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제이든 테일러(Jayden Taylor)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술자들이 모여 있는 복마전 같은 곳이 바로 을지로다.
을지로의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치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업계에서 오래 굴러다닌 우진은 을지로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렵지 않게 이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을지로 업자들 중에는, 황씨 아저씨가 제일이지.”
을지로 황씨 아저씨는,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업체를 가리키는 상호명이었다.
레이저커팅부터 시작해서 CNC, 목공, 판금 등.
십수 년이 넘게 을지로에 자리를 잡고, 각종 자재를 가공하는 일을 하는 제법 큰 업체였다.
이곳과 전생에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은 많이 맡겨 본 적 있었고.
해서 우진은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걸음 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곳에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석구, 옆에 가만히 있어야 돼.”
“내가 진짜 무슨 애완견이냐. 가만히 있으라는 얘길 하게.”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당황하지 말고 표정 관리하란 얘기야.”
“음……?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암튼 알겠지? 이너피쓰.”
“뭐……. 일단 알겠어.”
레이저커팅을 위한 도면과 모형지를 사온 석현을 이끌고, 우진은 을지로 골목길로 자연스레 들어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마치 제 앞마당처럼 걸어가는 우진.
그렇게 십오 분 정도를 걸었을까?
우진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네.’
좁다란 골목 끝에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꽤나 넓은 부지에 지어진 대규모의 컨테이너 공장.
이곳에 수십 번도 넘게 와본 우진은, 능숙하게 어딘가를 찾아 움직였다.
“야, 그런데 여기서 레이저커팅 할 수 있는 거 맞아?”
“그렇다니까.”
“근데 무슨 상호명이 달려 있지도 않고, 손님이 왔는데 응대하는 사람도 안 보여?”
“원래 그런 곳이야.”
“……?”
의문스러운 표정을 한 석현을 무시한 채, 우진은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런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김진영 실장님, 안 계십니까?”
“엇, 누구시죠?”
“WJ 스튜디오에서 나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WJ 스튜디오는, 우진이 만든 법인사업자의 상호명이다.
때문에 당연히 그 상호에 대해, 이곳 직원들이 알 리는 없었다.
해서 고개를 갸웃한 여직원은, 우진이 이야기한 김진영 실장을 찾으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너, 여기 원래 아는 곳이야?”
“아니까 왔지. 조용히 좀 해봐.”
이곳 <을지로 황씨 아저씨>는, 사실 개인을 상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
대형 업체들의 대규모 외주를 베이스로 일을 받기 때문에, 개인이나 학생들이 가져오는 일은 원래 받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진이 아무 준비 없이 와서 도면을 내밀었다면, 그대로 축객령을 받았을 터.
이곳에 일을 맡기기 위해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란, 바로 이것을 말함이었다.
하지만 우진에게는 일을 맡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뭐, 약간의 거짓말 정도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일단 김진영 실장은 있는 것 같으니……. 좀 얘기하기 편하겠어.’
우진과 석현이 잠깐 기다리는 사이, 사무실 안쪽에서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는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우진을 향해 명함을 건네었다.
“김진영 팀장입니다. 절 찾으셨다고…….”
“아, 반갑습니다. WJ 스튜디오에서 나온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김진영의 말을 들은 서우진은, 잠깐 당황하여 말실수를 할 뻔했다.
그가 알던 김진영은 처음부터 실장이었기에 당연히 ‘김진영 실장’을 찾은 것이었는데.
시대적 차이가 꽤나 나다 보니, 김진영의 직책이 우진이 알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저쪽에서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
우진은 자신이 당황한 것을 들키기 전에, 재빨리 다음 얘기를 꺼내었다.
“이번에 저희 업체에서, 천웅건설 쪽 외주를 좀 맡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우진의 나이가 어려서인지, 김진영은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은 우진은, 미리 준비해 뒀던 말을 술술 잇기 시작하였다.
본인이 대표이면서, 따로 대표가 있는 양 가상의 인물까지 만들어 가며 말이다.
