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뜻밖의 만남
[헤이, 우진. 오늘 바빠?]
“바쁠 예정이야 왜.”
[홀리……! 아니, 너는 무슨 대학교 1학년이 우리 아빠보다도 더 바쁜 거야?]
“너 아니고 형이라 했지, 제이든.”
[그래, 횽. 대체 주말까지 뭘 하는 건데 그렇게 바빠?]
“맥스 할 거야.”
[Shit! 맥스? 나랑 같이 해야지 그건!]
“농담이야. 오늘 맥스 할 시간 없어.”
[제발 장난치지 마, 브로. 나 지금 매우 진지하다고.]
“네가? 진지하다고?”
[Of course. 난 오늘 진지하게 심심하거든. 정말 할 게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지옥같이 심심한 건 처음이야.]
“그럼 맥스 해.”
[퍼킹 맥스!]
아침부터 요란스런 영국 놈의 전화를 받은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홈 파티도 열고 하는 것 보면 친구는 많은 게 분명한 녀석이었는데, 대체 주말 아침부터 왜 우진을 귀찮게 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 이제 나갈 준비해야 해. 끊어, 제이든.”
[젠장, 정 없는 코리안!]
“정이 뭔지는 아냐?”
[네가 정 없다는 건 알아.]
“무튼, 월요일에 보자고.”
툭-
제이든의 전화를 끊은 우진은, 조금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제이든도 데리고 갈 걸 그랬나?’
오늘 우진이 바쁜 이유는, 청담동의 모델하우스에 가기 때문이었다.
홍보관이 오픈한지는 이미 며칠 지났지만, 바쁜 탓에 이제야 처음 방문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델하우스에 전시된 모형에는 제이든의 지분도 제법 있었으니, 그를 데려갔어도 나쁘지 않을 뻔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전화해서 제이든을 불러내는 수고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뭐, 됐어. 오늘은 조용히 혼자 둘러보고 싶었으니까.’
간편한 차림새로 집을 나선 우진은, 모델하우스가 있는 청담까지 금세 도착하였다.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학교보다는, 같은 강남구인 청담이 훨씬 더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홍보관에 도착하자마자, 우진은 뿌듯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전부터 사람이 제법 많잖아? 이제 3일 찬데, 이 정도까지 사람이 많이 모였을 줄이야.’
전생에서도 클리오 브랜드가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 가 완공된 이후의 일이었다.
한창 건물이 올라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천웅건설의 새로운 시도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해서 우진은 붐비는 홍보관의 전경을 보는 것이, 제법 고무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천웅건설의 브랜딩과 마케팅 능력의 결과물이겠지만, 그 안에 우진의 지분이 제법 크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줄 서있는 사람만 최소 삼사십 명은 되는 것 같고…….’
가방에서 표찰을 꺼내 든 우진은, 그것을 가드에게 보여준 뒤 홍보관 안으로 입장했다.
천웅건설에 부탁해서 ‘STAFF’라고 쓰인 표찰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였으니, 굳이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시간 좀 비워뒀으니……. 입구부터 느긋하게 살피면서 들어가 볼까?’
우진은 홍보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걸음을 멈춰 자신이 시공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 도입부야말로 우진이 가장 신경 써서 공사한 섹터 중의 한 곳.
하지만 공간을 둘러본 것은 정말 잠시뿐. 우진의 시선은, 곧 주변 방문객들을 향해 움직였다.
공간이야 시공하면서부터 질리도록 본 것이었고.
지금 우진이 가장 궁금한 것은, 이곳에 들어선 사람들이 공간을 감상하며 보일 반응들이었으니 말이다.
‘뭐, 반응이 나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 시선을 돌리던 우진은, 잠시 후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장 뒤에 들어온 방문객 중 한 명이, 너무 명확하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글라스를 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평범하지 않은 외모의 여자.
‘뭐지? 왜 이쪽으로…….’
그리고 잠시 후.
우진의 당황은, 종전보다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척-
그의 앞에 선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마치 꾸중하듯 우진을 혼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학생. 무슨 새치기를 그렇게 뻔뻔하게 해요?”
“예……?”
“아니, 사람들 뻔히 줄 서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새치기를 할 거면 좀 티 안 나게 몰래 하던가.”
“아니, 저. 그게 아니고…….”
