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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36화 (36/315)

36화

시공(施工)

김관홍은 우진을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우진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거의 십 년도 더 된 인연.

물론 우진의 나이 열 살 때 알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관홍은 우진이 전생에 서른 정도 되었을 즈음, 함께 일한 적 있는 전기반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도 이 아재는, 한 성질 하는 사람이었지.’

인력소장이 일정 가능한 전기반 리스트를 보내줬을 때, 관홍은 우진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해서 반가운 마음에 우진은 연락을 넣어봤다.

물론 그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생각했지만, 결국 그는 전생의 그 인연이 맞았다.

그렇게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였을 때는,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진짜, 세상 참 좁다니까.’

사실 김관홍은 그렇게까지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너댓 번 정도 함께 일했을 뿐,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친분과의 별개로, 반가움은 생각보다 더 컸다.

마치 타지에서 만난 동향인 이, 몇 배로 더 반가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어.’

우진의 기억에 남아있는 전생의 인연은, 보통 다음 중의 하나였다.

정말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었다거나.

혹은 실력이 좋아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웠던 사람이었거나.

관홍은 그중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WJ 스튜디오의 공사 일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공사에서만 관홍과 같은 전생의 인연을, 우진은 둘이나 더 찾을 수 있었다.

한 명은 아주 우연히.

“혁진 반장님 소개로 온 나시환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명은 아주 필연적으로.

“안녕하세요, 벨로스톤즈에서 나온 민주영입니다. 서우진 대표님이시죠?”

“아, 제가 서우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와아, 진짜 젊으시네요. 목소리부터 젊으시다 생각하긴 했지만…….”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이태리 산 천연 대리석 수입업체인 ‘벨로스톤즈’의 대표 민주영.

그녀와 마주한 우진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였다.

* * *

나시환은 전생에서, 한때 우진과 가장 친했던 동료였다.

우진이 김지훈반장의 팀에서 본격적으로 내장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던 시절.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김지훈의 제자가 되었던, 같은 팀의 동료였으니 말이다.

둘은 나이도 동갑이었다.

‘얠 이렇게 만난다고?’

하지만 나시환과의 인연은, 그렇게 좋게 마무리되지 못했었다.

뛰어난 편이던 손재주와 별개로 작업 머리가 부족했던 시환은, 시간이 갈수록 팀 내에서 우진과 비교되었으며.

그로 인한 열등감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우진을 멀리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진의 잘못도 있었다.

혈기왕성하던 20대의 우진은 여느 또래들과 다를 바 없이, 우월감을 표출하는 걸 꺼리지 않았으니까.

‘나라도 얄미웠겠지.’

솔직히 어릴 때는 그러한 시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던 우진이었다.

그저 갈수록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던 시환이 미웠을 뿐이니까.

이십 대의 우진은,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이렇게 손재주도 좋고 착한 친구였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몰라.’

그래서 우연히 목공팀에 외주인력으로 나온 시환이, 우진은 더욱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해묵은 찝찝한 감정의 잔재를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반갑습니다, 시환님.”

시환은 시기 질투가 많고 여성스러웠던 친구임과 동시에, 칭찬에 무척이나 약한 타입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진은 선의의 거짓말을 좀 했다.

“소장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조공이, 이제보니 시환 님이셨군요.”

“아앗,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인력소장이 딱히 그에 대한 칭찬을 한 적은 없지만, 의도적으로 자신감을 더 북돋아 준 것이다.

그는 잘한다 잘한다 할수록, 더 성실하고 꼼꼼히 일하는 친구였으니까.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시환이가 목공 2년 차일 거고……. 아직 김 반장님 팀에는 합류하지 못한 시점이겠네.’

우진은 이번 일이 끝나고 난 뒤에도 종종 시환에게 일거리를 제시할 테지만, 향후 몇년 간은 WJ 스튜디오에 채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차후에 김지훈 반장과 연결고리가 되어줄 수 있는 훌륭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것이었고.

그때까지 시환을 프리하게 두어야, 그의 인생이 전생과 비슷하게 흘러갈 테니 말이다.

당장 우진에게 필요하진 않았지만, 장기적으론 꽤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드인 시환.

그런데 시환이 이렇게 거시적으로 도움 될 인맥이라면, 공사 마지막 날쯤 나타난 민주영은 당장부터 긴밀한 관계로 만들어야 할 인맥이었다.

이태리 유학생 출신으로 우진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여자인 민주영은.

향후 업계에서 독보적인 자재업체를 만들어 낼, 떡잎 바른 새싹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자재를 발주할 때, 우진은 필사적으로 인터넷을 뒤져 ‘벨로스톤즈’를 찾아내었다.

아직 업계에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신생 업체를 말이다.

“대표님 덕에 ‘로소 레판토’를 구할 수 있었어요. 이게 진짜 아무리 수입업체를 뒤져도 상등품을 구할 수가 없더라고요.”

“호호, 그렇죠? 이렇게 장밋빛 채광을 뿜어내는 대리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실 고가의 로소 레판토를 굳이 마감재로 쓴 이유 중에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함도 있었다.

현시점 벨로스톤즈가 유통할 수 있는 최고의 대리석이 바로 로소 레판토인 듯 보였고.

이걸 위해 굳이 그녀를 찾았다고 하면, 세영 또한 충분히 납득할 만했으니 말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실수로 그녀의 의심을 살 뻔하기도 했지만…….

