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제이든 테일러(Jayden Taylor)
같은 학번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제이든을 방금 처음 봤다.
그는 오티에 오지 않았으며, 전공 수업은 우진과 다른 A반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오늘 전공 수업의 경우 A, B반 구분 없이 모든 신입생이 함께 듣도록 되어있는 ‘비주얼 그래픽’ 수업이었기에.
같은 시간대에 과실에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진이 제이든과 초면인 것과 별개로, 선빈은 그와 안면이 있었다.
우진이 얼굴만 비추고 사라졌던 입학식 날. 제이든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바로 선빈이었으니까.
“여기가 1학년 과실 맞아, 제이든.”
“오우, 잘 찾아왔군.”
제이든은 영국사람이었지만, 한국말을 수준급으로 잘했다.
그는 아버지가 영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국인과 영국인의 피가 아주 아름답게 섞인 덕에, 그는 무척이나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키도 선빈만큼이나 길쭉하게 커서, 멀리서 보면 모델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제이든을 처음 본 우진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난 서우진이야. 네가 제이든이구나?”
“오, 우진! 선빈에게 들었어.”
“으음……. 뭐를?”
“네가 마들링(Modeling) 마스터라면서?”
“뭐? 뭔, 마스터?”
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선빈을 쳐다봤고,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사실 선빈이 제이든에게 얘기했던 것은, 우진이 건축모형을 정말 잘 만든다는 정도였는데.
제이든이 조금 과장되게 표현했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당황하는 우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제이든이, 슬쩍 한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Nice to meet you, bro.”
“나이스 투 미츄 투.”
우진은 제이든이 내민 손을 맞잡고 기분 좋게 웃었다.
우진이 싫어하는 것은 영어였지 영국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쾌활하고 잘생긴 제이든의 첫인상은 호감형에 가까웠다.
제이든은 예상보다 더 수다쟁이였지만, 제법 재밌는 친구였던 것이다.
“그럼 우진은, 나보다 두 살 많으니까 횽인가?”
“횽 아니고 형.”
“오케이. 횽.”
“…….”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진은 제이든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진의 교양수업에 대한, 그의 뜻밖의 관심으로 인해.
막막하기만 했던 수강 신청의 길에 구원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우진 형, 너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들을 거야?”
“형을 하던 너를 하던 하나만 하자, 제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우진.”
“그럼?”
“그 교양수업을, 내가 신청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오……? 진짜?”
제이든의 이야기에, 우진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말 잘하는 영국인과 함께라면, 원어 수업을 한다고 한들 해볼 만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패스 올 논 패스 수업이야. 이거 진짜 꿀일 수도 있겠는데?’
사실상 언어의 장벽만 아니라면.
혜진이 수강 신청에 성공한 ‘인문학 독서’와 비교해도, 나쁠 게 없는 수업인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이렇게 훌륭한 통역사가 함께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수업인 것이다.
“좋아. 바로 간다!”
제이든과 대화하는 동안에도 마우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우진은 재빨리 수강 신청 페이지를 열어 새로운 교양과목을 시간표에 담았고.
띠링-!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강의를 수강 신청하셨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진이 수강 신청에 성공한 순간,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수업은 빨간 불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선빈이, 조금은 부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히야, 이 형. 완전히 계 탔네?”
“후후. 인생은 타이밍이지.”
선빈 또한 혜진처럼 수강신청에 성공한 상황이었지만.
제이든도 이 수업을 듣는 줄 알았다면, 한 과목 정도는 바꾸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이제 나머지 2학점은 어쩔 거야?”
“그거야……. 또 차근차근 찾아봐야지 뭐.”
우진은 고개를 들어 잠깐 시계를 보았다.
이제 전공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이십 분 정도.
‘한 과목 세이브 했으니,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올까?’
어제도 늦게 잔 탓에 정신이 살짝 몽롱한 상태였고.
오늘 수업에서는 졸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우진은 카페인을 찾게 되었다.
게다가 두 녀석 덕에 괜찮은 교양 하나를 건지기도 했으니…….
“선빈, 제이든. 수업 시작 전에 본관 가서 커피나 마시고 올래? 형이 한 잔 사줄게.”