“당장 나가서 다시 줄 서요. 안 그러면 가드들 부를 거예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힌 우진은, 허공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후.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표찰을 다시 꺼내 들어야 했다.
“저……. 새치기한 것 아니고, 여기 관계잔데요.”
“으응……?”
우진을 불러 세운 그 여자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두 눈만 깜빡여야 했고 말이다.
* * *
우진이 당황한 이유는, 정확히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히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듣게 된 꾸중(?)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뭐, 이런 신기한 일이 다 있어?’
지금 우진을 불러 세운 이 여자가, 우진이 아주 잘 아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여자, 임수하 맞지? 아무리 봐도 임수한데…….’
지금이야 선글라스를 벗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을 만큼, 임수하는 그리 인지도 높은 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2010년이 기준일 때의 이야기일 뿐이었고. 전생의 우진이 알던 임수하는, 국민 여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었었다.
‘나, 참. 살다 보니 진짜 별일이 다 있네.’
해서 우진은 지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인 감정 상태였다.
당황스럽고 어이없으며,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그런 상태.
전생에 임수하를 만났다면 곧바로 사인부터 부탁했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러기는 많이 어색할 것 같았다.
“미, 미안해요. 너무 동안이시라, 건설사 관계자이실 줄은 몰랐어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재차 사과하는 임수하를 보며,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이 뭔가, 재밌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하, 그렇게까지 미안해하실 필요는…….”
“아니에요. 저였더라도 기분 상했을 것 같은걸요.”
동안이 아니라 그냥 어리다는 이야기까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러모로 귀찮은 상황을 생산해 낼 뿐일 테니까.
대신 우진은 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신선한 상황 속에서, 좀 더 재밌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임수하라……. 이 정도 급 되는 연예인을 인맥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매력적인 카드도 없을 텐데 말이야.’
임수하는 여배우답게,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진이, 이성으로서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진이 알기로 그녀와의 나이 차이는, 거의 열 살이었으니까.
물론 우진은 마흔이 넘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 속에 있는 임수하의 이미지도 사십대 후반의 여배우였다.
‘뭐, 그때도 거의 삼십 대로 보이긴 했었지만.’
다만 국민배우 급의 인지도를 쌓을 예정인 임수하와 알고 지낸다면, 사업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우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진은, 조금 더 호의적으로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뭐, 그러실 수도 있죠. 줄 서는데 새치기하는 사람 보면, 원래 짜증 확 올라오지 않습니까.”
“하핫,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그녀의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핀 다음, 슬쩍 떡밥을 깔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저기…….”
“네?”
“혹시, 임수하 배우님 아니신가요?”
“어엇, 절 아세요?”
정말 놀란 얼굴이 된 그녀를 보며, 우진은 마른 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이제부터 말 잘해야 해.’
거의 이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내기 위해서는, 두뇌를 풀가동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팬인 척할 수 있지?’
우진은 임수하의 무명생활이 길었지만,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2010년에 그녀가 무슨 영화에서 나온 줄은 모른다.
그래서 우진은, 잔머리를 좀 쓰기로 했다.
“왜,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있잖아요, 그…….”
말끝을 살짝 흐리며 고민하듯 연기하자, 임수하가 재빨리 영화 제목을 얘기했다.
“미스터 제이!”
그리고 그녀가 우진의 예상대로 말해 준 덕분에, 대화는 한층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맞아요! 제가 그 영화를 되게 재밌게 봤었거든요.”
다행히 그녀가 언급한 영화는, 우진도 본 적이 있는 영화였다.
“오오, 정말요?”
“네네. 배우님 연기가 너무 좋았어서, 인터넷으로 여러 번 검색도 했었어요.”
“그……렇게 까지나…….”
“배우님 팬인데, 이렇게 우연히 뵙게 되다니, 오늘은 운이 정말 좋네요. 하하.”
“하아, 제가 몇 되지도 않는 팬분께 이런 결례를 범했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정말.”
연예인 치고 자신의 팬이라는데 싫어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인기에 목마른 무명배우라면, 우진의 이야기가 기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배우님도, 여기 분양받으려고 오신 거예요?”
“아, 꼭 그렇다기보단, 한번 구경이라도 해보려고 왔어요. 홍보 기사 봤는데, 꽤나 괜찮아 보여서…….”
