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도약
4월이 되었다.
정신없던 1학년 첫 학기가 무사히 끝나고, 본격적으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된 것이다.
그동안 우진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제법 많은 동기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학교 수업들도 최대한 착실히 수강하였다.
특히나 우진이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낸 과목은, ‘기초제도’와 ‘디지털 공간 그래픽’.
이것은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선 기초제도의 경우.
어쩌면 박준민 교수보다 도면을 많이 그려봤을지도 모르는 우진이었으니,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3D맥스를 활용한 3차원 모델링을 배우는, ‘디지털 공간 그래픽’ 과목의 경우에도.
모델링 프로그램 중 하나인 스케치업을 전문가 수준으로 공부했던 경험이 있었으니, 프로그램이 다를지언정 신입생들 중에서는 제일 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수업을 들으면서 우진이 느낀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3D 모델링에 소질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독학할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물론 모든 과목이 전부 이 수준으로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다루는 ‘비주얼 그래픽’ 과목은, 다른 신입생들과 다를 바 없이 끙끙거리며 배우고 있었으며.
전공 메인 과목 중 하나인 ‘공간조형’ 수업과 ‘공간 디자인학 개론’ 수업은, 열심히 해보려 해도 수업만 시작하면 졸음이 몰려왔으니 말이다.
실제로 쓰일법한 디자인과 조금 동떨어져 있는 이론 수업 내용들은, 우진에게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미래의 스타 디자이너라는 제이든도, 자신과 다를 것 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만족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훌륭해.’
적어도 회귀 후 가장 먼저 선택한 ‘대학’이라는 선택지가 옳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맥이나 대학 간판과 같은 부수적인 이득을 제외하고 ‘배움’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놓고 보더라도.
K대 디자인학부는, 충분히 우진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서 우진은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도 기초제도 수업을 마친 후 칠판에 걸린 우수도면이 우진의 것이라는 점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우진의 옆자리에서 함께 수업을 들은 소연은, 우진과 자신의 도면을 비교하며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와, 오빠는 어디서 손 도면만 치다가 온 거 아니지?”
“현장 알바 좀 했었다니까.”
혜진이 끼어들며 말했다.
“분명히 그 알바, 손으로 도면 베끼는 알바였을거야.”
우진은 적당히 동조해 줬다.
“뭐, 비슷해.”
“우우……. 반칙이야 이건.”
소연의 말에, 혜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니 말이 맞아. 반칙쟁이.”
“…….”
갑자기 끼어든 혜진을 슬쩍 보며, 우진은 실소를 흘렸다.
요즘 혜진은, 전반적으로 텐션이 넘치는 상태였다.
원래도 발랄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였지만, 최근 들어 기분이 더욱더 좋아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고, 그것은 바로 혜진의 솔로 탈출이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바로 사귀어버릴 줄은 몰랐지.’
소개팅 노래를 부르던 혜진이 결국 성관과 사귀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작 우진은 성관이 전역한 뒤로 아직 바빠서 만난 적이 없었는데.
소개를 먼저 받은 두 사람은, 이미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어이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우진은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흐음, 둘 다 괜찮은 친구들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지금은 연애보다, 일이 더 재밌는 시기였으니까.
‘모형작업 마감 맞춘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만약 연애라도 미리 시작했으면 며칠 만나지도 못하고 차였을 거야.’
실없는 생각을 한 우진은, 실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제도판을 접으며 소연을 향해 말했다.
“우린 본관에 군것질이나 하러 가자, 소연아. 쟨 분명히 또 연애한다고 사라질 거야.”
우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소연이, 혜진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맞아, 커플은 어서 신성한 강의실 밖으로 꺼져랏.”
비난의 타겟이 순식간에 우진에서 혜진으로 넘어갔지만, 혜진은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꺼지라는 말에도,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는 혜진이었다.
“배 아프면 둘도 연애하던가.”
“우리?”
뭔가 혜진의 말을 살짝 잘못 이해한 소연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고.
그 표정을 못 본 우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야, 됐고. 성관이 형이나 학교 한번 오라고 해. 밥이라도 맛있는 거 얻어먹으려니까.”
“우리 오빠, 전역하자마자 뒤늦게 복학해서 바쁘거든?”
“헐, 우리 오빠래. 소름…….”
“큼, 큼.”
혼자 상황을 잘못 이해했음을 깨달은 소연은,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망할 때는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배고파. 컵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빠.”
“그러지 뭐.”
세 사람은 동시에 일어서, 강의실을 나섰다.
* * *
디자인학부 건물을 나서 교정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리고 이맘때쯤의 새내기들에게 빠질 수 없는 주제인 미팅.
그것은 소연과 혜진에게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혜진아.”
“왜, 언니.”
“우리 다음 주에 미팅 잡혀있던 거, 무슨 요일이었지?”
소연의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은 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아마 화요일? 잘 기억 안 나네. 어차피 난 못 나가게 되어서. 헤헤.”
