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수확의 달
“한 이년 정도 필요할 거예요.”
“뭐가?”
“형 연봉, 두 배로 인상해 주는 데까지요.”
“…….”
“세후로 매달 천정도 가져가게 해드릴게요. 딱 내후년 3월부터는요.”
두루뭉술하게 던지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액수가 우진의 입에서 나왔다.
하여 진태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미친 꼬마 놈이,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 하우스라도 차리려는 건 아니지? 아니면 불법 토토?”
“아. 하나를 빼먹었네. 전 아주 합법적인 일만 할 겁니다.”
“대체 무슨 합법적인 일을 하면, 나한테 그만큼 챙겨줄 수 있는 건데?”
“형이 맨날 하던 그거요.”
“뭐? 목공?”
“바로 그거죠. 그게 아니면, 형을 왜 불러옵니까?”
“…….”
가만히 있는 진태를 향해, 우진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 낚싯대는 던졌으니, 물가에 떡밥을 풀어놓을 차례였다.
“이미 천웅 쪽이랑, 괜찮은 건도 하나 계약했어요.”
“…….”
“천웅 말고 일 따올 곳도 여기저기 알아왔고……. 무엇보다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예산도 땡겨 놨고요.”
건축사무소에게 자급자족이란, 부지를 매입해서 직접 지어다 파는 것을 의미한다.
작게는 대지 몇십 평짜리 빌라나 다가구주택부터, 크게는 몇백 평이 넘는 건축까지.
물론 아무리 작은 건축을 한다 해도, 현찰로 오륙 억 정도는 필요하다.
건축자금 대출로 토지매입부터 시작해서 총 건축 비용의 6~90%를 땡긴다고 하더라도, 10~40%의 현찰은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산이 있다는 우진의 이야기는, 절반 정도 거짓말이었다.
우진이 생각하는 5억 이상의 예산이 확보될 시점은, 최소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이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진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원래 금수저였냐?”
“음, 뭐. 비슷해요.”
꼭 돈이 많아야 금수저는 아니다.
누구도 갖지 못한 경험을 가진 것도, 우진은 금수저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개소리.”
“뭐가요?”
“금수저는 무슨. 대체 어느 나라 금수저가 그러는지 몰라도, 적어도 이 나라 금수저는 타카질 할 줄 모를걸.”
“흐흐흐.”
인지 부조화라도 온 것인지 황망한 농담을 하는 진태를 보며, 우진은 기분 좋게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전반적인 사업계획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인 솔루션까지.
우진의 얘기는 갈수록 더 가관이었지만, 진태는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의 연봉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이미 비현실적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자,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다시 말하지만, 형한테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요. 알죠?”
우진의 얘기가 끝난 뒤에도 가만히 있던 진태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살짝 당황하였다.
머리로는 분명히 어이없는 상황이었건만.
이 꼬마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으니 말이다.
‘분명 말이 안 되는데, 또 되는 것도 같아. 내가 취한 건가?’
그리고 이제 하려던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내 놓은 우진은, 맘 편히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당장 답변을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렇겠지.”
“4월 셋째 주까지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당장이 아니면……. 뭐가 당장이냐?”
“이 자리에서 대답해 달라고는 안 하잖아요. 하하.”
우진은 더 이상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맺고 끊을 때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자질구레하게 더 말만 늘어놔 봐야, 이 시점부턴 이제 구차해 보일 뿐이지.’
생각하는 확실한 패를 던져놨으니, 이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진태가 뜻대로 안 움직여 줄 수도 있겠지만, 차선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하여 다시 일상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 두 사람은, 삼십여 분 정도 잡담을 더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이모, 여기 계산이요!”
“네, 갑니다!”
고깃값을 계산하는 우진의 뒤로, 뒤늦게 옷을 챙긴 진태가 따라 나왔다.
그리고 우진의 뒤로 다가온 진태가, 지나가듯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래서, 회사 이름은 뭐냐?”
진태의 목소리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낀 우진이,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WJ 스튜디옵니다.”
* * *
진태와 고기를 먹은 날을 기점으로, 우진은 더욱 바빠졌다.
천웅건설과의 계약이 곧바로 진행되어서는 아니었다.
박경완과 전화통화를 한 뒤 우진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데까지는, 대략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다만 우진이 바쁜 것은, WJ 스튜디오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물밑작업 때문이었다.
박경완의 전폭적인 지지를 제외하고, 천웅건설 내부적으로도 WJ 스튜디오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단순히 모형만 만들던 작업장의 상태로 천웅과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었으니까.