“저는 대표님께 심부름을 온 거라, 그냥 전해 받았을 뿐인데……. 아마 천웅건설 쪽에서 알려주신 것 같더라고요.”
“아하, 그렇군요.”
우진의 변명은 제법 적절했다.
천웅건설은 이곳 <을지로 황씨 아저씨>와 꽤 오래 거래해 온 우량 고객이었고.
김진영 실장 또한 천웅건설과 여러 번 일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해서 김진영의 목소리에선 의심이 어느 정도 걷혀 나갔고.
그에 우진은, 곧바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이번에 아마 아현동 3-2구역 모하부터 작업 들어갈 것 같은데, 샘플 작업 맡겨보러 왔습니다.”
“샘플이요?”
“대표님께서 아무래도 처음 이런 외주를 맡기시다 보니, 샘플 작업 먼저 해보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김진영의 눈에 다시 의심이 떠올랐다.
샘플 작업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을지로 황씨 아저씨>는 업계에서 워낙 유명했고.
때문에 보통 샘플 작업을 생략하고, 대량 발주를 한 번에 넣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다만 우진으로서는 처음부터 대량 발주를 넣을 수 있는 일감과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샘플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으니.
김진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우진의 이야기는, 당연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변명도 이미 생각해 뒀으니까.
“저희 업체가 원래 인테리어 쪽에 가깝습니다. 모형 외주는 사실 이번이 처음이고요. 해서 이렇게 레이저커팅 외주를 넣는 것도…….”
우진의 변명에는 두 가지 어필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첫째.
이렇게 샘플 작업을 먼저 요청하는 것은, <을지로 황씨 아저씨>의 품질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레이저커팅 외주가 처음이어서이다.
둘째.
외주가 처음인 이유는, 신생업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업종에서 넘어와서 그렇다.
그리고 이런 우진의 어필이 잘 전달된 것인지, 이야기를 듣던 김진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결국 우진의 말이 충분히 그럴싸했으니까.
“아, 그러셨군요. 뭐, 좋습니다. 샘플 작업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김진영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우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씨 아저씨 말고 다른 업체도 많았지만, 이곳의 품질이 가장 좋고 대량 작업만 고수하다 보니 단가도 가장 쌌던 것이다.
그리고 우진은 마지막으로, 김진영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샘플 양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대금은 지불 하겠습니다.”
본래 샘플 작업은 돈을 받지 않는다.
사실 샘플 작업이라는 게, 거래처에 대량의 발주를 넣기 전 품질 테스트를 해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금을 지불한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업체에 대한 존중을 보여줬다.
‘일이십 정도로 업체의 신뢰를 살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딜이지.’
너희 실력을 테스트하고자 샘플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는, 확실한 어필을 한 것이다.
“하하, 그러실 필요 없는데…….”
“아닙니다, 팀장님. 커팅비 계산해서 영수증 끊어 주시면, 가는 길에 입금해드리겠습니다.”
굳이 대금을 지불하겠다는 우진의 마지막 말에, 완전히 의심을 내려놓은 김진영.
“뭐, 알겠습니다. 도면 파일은 어디 있습니까?”
하여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은 우진은, 도면을 담아온 USB와 커팅 재료를 김진영에게 건네었다.
“여기 있습니다. 파일 열어보시면, 어떻게 작업해야 할지 보이실 겁니다.”
우진에게 물건을 받아 든 김진영은, 곧바로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진과 석현이 잠시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진영은 고작 40분 만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다시 나왔다.
“이야, 엄청 빠른데요?”
진심으로 놀란 듯한 우진의 이야기에, 진영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워낙 작업하기 편하게 깔끔한 파일을 주셔서……. 하핫. 처음 일 트는 업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샘플이 대표님 마음에 드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마음에 드시겠지요. 을지로에서 제일 유명한 곳인걸요.”
만면에 자본주의의 미소를 띈 우진은, 기분 좋게 대금까지 지불한 뒤 <을지로 황씨 아저씨>를 나왔다.