끝까지 염장을 지르는 혜진의 대사에, 소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하였다.
“나도 곧 생길 거니까, 두고 봐.”
“미팅 나가서 만들어 오시게?”
“몰……라. 가능하다면?”
소연의 말을 듣던 우진과 혜진이, 동시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커플이 부럽다는 듯 말하는 소연의 이야기들이,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기로만 따지자면. 여기 세 사람 중, 가장 우월한 것이 바로 소연이었으니까.
“언니는, 눈만 좀 낮춰 봐. 본인이 다 차 놓고 왜 맨날 커플 타령이셔?”
“내, 내가 언제!”
“지난주에 슬비랑 인영이한테 다 들었어. 미팅에서 둘이나 언니 번호 달라고 해서 가져갔다던데.”
“…….”
처음 우진이 오티에서 소연을 만났을 때 느꼈듯, 그녀는 디자인학부 전체에서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예뻤다.
그리고 우진의 눈은 제법 보편타당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연이 인기가 많은 것은, 학기 초부터 공공연한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형이 뭔데? 내가 찾아준다니까. 언니 사진만 오픈해 주면, 내가 연예인 빼고는 다 물어올 수 있어. 아, 잘하면 연예인도 가능할지도…….”
우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혜진과 소연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사실 그도 소연의 이상형이 뭔지, 조금은 궁금했으니 말이다.
뒷머리를 긁적인 소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나……. 눈 높지 않아. 재밌고, 좀 친절하고, 키도 좀 큰……?”
그 대답을 들은 혜진이 어이없는 표정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말이다.
“뭐? 하……. 차라리 아이돌같이 잘생긴 애를 데려다 달라고 해. 그게 더 쉽겠다.”
우진도 소심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재밌고 친절하고 키 큰 남자면, 나도 가능한 거 아냐? 아니, 난데?”
소연 대신, 혜진이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아니고.”
“…….”
우진과 몇 마디 더 투닥거리던 혜진은, 곧 두 사람을 남겨두고 후다닥 사라졌다.
남자친구 성관의 수업이 끝나기 전에 미리 가 있어야 한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물론 우진과 소연도 그리 오래 함께하진 않았다.
스낵바에서 일이십 분 정도 더 잡담을 나눈 뒤, 두 사람 또한 각자의 일정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진은 작업실로 나가는 길에, 문과대학 건물 앞으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철학가 한소연, 파이팅.”
“죽는다?”
“오늘은 철학적으로다가 한번, 연애심리에 대해서 좀 고찰해 보도록 해.”
“무슨 연애심리.”
“왜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을까. 혹시 날 좋아한다는 남자는 괜히 싫어지고 그런……. 어떤 불치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이런 고찰 말이야.”
“시끄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마지막까지 소연을 놀린 우진은, 실실 웃으며 학교 후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당황해서 양쪽 볼이 빨개지는 소연의 표정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흐으, 그나저나 이제 오늘이……. 드디어 결전의 날인 건가?”
우진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한 번 확인하였다.
지금 시각은 대략 3시 55분.
박경완 부장과의 약속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 * *
천웅건설의 영업부장 오주형은, 최근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해외 출장 일정 때문에 지난 한 달 동안 무려 다섯 개 국가를 돌아다녔으며.
오늘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브랜드 런칭 회의 때문에 곧바로 회사에 달려와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가 집에 가서 쉬겠다고 한다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웅건설이 출장 복귀 날까지 출근을 강제하는 몰인정한 회사는 아니었고.
회의가 아니라면 오늘 딱히 다른 일정이 잡혀있는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형은 회사에 나와야 했다.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의 실적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프리미엄 브랜드 런칭 회의에 빠지면…….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수도 있으니까.’
회의에 빠진다고 해서 임원들에게 찍히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회의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갈 것이 분명했고.
그 자리에 자신이 없다면, 영업부가 가장 불리한 방향으로 회의가 진행될 확률이 높았다.
브랜드 런칭 결과가 좋다면 모든 공(功)은 영업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에서 나눠갈 것이었고.
반대로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서가 모든 과(過)를 뒤집어쓰게 될 테니 말이다.
‘흐우, 회의만 딱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퇴근해서 푹 쉬자. 어차피 출장 보고는 다음 주고……. 내일은 연차니까.’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오주형은, 잰걸음으로 회의실을 향해 움직였다.
회의시간까지는 아직 5분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조금 미리 도착해서 물도 한 잔 마시고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회의실에 도착한 주형은, 자신의 자리에 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기이한 광경에 정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음? 다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회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단상 앞에 모여, 웅성이며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하도 빼곡하게 모여 있었기에, 대체 뭘 구경 중인지도 한눈에 알 수 없는 상황.
‘출장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상황이 궁금해진 주형은, 회의실 안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단상이 아니었다.
주형이 걸음을 옮긴 곳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박경완의 앞이었으니까.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