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2화 (22/315)

22화

제이든 테일러(Jayden Taylor)

수요일, 목요일. 그렇게 주말까지.

우진의 대학 생활 첫 주는,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목요일은 공간 조형 수업 하나밖에 없었고, 금요일은 공강 이어서인지.

거의 모형작업만 하다가 첫 주가 훌쩍 지나간 것이다.

동기들은 저녁마다 한 잔씩 하며 친분을 다지고, 과팅, 미팅도 잡아가며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우진에게 그런 것은 딱히 부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십 대를 두 번째 보내는 우진에겐, 이 젊음의 시간 하루하루가 너무도 소중했으니 말이다.

‘지름길을 아는데 가지 않는 건……. 회귀자로서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야.’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맨바닥 위에서 어떻게든 빠르게 기반을 만들자면, 미래를 아는 그라 할지라도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가 계획한 대로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인생이 생각대로 흘러간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은 몰랐지.’

하지만 모든 것을 계획대로 잘 컨트롤하고 있는 우진에게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미제(未濟)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회귀하면서 생긴 기이한 능력.

회귀로 인해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있었지만, 정작 회귀와 함께 얻은 능력은 아직 우진이 컨트롤 가능한 영역의 밖에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디자인의 밤에서 그 능력을 사용한 뒤로, 아직 단 한 번도 황금빛 실루엣을 본 적이 없었다.

일부러 건축도면을 찾아보고, 백지 위에 그것을 끄적여 봐도.

그 황금빛 실루엣은, 우진의 눈앞에 나타나질 않았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 능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물론 우진은 그 신기한 능력 없이도, 하고자 하는 일들을 착실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우진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 능력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된다면, 그의 궁극적인 목표인 ‘세계적인 건축가’에 훨씬 빠르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임을 말이다.

그러나 집착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회귀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얻었으며, 그 이능력(異能力)에 집착하는 순간 그 안에 매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으니까.

‘열심히 살다 보면, 다시 기회가 오겠지.’

하여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털어낸 우진은, 석현과 함께 미친 듯이 모형작업에 몰두하였다.

두 사람이 모형에 몰두한 것은, 단순히 일을 따내기 위한 수준을 넘어섰다.

이 자체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 것처럼, 할 수 있는 모든 열정을 모형에 쏟아부은 것이다.

재밌는 것은, 석현의 열정이 우진 못지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제 슬슬 완성이 보이는데?”

우진의 이야기에, 석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진아.”

“엉?”

“원래 모형작업에는,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실제로 지어질 아파트의 모든 디테일을 모형에 집어넣을 수 있겠어?”

“스케일이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해 미친놈아.”

“그래서 끝이 없는 거야.”

“……?”

“데드라인이 올 때까지, 쪼갤 수 있는 건 계속 쪼개야지.”

가령 ‘창틀’을 모형으로 만든다고 했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네모난 프레임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모형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창틀 안에 창문이 끼워질 홈까지도 고려하여 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석현처럼 변태적인 디테일 덕후라면.

창문이 열리고 닫히는 매커니즘과 창틀이 붙을 위치의 구조까지도 치밀하게 고려하여 모형을 설계한다.

그 모든 세심함이 모여 시너지를 내기 시작하면, 모형의 퀄리티가 차원이 다르게 올라가니 말이다.

“세상에 완벽히 뾰족한 모서리는 없다, 우진아.”

“뭐?”

“꺾이는 모서리 안에도, 세밀하게 면 분할이 이뤄진다는 거야.”

“…….”

“모서리에 퍼티 살짝 발라서, 사포로 한 번씩만 문지르자.”

퍼티(Putty)는 공사판에서 ‘빠데’ 라고 부르는 화학 재료다.

마치 밀가루 반죽 같은 질감과 색상을 가진 이 재료는, 보통 현장에서 유리창 틀을 붙이거나 철관을 잇는 데 쓴다.