물론 오늘 튼 거래처를 잘 유지하려면 이번 아현동 모델하우스 일을 무조건 따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커팅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된 이상,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됐다. 이제 조립만 깔끔하게 잘해서, 도색하면 끝이네.”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던 석현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 되어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너 대체 군대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뭐가.”
“이거 진짜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
“흐흐. 형이야, 인마.”
“근데 그렇게……. 막 거짓말해도 되는 거냐?”
“거짓말이 아니게 만들면 되지.”
일이 잘 풀린 덕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우진은, 그 길로 석현과 함께 자신의 작업실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됐다……!”
“워후.”
두 사람은 처음 세웠던 계획보다 이틀이나 빠르게, 화이트 모델링(White Modeling)단계까지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 * *
우진의 시간표 중, 가장 빡빡한 일정이 짜여있는 날이 바로 수요일이다.
그가 동경하는 인물인 조운찬 교수의 ‘디지털 공간 그래픽’ 과목과 함께, 어제 극적으로 수강 신청에 성공한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수업이 수요일에 같이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고작 두 과목을 빡빡하다 하는 것이 다른 대학생들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진에게 수업이 두 과목 이상 있는 날은, 수요일 하루뿐 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요일이, 오늘은 엄청 스무스하게 지나갔다.
“다들 조용!”
“뭔데?”
“인하 쟤 왜 갑자기 무게 잡아?”
“무슨 일 있나?”
디지털 공간 그래픽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과실에 나타난 과대 김인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희소식을 전했으니 말이다.
“조운찬 교수님, 내일까지 해외 세미나 가셨대.”
“……!”
“우왓!”
“이번 주 휴강이다! 다들 자유를 만끽하도록!”
“우와아!!”
‘휴강’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해본 새내기들은, 신이 나서 과실에서 방방 뛰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던 수업인 조운찬 교수의 수업이 휴강 된 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그의 머릿속엔 모형작업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첫 수업부터 휴강이라니……. 좋아해도 되는 거겠지?’
하지만 이 순수한 신입생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원래 수강 변경 기간의 출석은, 따로 체크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개강 첫 주의 수업은 전부 빠져도 딱히 학점에 영향이 없다는 것.
그것을 알았더라면, 과실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인가…….’
시간표를 확인한 우진은 잠시 고뇌에 빠졌다.
전공 수업이 펑크 남으로 인해, 다음 수업까지 무려 네 시간이라는 긴 공강이 생긴 것.
그리고 우진과 같은 상황에 처한 영국산 악마 한 놈이, 그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헤이, 우진 형. 오늘 클래스, run 할까?”
“음……. 째자고?”
“째자고? 그게 뭐지?”
“그러니까, 빠지자고?”
“나이스. That’s right.”
본래 수업을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유혹 중 하나가, 뜻밖에 생긴 전 수업의 휴강이다.
이렇게 몇 시간 후에 수업 한 개가 남아있으면.
그걸 하나 빠지는 순간 시간을 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하면서, 본능적으로 자기합리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악마 한 놈이 옆에서 유혹하기 시작한다면…….
우진도 별수 없었다.
“좋아, 제이든. 어쩔 수 없겠어. 수업은 다음 주부터 같이 듣자고. 이건……. 그러니까 불가항력이야.”
“풀가……항력?”
“음……. Uncontrollable. 이라고.”
짧은 영어로 어떻게든 아는 단어를 끄집어내어, 불가항력이라는 말을 설명한 우진.
하지만 제이든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격렬했다.
“오우, Bloody Hell! 역시 말이 통하는 횽이야.”
“피? 지옥? 뭔 소리야.”
“행복하단 뜻이야.”
“…….”
정말 미래의 스타 디자이너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제이든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일단 자체휴강을 마음속으로 정하고 나자, 우진의 걸음은 어느새 강의실을 나서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색작업이나 하러 가야지.’
이미 머릿속은 온통, 어제 만들어놓은 건축모형으로 가 있는 우진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