인테리어 시공이 가능한 건축사무소로 탈피해야 했으니, 페이퍼웍(Paper Work)은 물론, 여기저기 손 쓸 데가 많았다.
‘목공이야 걱정할 게 없지만, 다른 파트는 미리 괜찮은 커넥션을 만들어 놔야 해.’
보통 인테리어 공사는, ‘철거’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인테리어를 철거해서 백지상태로 만들고, 그 위에 새로운 디자인을 입혀야 하니 말이다.
‘천웅건설의 청담 홍보관도 이전에 분명 모델하우스로 쓰고 있었을 테니……. 철거부터 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겠지.’
해서 철거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작업이 보통 목공이다.
목공으로 뼈대를 세우고 구조를 만들면서, 배선작업까지 같이 하는 것이다.
‘이건 너댓 명 데려다가 내가 직접 하면 되고…….’
그렇게 배선과 함께 목공이 마무리 됐다면, 그다음은 설비작업.
수도설비, 소방설비 등의 설비작업을 선행해야, 디자인 마감을 위한 작업들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해서 이 도색, 타일 작업 등 디자인 마감 작업까지 끝나면, 모든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는 것이고 말이다.
‘마감이야 어차피 내가 감리 보면서 직접 시공해야 할 거고. 결국 필요한 건……. 철거, 전기, 설비인데.’
보통의 작은 건축사무소들은, 이런 인력을 전부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모든 공정의 인원을 상시로 고용하려면, 그 인원이 만만치 않은 숫자이기 때문이다.
일이 끊기는 순간 직원 월급만 억 단위로 깨져 나갈 테니, 어지간한 규모가 아니고서는 감당이 되질 않는 것이다.
해서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목공부터 마감 작업까지 잘할 수 있는 분야만 직접 움직이고.
나머지 다른 파트들은, 실력 있는 팀을 찾아 연결해 뒀다.
“부탁드립니다, 소장님. 인건비는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 실력 있는 팀으로 연결 좀 해주세요.”
[그래. 노력은 해보겠네만……. 괜찮은 팀들은 다들 일정이 빡빡할 거야.]
현장과 관련된 우진의 인맥은, 사실상 전생의 인맥이다.
현장에서 이십 년을 구르며 만들어낸, 그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인맥들.
하지만 전생의 인맥이라 해서, 활용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관계가 돈독했던 사람일수록 그의 취향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이 우진의 머릿속에 있었고.
적당한 선을 지키며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 나가면, 전생보다 훨씬 빨리 다시 인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우진이 기억하는 인력사무소의 소장들 중, 김진태와 면식이 있는 괜찮은 사람이 한 명 있었으며.
덕분에 조금 더 쉽게 풀린 것은, 어느 정도 운의 영역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에이, 그래도 소장님 능력이면, 파트별로 한 팀 정도씩 따오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어허, 요놈 보게. 그렇게 아부한다고 없던 팀이 생기나.]
“다음에 진태 형이랑 같이, 곱창에 쐬주 한잔하시죠. 제가 양 대창 기가 막히게 하는 가게를 압니다.”
[크흠……. 내가 곱창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알겠어. 최대한 노력해 볼 테니까, 날짜나 잡아 봐.]
“공사 일정이라면 이미 나와 있…….”
[진태랑 같이 곱창 먹을 날짜 말이다, 이놈아.]
“아, 넵……! 물론입니다!”
몇 다리만 건너면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을 알 수도 있다고 했던가.
그런 기준으로 보면 국내의 건설바닥은 좁은 편이었고,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우진의 예전 인맥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하여 우진은 그 인맥들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활용해야지. 그래도 갈 길은 멀어.’
물론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업에 빠져야 할 일도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수업을 듣는 친한 동기들이 적당히 커버해 주었다.
그 표현방식이 조금 독특한 친구도 하나 있었지만 말이다.
“헤이, 우진. 오늘 아주 기가 막힌 걸 배웠어.”
“음? 디공(디지털 공간 그래픽) 말하는 거야?”
“맞아.”
“뭐, 지난주에 작업하던 거 이어서 한 거겠지. 난 이미 저번 주에 과제 다 끝내 놨는데.”
“어리석은 코리안.”
“난 어리석지 않아.”
“그렇다면 빨리 이 제이든 님에게 무릎을 꿇어라.”
“어제 홈파티 한다더니, 피자를 잘못 먹고 체한 건 아니지?”
“넌 상상도 못 할, 기가 막힌 기능을 배웠다고.”
“그래?”