커피 한 잔씩 정도는 동생들에게 사줄 용의가 있는 우진이었다.
“좋지.”
“Treat me? 나이스.”
그렇게 우진은 두 멀대를 데리고, 본관 1층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 * *
비주얼 그래픽은, 기초 제도와 마찬가지로 공간디자인과 신입생들의 필수 전공 수업 중 하나였다.
디자인학도라면 어떤 분야가 됐든 필수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툴인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 툴을 배우는 수업이, 바로 이 비주얼 그래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전공수업과 비교하면 과목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사실이었고, 특별히 뛰어난 경력이 있어야 가르칠 수 있는 과목도 아니었기에.
이 비주얼 그래픽 과목을 맡은 교수는, 올해 처음 공간디자인과에서 강의하게 된 삼십 대 초반의 시간강사 이아랑이었다.
하지만 다른 전공 수업에 비해 가볍다 해서, 아무 시간강사나 전공 수업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아랑은 시간강사이기 이전에 K대 공간디자인과 출신의 선배였고.
곧 조교수 타이틀 정도는 달게 될, 유망한 인재였다.
“햐, 학교 오랜만이네.”
차 문을 닫고 내린 이아랑은, 오랜만에 밟은 교정을 둘러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그녀가 이곳에서 졸업장을 받은 지도 벌써 9년.
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학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오늘부터 내가……. 새내기 후배님들을 가르치게 된단 말이지?’
이아랑은 97학번이었고, 올해 신입생들의 학번은 10학번이다.
학번으로 13년이나 차이나지만, 그래도 아직 교수님이라는 호칭보다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이아랑이었다.
또각또각-
설레는 기분으로 디자인학부 건물에 들어선 이아랑은, 강의실로 향하는 도중 아는 얼굴도 마주칠 수 있었다.
“이야, 이게 대체 누구야. 김윤호 아냐?”
“오늘 수업하러 오신 거죠, 선배?”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이 화석을 누가 반겨준다고 여기까지 왔겠어.”
“하아……. 선배. 저도 이제 화석이에요. 그런 슬픈 얘기 하지마요.”
현재 학과사무실의 조교로 일하고 있는 김윤호는 03학번이었고, 그가 신입생일 때 같은 자리에서 일하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아랑이었다.
해서 제법 반갑게 아랑과 인사를 나눈 윤호는, 그녀에게 강의실을 안내해 주었다.
“저쪽 복도 끝으로 가시면 돼요, 선배. 제일 넓은 컴실이요.”
“오케이, 고마워 윤호. 있다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네, 선배. 있다 뵐게요!”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기분 좋게 인사까지 나눈 이아랑은, 살짝 올라왔던 긴장을 털어내고 강의실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 * *
카페에서 커피까지 한 잔 사 온 우진의 수업 태도는, 기초 제도 때와 완전히 달랐다.
기초 제도 수업 때 너무 졸아서 죄책감이 조금 든 탓도 있었지만, 당연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거의 다 아는 내용을 배우는 기초 제도와 달리 비주얼 그래픽 수업은, 우진이 예전부터 잘 다루고 싶어 했던 툴들을 가르치는 수업이었으니 말이다.
‘포샵이랑 일러는, 배울 수 있을 때 잘 배워놔야 해.’
삼차원 공간에 건축물을 세워야 하는 건축디자이너라 해서, 2D 디자인 툴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무리 유명 디자이너라도 설계를 픽스하기 전에 클라이언트의 컨펌(Confirm)을 받아야 했고.
그때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제안서를 보여줘야 했으니 말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건물의 평면부터 시작해서, 입면, 측면. 마지막으로 외관 디자인까지.
그것들을 실제로 짓기 전에 고객에게 그림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고, 그 제안서의 디자인이 좋을수록 내용물도 더 좋아 보이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었으니까.
게다가 3D 프로그램으로 모델링한 건물의 투시도 또한, 포토샵 리터칭의 마법을 거치고 나면 훨씬 그럴싸한 컷으로 바뀐다.
인물사진을 보정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
때문에 포토샵이든 일러스트레이터든, 여러모로 우진이 탐을 낼만 한 디자인 툴이 아닐 수 없었다.
