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수확의 달
그로부터 며칠 뒤.
우진의 통장에 정말 1억에 가까운 돈이 생겼다.
문정동의 공인중개사 김 씨는 깔끔하게 일 처리를 잘했고, 우진은 사람을 잘 봤다고 생각하였다.
‘괜찮은 곳을 잘 찾았네.’
앞으로도 적절한 시기마다 부동산 투자를 할 우진은, 서울 각지에 괜찮은 부동산을 뚫어둘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문정동의 김 씨는, 종종 보게 될 사람일 것 같았다.
“이제 이 돈을 어떻게 아름답게 쓰느냐가 관건인데.”
우진은 아직 7천만 원을 다 쓰지 않았고, 일억에 가까운 돈이 추가로 생겼다.
하지만 그 모든 돈이 하나의 통장에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진이 일을 따서 벌어들인 돈은 WJ 스튜디오의 법인통장에 들어있는 것이었고, 분양권 매도로 벌어들인 수익은 그의 개인 자산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은, 이 돈을 어떻게 써야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일단 마땅한 투자처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 그렇다면 당장은 이 돈도 스튜디오에 투자하는 게 맞는데…….’
우진은 일단 사업체를 키우는 데 돈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개인 계좌에 있는 돈을 어떤 방식으로 법인계좌에 집어넣느냐는 것.
얼핏 보기에는 이 고민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법인계좌에 돈을 집어넣고 빼고 했다가는, 훗날 폭탄 같은 세금을 두들겨 맞을 테니 말이다.
‘가장 심플한 방법은, 자본금을 증자하는 건데…….’
법인계좌에 돈을 넣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우진이 자신의 법인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데 WJ 스튜디오의 지분구조가 100% 우진의 명의로 되어 있다 보니, 우진의 투자가 곧 자본금 증자로 이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내키지 않았다.
세법상 법인사업자는 우진과 별개의 존재였고.
때문에 법인에 한번 들어간 돈을 개인 자산으로 빼오려면, 적지 않은 세금을 내야 했으니 말이다.
월급이든 배당이든, 어떤 방식이어도 마찬가지다.
‘일단 차입으로 넣어야겠어. 회사 계좌에 잉여금이 충분히 생기면, 그때 그대로 뽑아 와야지.’
해서 우진은 자신의 돈을 법인에 ‘빌려주는’ 형태로 입금하였다.
투자한 돈이 아닌 빌려준 돈은, 다시 회수해 온다고 해서 세금을 물지 않았으니까.
내야 할 세금을 부당한 방법으로 피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지 않아도 될 세금까지 기부할 생각은 별로 없는 우진이었다.
“좋아. 그럼 이거로 자본은 확보됐고…….”
우진은 법인통장을 들여다보며, 치밀하게 캐쉬 플로우(Cash Flow)를 짜기 시작하였다.
가진 자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굴리되, 타임라인이 엉켜서 ‘돈맥경화’가 오지 않도록 말이다.
자금 순환계획이 엉켜서 필요할 때 유동성이 묶여서 파산하는 것을, 우진은 돈맥경화라고 부르곤 했다.
‘됐어. 이렇게 움직이면…….’
해서 자금계획을 얼추 세운 우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작업실의 공간을 추가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사장님, 잘 지내셨죠?”
“이게 누구야, 우진 학생 아니야?”
우진에게 작업실을 잡아 준 부동산 사장 아주머니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의 바른 손님인 우진의 인상이 그녀에게 나쁠 리 없었다.
“이번에 임대면적을 좀 더 늘리고 싶은데요.”
“어머, 작업실이 잘 되 나봐, 학생?”
“그럭저럭요. 하하.”
“같은 층에 공실로 확장하고 싶은 거지?”
“맞아요. 가능하면 2층 전체 다 임대하고 싶어요.”
“이야, 허름한 건물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월세가 최소 삼백은 나올 텐데?”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공실이 길어지고 있던 탓인지, 생각했던 것보다도 월세가 더 쌌으니 말이다.
“그 정도 선에서 협의해서, 주인아저씨께 얘기 좀 해주세요.”
“좋아요. 그 양반이야, 아주 신나서 계약해 줄 거야. 안 그래도 공실이 벌써 두 달 째라, 심란해하시던 참이었거든.”
우진이 작업실을 확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형작업 할 작업자를 더 늘림과 동시에, 건설사들을 돌며 건축모형 일을 대량으로 따올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구석진 대학가가 아닌 시내로 작업실을 옮길까 생각도 해봤지만, 여러 측면에서 학교 인근이 장점이 더 많다고 판단하였다.
