김 씨는, 그 어린 손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놓고 봤을 때에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6월이 되자마자, 귀신같이 그가 말한 대로 되어버렸다.
어린 손님은 마치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무슨 신내림이라도 받은 걸까?’
게다가 우진의 예상이 맞아떨어짐으로 인한 놀라움과 별개로, 김 씨는 또 다른 측면에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최악의 사태를 예언했던 우진은 분명, 6억 언더의 매물이 나오면 매수할 것처럼 얘기했었으니 말이다.
조합설립인가 무효 소송에서 조합이 패소했다는 말은, 지금까지 진행됐던 재건축 절차가 전면 취소됨을 의미한다.
그럼 세영아파트는 다시 재건축을 하기 위해서 지난 십 년 가까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한번 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시간이 곧 돈인 재건축 사업장에서, 이것은 돌이키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치명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태를 예언한 사람은, 이걸 사겠다고 했다.
이대로 소송 건이 언론에 빵 터지는 순간, 4억대로 내려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아파트를.
5억 후반 정도의 가격에 말이다.
‘뭔가 있어. 대체 그게 뭘까?’
김씨는 너무 궁금했다.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 자신의 업장으로 오고 있을 그 어린 손님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 앉아있을지가 말이다.
“후우.”
치이익-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그대로 재떨이에 문질러 버린 김 씨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문지르며 곧 도착할 손님을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이십 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짜라랑-
김 씨가 기다렸던 남자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