‘포트폴리오 만들 때도 포샵 일러는 필수지.’
그래서 우진은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다.
옆에서 듣던 소연과 혜진이, 놀랄 정도로 말이다.
“뭐야. 어제랑 같은 사람 맞아?”
“헐, 예쁜 교수님 들어오시니까 집중하는 거 봐.”
“오빠 연상 좋아하는구나?”
“아니라고…….”
이아랑 교수의 외모가 꽤나 예쁘장했기 때문에 작은 오해들이 있었지만, 그런 오해들을 일일이 풀어주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기초 제도는 이미 다 아는 거고, 이건 잘 몰라서 배워야 해.’라고, 사실대로 말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 놀릴 시간에 선 따기나 한 번씩 더 해라 이것들아.”
“우와, 모범생인줄.”
“맞잖아.”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오빠.”
어쨌든 우진이 그렇게 방해꾼 둘 사이에서도 열심히 수업을 듣는 동안, 세 시간이라는 실기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자, 그럼 다음 주에 봐요, 후배 님들. 과제는 수업 전날까지 과대가 취합해서 메일로 보내놓도록.”
“네, 교수님.”
그리고 비주얼 그래픽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진은 또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진의 목적지는 을지로.
오늘도 역시 바쁜 하루였다.
* * *
을지로행 버스에 탄 우진은, 문득 제이든이 떠올랐다.
오늘 처음 사귀게 된 친구였지만, 지금껏 학교에서 알게 된 동기들 중 가장 임펙트 넘치는 캐릭터를 가진 제이든.
‘그 녀석은 어쩌다가 우리 학교에 입학했을까? 영국에는 더 이름 있는 건축학교가 많은데 말이지.’
그리고 제이든과 함께 있을 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우진은 그를 보며 뭔가 위화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분명 흔치 않은 이력을 가진 제이든이,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라……. 그리고 제이든. 대체 왜 이 이름이 익숙하지?’
그렇다고 전생의 인연일 리는 없었다.
영어를 싫어했던 우진은, 전생에 외국인 친구를 가져본 역사가 없었으니까.
‘그냥 기분 탓인가? 녀석이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
우진은 버스 창가에 앉아 도심 풍경을 보며, 멍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런데, 그렇게 사고의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직전.
갑자기 하나의 기억이 떠오른 우진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하였다.
‘자, 잠깐……! 건축디자이너 테일러. 생각해 보니 그 테일러의 이름이 제이든이었잖아?’
잊고 있던 하나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제이든으로부터 느껴졌던 정체불명의 위화감들이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이든 테일러. 내가 대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우진이 회귀하기 전.
30대 중반에 건축디자이너로 데뷔하여, 천재 건축가로 유럽에서 유명세를 탔었던 인물인 제이든 테일러.
그는 유럽의 건축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크게 유명세를 탔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한국계 혼혈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를 스타 건축가로 만들어줬던 작품이 서울 한남동에 지어졌던 건축물이었으니.
그가 한국에서 유명해졌던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여기까지 떠오르자, 우진은 잡지에서 봤던 그의 얼굴까지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
‘그래. 확실해. 아까 봤던 그 웃긴 멀대 녀석이, 확실히 제이든 테일러가 맞아.’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우진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전생에서 동경했던 건축가 중 한 명과 같은 학과, 같은 학번의 동기가 되었다니.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진에게는 아직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었다.
우진이 제이든이라는 이름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든 테일러라는 생각을 방금까지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
‘음, 그런데 테일러는 분명 AA스쿨 출신이라고 했었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전생에서 디자이너 제이든 테일러의 출신학교는, 분명 영국의 명문인 AA스쿨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떻게 K대의 10학번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냐는 점이었다.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나? 그건 말도 안 되는데…….’
아무리 나비효과가 태평양에 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도, 우진의 회귀가 테일러의 학교까지 바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 회귀 시점으로부터 수년 이상 지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더 이상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우진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스타 건축가가 같은 학번 동기가 되었으며, 어쩌다 보니 그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는 사실이었으니까.
‘이거, 너무 재밌게 굴러가는데? 어째 학교생활이 점점 더 재밌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제이든의 익살맞은 얼굴이 떠오른 우진은,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진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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