마침 같은 층에 공실이 많았던 것도, 그 결정에 한몫했고 말이다.
‘학교 애들을 불러다가 알바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직원을 최소 셋 정돈 채용해야겠어. 관리는 석현이를 시켜야겠지.’
너무 많은 일들을 우진 혼자서 동시에 진행하다가는, 결국 머리에 과부하가 오고 말 것이다.
해서 우진이 찾는 것은, 최대한 효율적인 운영방식이었다.
‘천웅건설에서 작업한 포트폴리오 들고 몇 군데 돌면, 일이야 쏟아져 들어오겠지. 다만 물량을 늘리면서도 퀄리티를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인데…….’
시간이 갈수록 우진은 설계와 시공 쪽으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석현이 관리해준다 한들, 이번 작업물 정도의 퀄리티를 항상 뽑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우진은 고민했고, 괜찮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다.
‘프리미엄 상품을 따로 만들어야겠어. 일반 작업보다 단가를 2배까지 올리고, 프리미엄으로 들어온 외주만 석현이랑 내가 직접 작업하는 거지.’
우진은 자신의 생각이 흡족했는지, 노트에 빠르게 메모하기 시작하였다.
확실한 차별화만 가능하다면, 충분히 먹혀 들어갈 전략.
이번에 ‘프리미엄 모형’의 위력을 확실히 본 천웅건설이 있으니, 이 전략을 정착시키는 게 생각보다 더 쉬울지도 몰랐다.
“흐으으아. 오늘은 구인공고만 올리고 자야겠다. 내일부터는 다시 학교에 좀 더 집중해야 하니까.”
생각난 아이디어들을 전부 노트에 정리한 우진은, 작업실 구석에 펼쳐 둔 간이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이제 천웅건설의 홍보관 착공 날이 되기 전까지, 급하게 해야 할 일은 모두 처리한 셈이었다.
내일부터 학교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이제 곧 4월 말 5월 초.
벚꽃 피는 계절은 곧, 대학교의 중간고사 시즌을 의미했으니까.
* * *
우진은 학과의 필수전공 수업 중, 가장 애매한 수업이 ‘기초 공간 조형’이라고 생각하였다.
과목 설명만 놓고 보면 공간디자인과의 가장 메인이 되는 전공 수업이었는데.
오히려 다른 과목에 비해, 명확히 뭔가를 배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진이 포함된 ‘기초 공간 조형 B반’의 교수인 고승훈은 휴강도 잦은 교수였고.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 또한, 무척이나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것이었다.
조금 예쁘게 포장한다면, ‘철학적인’ 주제를 공간디자인으로 풀어내는 수업이랄까.
‘물론 이런 수업도 필요할 것 같긴 한데……. 딱히 와 닿진 않는단 말이지.’
우진은 고승훈 교수가 월급루팡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곤 했지만, 지금까진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전공필수 과목 하나가 그의 부담을 덜어준 덕에, WJ 스튜디오의 일을 더 적극적으로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날로 먹는 전공 수업 하나쯤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해.’
그런데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자, 이 수업도 슬슬 뭔가를 하기 시작하였다.
휴강 매니아 고승훈 교수도,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휴강 소식에 환호하면서도, 정작 종강 이후 수업내용이 별로였다면, 가차 없이 악평을 남기곤 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지난주까지 이론 수업은 충분히 한 것 같고……. 이제 우리 곧 중간고사죠?”
“네, 교수님!”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부터는, 슬슬 조별과제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으아아!”
“아니, 교수님! 꼭 그러실 필요는…….”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 모두 A+를 주고 싶지만, 교칙 상 그럴 수는 없으니……. 저도 뭔가 평가라는 걸 해야 하지 않겠어요?”
고승훈 교수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학생들은 전부 울상이 되었다.
중간고사가 다가오며 모든 과목이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상황이었는데.
믿었던 공간 조형마저 한팔 거들게 되었으니, 절로 탄식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어디 보자…….”
강의실을 한 차례 빙 둘러본 고승훈 교수는,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앉아있는 대로, 둘씩 짝지어서 조를 정하면 되겠군요.”
“예에?”
고승훈은 누군가의 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공교롭게도 정확히 둘씩 짝지어 앉았네요. 완벽해.”