“엇, 그런데 서 대표님.”

“예?”

“제가 벨로스톤즈 대표인 건, 어떻게 아신 거죠?”

그 정도는 다행히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아, 그게……. 통화할 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아하. 제가 그랬었나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며,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생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인 탓에 자연스레 대표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는데, 자칫 쓸데없이 곤란한 상황이 만들어질 뻔했으니 말이다.

‘휴. 전생의 기억과 섞이는 것도 조금 더 조심해야겠어.’

어쨌든 현장에 나온 민주영과 커피를 한잔한 우진은, 기분 좋게 이야기를 계속 나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업장이 꽤 먼 것으로 아는데, 여기까지 대표님께서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후후, 저희가 사실. 이제 막 사업을 키우기 시작한 신생이거든요. 고객 하나하나 정성스레 저희 편으로 만들어야, 이 치열한 업계에서 살아남죠.”

털털하고 솔직한 민주영의 얘기에, 우진 또한 웃으며 대답하였다.

“에이, 저희도 신생인데요. 뭘.”

“서 대표님같이 열정 넘치는 신생 업체 대표님을 오히려 잘 잡아둬야죠. 신생이 천웅건설 일을 따낸 거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감이 좋은 것인지 보는 눈이 좋은 것인지.

반짝이는 민주영의 눈동자를 본 우진은, 그녀의 통찰력에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리고 우진이 찻잔을 홀짝이는 동안, 주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시공결과를 한번 보고 싶었어요.”

“자재가 어디에 어떻게 시공되었는지…… 말이에요?”

주영이 쌍꺼풀 없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네. 맞아요. 저희가 구한 최고의 자재가 어떤 느낌으로 시공되는지를 두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이유는요?”

“가능성을 알고 싶었거든요.”

“……?”

“평범한 자재들이야 해당되지 않는 말이에요.”

주영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창밖으로 보이는 현장을 보며 얘기했다.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하였다.

“한국에서 로소 레판토 정도 되는 고가의 마감재들은, 프리미엄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요.”

흥미가 생긴 우진이 턱을 괴고 그녀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자재의 가격이 보다 뛰거나,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난다거나……. 그런 맥락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뭐, 비슷해요. 유럽쪽이야 이미 희귀하고 아름다운 프리미엄 대리석 시장이 포화상태지만, 한국은 아직 아니거든요.”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핵심은, 짧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도 점점 더 고급화를 추구할 것이고, 사치재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때문에 한국인들이 선호하게 될 프리미엄 자재들의 유통권을 독점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빠르고 크게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우진의 입장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통찰력이었다.

‘확실히……. 대단한 여자야.’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에 동의하였다.

“옳으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역시, 그렇죠?”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민주영의 표정에 흥미가 어렸다.

“그게 뭐죠?”

한 차례 마른침을 삼킨 우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가 시공한 로소 레판토의 점수는, 대표님 눈에 몇 점이었을까요?”

“……!”

“솔직하게 말씀 주셔도 됩니다.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그런 타입은 아니거든요.”

생각지도 못했던 우진의 질문에, 주영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호호호.”

기분 좋은 얼굴이 된 그녀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오늘 회사로 돌아가면, ‘로소 레판토’의 유통권 만큼은 필사적으로 확보하려고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우진이 마주 웃었다.

“하핫.”

“그리고 WJ 스튜디오와 서우진 대표님과의 관계도, 꽉 붙들고 놓지 않으렵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민주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정도면, 대답이 되셨을까요?”

멋쩍은 표정이 된 우진이, 밀려 올라가는 광대를 문지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었다.

“비행기를 태워 주시네요.”

우진은 최근 들어 가장 기분이 좋았다.

통찰력 있는 민주영으로부터,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우진이 아는 민 대표는 입에 발린 말을 잘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고, 설령 빈말이었다고 해도 그 정도 구분 못 할 우진이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 정말 구경 잘하고 가요, 서 대표님.”

“저도 민 대표님 덕에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민주영이 손을 내밀며 다시 말했다.

“바쁘시겠지만, 다음에 한 번 저희 사무실에 놀러 오세요. 인천이라 조금 멀기는 하지만……. 오신다면 재밌는 것 많이 보여드리죠.”

“하하, 더워지기 전에 꼭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민주영을 돌려보낸 우진은, 더욱더 마감 공사에 박차를 가하였다.

“타일 간격은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이쪽에 실리콘 삐져나온 것, 안 보이십니까?”

“광택제 아끼지 말고 발라주세요. 광택이 제대로 살지 않으면, 할로겐 백날 쏴 봐야 아무 의미 없단 말입니다!”

또 하루. 또 이틀.

우진이 미친 듯이 바쁘게 학교와 현장을 오가는 동안.

보름이 넘는 제법 긴 시간이, 말 그대로 쏜살같이 우진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 할로겐 비틀어진 거 바로잡아 주세요!”

“조명 열기에 모형 도색 녹으면 안 되니까, 측면은 거리 좀 띄워 주셔야 합니다!”

“아크릴이랑 유리에 먼지 묻은 것만 한 번씩 닦아주시고……!”

“공사,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우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키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총 20일 정도가 걸린, 천웅건설 프리미엄 브랜드 ‘클리오’의 브랜드 홍보관 시공 작업.

WJ 스튜디오에서 시공한 첫 번째 작품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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