석고벽을 도색하기 전, 패여 있는 홈을 메우는 데 쓰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장뿐 아니라 모형 제작에도 무척 유용하게 쓰는 게 이 퍼티인데.

이것을 발라놓고 굳힌 다음에 사포질을 미친 듯이 하면, 마치 금속처럼 반짝반짝 광이 나게 된다.

지금 석현이 하자는 작업이 바로 이것.

그리고 퍼티 사포질이 얼마나 지옥 같은 노가다인지 알고 있는 우진은, 저도 모르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다……. 하자고……?”

“해 놓고 보면 진짜 실사 느낌 나오기 시작할 거야.”

“후……. 그래, 하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에 제대로 한 번 보여주지 뭐.”

우진은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석현을 영입한 이유가, 이런 변태적인 퀄리티를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작업 일정이 많이 당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말 내내 두 사람은 작업을 쉴 수 없었고.

그렇게 우진의 작업실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이제는 진짜 마무리해도 되겠지?”

“좋아. 이 정도면 훌륭해.”

완성된 건축모형 앞에서, 우진과 석현은 뿌듯한 모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광각렌즈로 촬영하여 뒤에 그럴싸한 배경이라도 합성하면.

얼핏 사진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미친 퀄리티가 나온 것이다.

이미 일을 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전생에서 수많은 모형작업을 했던 우진조차도, 이보다 나은 건축모형을 납품했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후, 하얗게 태웠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걱정은, 다른 부분에서 생겼다.

샘플 모형을 본 박경완의 눈이 높아져서, 모형 전체의 퀄리티를 이 정도 수준으로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젠장…….’

물론 퀄리티는 최대한 유지하여 모든 작업을 진행할 생각이다.

하지만 모형의 퀄리티만큼, 최대한의 대가를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우진이었다.

‘박 부장님 앞에서 입을 또 열심히 털어봐야겠군.’

마감 작업까지 완벽히 끝낸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모형 안에 준비해 둔 LED조명을 심었다.

창마다 하얗게 불이 들어오도록, 꼼꼼하게 전선 작업까지 끝낸 것이다.

딸깍-

어두운 방 안에서 조명 스위치를 켜자, 정말 어둠 속에 서 있는 야경 속의 건축물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두 사람의 모형.

우진은 모형을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동봉한 뒤, 조심스레 박스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번아웃 이라도 온 것인지, 멍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던 석현을 향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고깃집에서 너 꼬실 때, 한 달에 백 정도는 벌 수 있다고 했었나?”

석현이 발끈하며 대답했다.

“줄이지 마, 인마. 백 오십이야.”

우진은 웃었다.

백 오십?

일주일간 갈아 넣은 두 사람의 열정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이미 그 액수는 한참 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진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딱……. 그 세배 가져갈 수 있게 해줄게, 석구.”

“……!”

“열심히 만들었으니, 일한 만큼 돈은 확실히 받아내야지.”

우진은 자신 있었다.

이제 다시 협상의 시간이었다.

* * *

여느 때처럼 현장업무를 마친 박경완은, 여유롭게 차를 운전하여 본사로 복귀하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채 통화하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아, 그렇습니까, 반장님. 그럼 이제 철거는 어느 정도 끝나 가는 거죠?”

“이번 주에 분양승인은 떨어질 거라고 들었습니다.”

“예. 고분양가라는 말이 있기는 한데, 일단 HUG에서 승인은 내줬으니까요.”

“암요, 이달 안으론 삽 떠야죠.”

박경완의 기분이 좋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이번에 따낸 아현 3-2구역의 철거 진행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있었으며.

수서 현장 시공 때와 달리, 건축주와의 소통도 무척이나 원활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경완의 기분이 조금 들떠있는 이유는,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늘은 지난 일주일과 달리, 그의 하루에 흥미로운 일정이 하나 포함되어있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후후. 꼬마 녀석이 괜찮은 물건을 가져오려나?’

최근 그의 무료했던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디서 튀어나온 지 모를 우진이라는 꼬마였다.