뭐가 그렇게 완벽하다는 건지 박수까지 친 고승훈 교수는, 칠판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수의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
강의실 내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것은, 우진의 옆자리에 앉았던 한소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 예쓰!”
그런 그녀를 건너편에서 입을 삐죽 내민 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지난주만 해도 우진의 옆에 앉았던 혜진이었고 말이다.
“언니.”
“왜.”
“좋냐? 좋아?”
“좋지, 그럼 안 좋겠냐?”
다른 동기들은 이해할 수 없는 둘의 행동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소연은 진짜 신이 났다.
디자인의 밤에서 우진의 실력을 적나라하게 본 적 있었으니, 조별과제로 엮인 것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연은 돌연 우진의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고, 우진은 짐짓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어허, 한 선생, 갑자기 왜 이러시나.”
“전 우진 님만 믿습니다.”
“뭘?”
“이 가련한 중생을, A+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소연의 과장된 제스쳐에, 결국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야, 무슨 과제가 나올 줄 알고 날 믿는다는 거야?”
“뭐가 됐든 잘할 거잖아. 난 믿어.”
“에이, 왜 이러십니까. 기사님.”
“내가 기사야?”
“어.”
“오케이. 그럼 오빤 엔진.”
“…….”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원래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랬어.”
우진은 능글거리는 소연이 딱히 밉지 않았다.
최근까지 겪어봐서 알지만, 말만 이렇게 하지 그녀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고.
재수생답게 실기 실력이 뛰어나서, 함께 과제를 수행하기에 제법 괜찮은 파티 구성원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예쁜 얼굴을 들이밀며 신이 나서 헤실헤실하는데, 그게 싫다면 우진은 남자가 아닐 것이었다.
“일단 교수님 쓰는 거나 메모해서 정리해 보자. 아무래도 저게, 중간고사 과제인 것 같으니까.”
“옛 썰! 내가 또 필기는 잘하지.”
우진과 소연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칠판에는 고승훈 교수의 글씨가 제법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은, 저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기초 공간 조형 B반, 1학기 중간고사 과제.]
[가상의 클라이언트에게, 특별한 공간을 선물하십시오.]
[상업공간이건, 주거공간이건, 혹은 전시공간이건 교육공간이건. 공간의 용도는 어떤 것이 되어도 관계없습니다.]
[다만 최대한 구체적인 가상의 클라이언트를 만들어, 창의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을 디자인해 그에게 선물하십시오.]
[가상의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면서도, 디자인에 여러분의 철학이 명확히 담겨 있어야 합니다.]
……중략……
[과제 결과물 : 판넬 1EA, 건축모형 1EA]
[과제 마감일 : 4월 29일(목)]
과제는 우진을 비롯한 학생들의 예상대로, 중간고사 점수를 평가하는 과제였다.
디자인 대학을 포함한 미대의 전공과목 대부분은 시험 대신 실기 과제로 점수를 평가하곤 하니, 딱히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가상의 클라이언트에게, 특별한 공간을 선물하라…….’
고승훈 교수답게 추상적인 주제이면서도, 지금까지 그의 수업내용을 생각하면 비교적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주제와 요구들.
소연은 이 내용을 꼼꼼히 노트에 메모하였고, 그동안 우진은 어떻게 과제를 풀어내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출제 의도가 뭘까? 고승훈 교수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생각에 잠긴 우진의 귓전으로, 고승훈 교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부터 한 시간 드릴 테니, 조별로 컨셉을 잡아 보세요.”
“한 시간 뒤부터는 조별로 개별 컨펌(Confirm)을 진행할 겁니다.”
“컨펌을 통과하지 못한 조는 절대로 진도를 나갈 수 없으니, 고민 많이 해서 가져오세요.”
고승훈 교수의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조별로 머리를 맞대고 저마다 열띤 토론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진과 소연도 마찬가지였다.
“오빠. 일단 클라이언트부터 정해야겠지?”
“그게 아무래도 좋겠어. 특별한 클라이언트를 한번 만들어볼까?”
소연이 먼저 의견을 제시하였고, 우진은 열심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였다.
“특별한 고객이라면, 직업부터 특별해야겠지? 화가나 요리사? 아니면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
“음, 공간에 창의성이 부여되려면, 좀 자유분방한 직업을 가진 클라이언트가 좋겠지?”
하지만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우진과 소연은 쉽게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막상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그들의 마음에 확 와닿는 가상의 클라이언트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를 나누던 그때.
우진의 머릿속에 불현듯, 괜찮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