자연스레 대화를 튼 두 사람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홍보관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임수하 또한 매니저 없이 혼자 방문한 것이었고, 우진도 혼자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임수하의 입장에서도 희귀한(?) 자신의 팬과 말동무라도 하며 홍보관을 둘러보는 것이, 혼자 다니는 것보단 낫게 느껴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쪽 분야에 박식한 우진이 이것저것 설명도 잘 해 줬기에, 그녀는 실질적인 도움도 제법 받을 수 있었다.
“뭐, 혼자 사실 집을 구하시는 거면 59A타입이나 C타입도 괜찮은데, 그래도 어지간하면 84A타입으로 분양 노려보세요.”
“84A타입 이라면, 34평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이유는요?”
“거의 모든 호실이 판상형*[한 방향을 바라보며 일자형으로 거실 포함 대부분의 방이 배치되어, 통풍이나 채광이 좋은 구조.]에 남향으로 구조가 잘 빠져서, 환기도 잘 되고 살기 좋을 거예요. A타입이 거의 앞 동쪽에 몰려 있어서, 위치도 제일 좋구요.”
“아하!”
“살기가 좋으니, 당연히 투자가치도 제일 높겠죠?”
“관계자 시라더니, 정말 아시는 게 많네요.”
“이정도야 뭐…….”
우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던 임수하는, 점점 더 여러모로 놀라는 중이었다.
일단 아무리 많게 봐줘도 20대로 보이는 우진의 박식함에 놀랐으며.
‘건설회사 다니려면, 원래 이 정도는 다 알아야 하는 건가?’
그와 동시에 분양홍보관의 퀄리티가 기대 이상으로 놀라웠으니 말이다.
‘디자인도 그렇고 편의시설도 그렇고……. 우리 집이랑 너무 비교되잖아?’
심지어 이 둘은 시너지를 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우진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 라는 아파트가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니까.
‘여기, 살고 싶다.’
물론 그러한 시너지가 우진이 의도한 설계의 일환이었음을, 임수하로서는 알 턱이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아현동이 지금은 많이 낙후되어 있는데, 여기 아현 3-2구역이 뉴타운 첫 번째 타자나 다름없거든요.”
“디자인이나 시설이 잘 빠진 걸 떠나서, 여기 위치도 앞으로 엄청 좋아질 겁니다.”
“줄줄이 다른 구역들 지어지기 시작하면, 프리미엄도 상당히 많이 붙을 거예요.”
마치 약장수가 빙의하기라도 한 듯, 청산유수처럼 클리오 아파트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우진.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이 아파트는 분양이 끝난 이후 정말 미친 듯이 프리미엄이 붙을 아파트였고.
그렇게 되면 임수하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나중에 만약 계약하러 오게 되시면, 연락이나 한번 주세요, 배우님. 그때 제가 시간이 되면 계약하시는 것도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요.”
수하가 이 아파트를 계약하러 와야만, 그녀를 좀 더 자연스럽게 인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우진이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든 수하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고.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 단순한 건설사 직원이 아니었네?’
이어서 눈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저야 어차피 여기 어지간하면 있을 텐데요.”
물론 거짓말이다.
우진이 관계자는 맞았지만 분양관계자가 아닌 시공 관계자였고.
그가 대부분 머물 곳은, 이곳 홍보관이 아닌 K대학교 캠퍼스였으니까.
하지만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수하에게도 나쁠 것은 없는 거짓말이었다.
하여 모든 목적을 달성한 우진은, 그녀를 상담원에게로 인도해준 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볼일 보고 가세요, 배우님. 덕분에 재밌었습니다.”
“저도요, 서우진 대표님. 다음에 꼭 연락드릴게요.”
“그럼, 이만.”
우진이 아무리 설명을 잘 해줬다고 해도, 홍보관의 상담사에게 들어야 할 내용도 따로 있다.
평형별 분양가라던가, 분양 일정이라던가. 혹은 분양받기 위해 필요한 금융상품에 대한 안내라던가.
그런 부분까지 우진이 얘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우진은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려, 본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과 이 이상의 대화를 나누려 하는 것도, 수하의 입장에선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후후. 배우님이 충분히 혹하셨어야 할 텐데…….”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뜻밖의 이벤트를 치른 탓인지, 우진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욱 경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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