항상 내일이 예상 가능한 쳇바퀴 같은 삶을 사는 직장인들에게, 의외성이란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경완은 이미 우진에 대한 예측이나 판단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우진이 평범한 모형을 가져올 수도 있고, 진짜 제대로 된 퀄리티의 모형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그가 어떤 결과물을 가져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뭐. 스물둘에 목공을 그렇게 잘 치는 놈인데. 모형 좀 잘 만든다고 이상할 건 없지.’

끼이익-

회사 주차장에 능숙하게 차를 주차한 경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주머니에서 꺼내 본 휴대폰에는, 꼬마 녀석의 문자도 한 통 와 있었다.

[애늙은이 : 부장님, 저 도착했습니다. 커피 한 잔 시켜놓을게요.]

우진의 문자를 본 경완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애늙은이’라는 단어에, 이 정도로 어울리는 캐릭터는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자, 그럼 요놈이 어떤 물건을 가져왔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띵-!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로비와 이어진 널찍한 커피숍이 경완의 시야에 들어왔다.

우진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인, 회사 건물에서 가장 큰 카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경완은, 어렵지 않게 우진을 찾을 수 있었다.

* * *

포맥스를 깔끔하게 이어 붙여 만든 하얀 케이스를 들어 올리자, 그 안에 꼭 맞게 담겨 있던 투명한 아크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문 하나 묻지 않은 완벽히 투명한 아크릴 안에, 우뚝 솟아있는 아파트 한 채.

10cm 정도 높이의 바닥판 위에는 단풍색 조경이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조경 안으로 펼쳐진 황토빛 도보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필로티로 설계된 아파트 1층의 구조가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짙은 회갈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고급스런 필로티와 현관의 모습.

그리고 그 위로 솟아오른 하얗고 깔끔한 아파트의 외벽.

총 25층으로 설계된 아파트의 외관은 디자인된 모습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관계자가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구조물들마저 제 위치에 정확히 들어앉아 있었다.

조금 과장을 섞어 표현한다면.

극사실주의(Hyper Realism) 작품으로 미술관에 전시해도 좋을 정도의 미친 퀄리티를 자랑하는 건축모형.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박경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만큼은 이 미친 꼬마가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이건 그가 상상했던 건축모형의 퀄리티를 아득하게 초월한 수준이었으니까.

‘이 미친놈은……. 모델하우스에 무슨 작품 모형이라도 세울 생각인 건가?’

사실 건설사들은, 이제까지 모델하우스에 세울 건축모형에 생각보다 공을 들이지 않았다.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보러온 사람들의 관심사는 보통 실제 스케일로 시공된 모델하우스 내부의 모습이었지.

모형으로 만들어진 외관의 중요도는,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경완이 기대했던 모형의 퀄리티도. 모델하우스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히 프로패셔널한 건축모형 정도.

하지만 우진의 모형을 본 순간,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만약 이 정도 퀄리티로 단지 전체를 뽑아낼 수 있다면.

분양 홍보 전단지부터 시작해서 모델하우스의 로비에까지, 훨씬 더 적극적으로 건축모형을 활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많은 건축모형을 봐왔던 자신이 이렇게 멍한 표정으로 모형을 구경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모델하우스에 찾아온 일반 고객들의 눈에는, 얼마나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까?

‘인정하긴 싫지만……. 무조건 이놈에게 일을 줘야 해.’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경완이, 우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우진과 눈이 마주친 경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방비상태로 건축모형과 마주한 순간, 이 애늙은이와의 협상은 이미 졌다는 것을 말이다.

“젠장.”

경완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식에, 우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부장님.”

우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경완의 입에서 씹어뱉듯 튀어나온 저 탄식이, 뭘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얼마가 필요한데?”

“네?”

“얼마면 나머지도 이렇게 뽑아올 수 있냐고, 이 미친 꼬마 놈아.”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긴 경완의 웃음과 성취감으로 인한 우진의 웃음.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둘 모두가 기분 좋은 웃음이라는 사실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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