“그러니까, 궁금하면 얼른 무릎을…….”
“안 궁금해.”
“What?”
“다음 주에 교수님께 직접 물어보지 뭐.”
“크음…….”
“그럼 난 밥이나 먹으러 나가본다?”
“Wait! 잠깐!”
“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
“특별히 무릎을 꿇지 않아도 알려주도록 하지. 이 제이든 님이, 불쌍한 코리안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야.”
“…….”
어쨌든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이 흘러, 그렇게 보름이 지나 정해둔 날짜가 되었다.
그리고 우진은, 오전수업이 끝나자마자 천웅건설의 본사로 향했다.
* * *
“홍보관 오픈 일정이, 5월 20일로 잡혔어.”
“빠듯하네요.”
“엄살은. 너 수서에서 하던 대로 하면, 3주면 뒤집어쓰잖아?”
“그거야, 디자인이 미리 나와 있을 때 얘기죠.”
천웅건설 본사 건물의 25층.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는 접견실에서, 우진은 경완과 마주 앉아있었다.
“흐흐. 그렇지 않아도, 디자인팀 지난주부터 들들 볶았어.”
“갈아 넣었나 보네요.”
“뭐, 비슷하지. 거의 일주일 풀로 야근한 모양이니까.”
“어휴…….”
“여튼, 오늘 내로 디자인팀에서 메일 발송해 줄 거야.”
“알겠슴다.”
“이번에도, 믿어도 되지 서 대표?”
“대표라니, 좀 소름 돋긴 하네요. 여튼 실망시켜드릴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부장님.”
마케팅팀과의 미팅. 그리고 재무팀과의 의견 조율까지.
도급계약서에 법인 도장을 찍기까지, 우진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리 의견 조율이 어느 정도 되어 있던 상태인 데다, 우진이 전혀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시공단가를 한 번 정도는 올려칠 수도 있었는데, 천웅에서 제시한 금액 그대로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이다.
애초에 박경완이 신경 써 준 덕에 계약서 자체가 나쁘지 않기도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진이 조금 양보한 게 맞았다.
‘길게 봐야지. 길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많이 올 것이지만, 인지도를 키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특히 이렇게 구멍가게 수준의, 신생업체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앓는 소리 몇 번 하고 공사 평단가를 몇십 올릴 수도 있지만, 업체의 이미지가 더 중요한 시기라는 게 우진의 판단이었다.
“그럼, 착공은 5월 1일부터 가는 거지?”
“예, 부장님. 상황 봐서 그 전주에 자재 투입할 수도 있어요.”
“뭐, 4월부터 2층은 비어있으니까, 미리 얘기만 해. 조금 일찍 시작해도 상관없어.”
“흐흐, 감사합니다.”
해서 깔끔하게 도급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우진은, 기분 좋게 천웅건설 본사를 나섰다.
띠링-!
계약 완료를 알리는 문자메시지는, 덤이었고 말이다.
[Web발신]
[○○은행] 4/22 14:43
8391001**212
계약금
전자금융입금
35,250,000
잔액 70,142,275
보통 계약서상 계약금의 비율은, 10%정도가 표준이다.
때문에 우진이 받은 약 3500만 원의 계약금 또한 총공사비의 10%.
그러니까 우진이 이번에 따낸 계약의 총금액은, 3억5천 짜리라는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당장 필요한 자재 정돈 미리 주문해둘 수 있겠어.’
모형 외주비용으로 받은 3500만 원에 계약금까지 더해지니, 대략 7천만 원 정도의 잔액이 우진의 통장에 찍혔다.
제법 큰돈이지만, 우진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석현과 제이든에게 줘야 하는 인건비에, 곧 공사준비를 위한 자재비용까지 빠지고 나면.
잔액이 순식간에 다시 제로에 수렴할 것임을, 우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3억 5천 중에, 딱 5천만 남기자. 나머지는 진짜, 아낌없이 때려 박는 거야.’
디자인팀에서 보내올 설계도를 봐야 정확한 견적이 나오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미 우진의 머릿속에는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박경완으로부터 계약 얘기가 나온 이후.
청담 홍보관에 이미 여러 차례 들락거린 우진이었으니까.
‘진태 형도 이번 주 안으로는 답변 준댔고……. 슬슬 정리가 되어 가는데?’
버스에 오른 우진은, 구석 자리에 앉아 머릿속을 정리하였다.
지금 우진이 향하는 곳은 바로 송파구 문정동.
오늘은 천웅건설과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날임과 동시에, 두 달 전에 뿌려둔 씨앗을 수확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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