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신장개업
모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유명 작가의 입체 미술부터 시작해서, 흙으로 빚어내는 석고상. 심지어는 석현이 좋아하는 프라모델까지.
하지만 모형이라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작품의 목적은 제각각이다.
제작자의 의도와 작품의 용도에 따라, 모형제작의 목적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이 작업하기로 한 이 건축 모형의 경우, ‘구현(具現)’이라는 단어 안에서 그 목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 지어지지 않은 아파트를 미리 시각화하여, 소비자들의 앞에 한눈에 보여주는 것.
제작자의 어떤 상상력이나 창의력보다는, 꼼꼼함과 세심함이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설계도면을 참고해서, 아파트 한 동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렇지.”
“내가 이런 모형을 작업하게 될 줄은 몰랐네.”
“적성에 아주 잘 맞을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 변태잖아.”
“……?!”
“프라모델 파듯이 디테일 한번 파 보자고.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젠장.”
우진의 이야기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석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라모델 작업을 할 때도 설계도에 없는 부분까지 면을 쪼개다 디테일을 만들던 석현이었으니.
변태라는 우진의 말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이다.
“작업량이 적진 않겠는데?”
“다음 주 화요일까지만 하면 돼.”
“아 그래?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하지.”
날고 기는 학과 동기들을 제쳐두고, 우진이 굳이 공대생인 석현을 끌어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대부분의 작업이 재현과 구현에 목적이 있는 모형작업 일이라면, 어지간한 디자이너보다도 석현이 나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석현은 모형 덕후들이 모여 있는 프라모델 커뮤니티에서도, 네임드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닐 만큼 뛰어난 실력자였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우진은 인터넷을 검색해 잘 만들어진 건축모형들을 보여주면서, 석현을 향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뭐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런 것…… 같네.”
“창틀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한번 따 보자고. 사진 찍어놓으면 진짜 아파트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야.”
우진의 설명을 듣던 석현의 눈은, 어느새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용돈 벌이라는 처음의 목적성보다도, 모형작업에 대한 장인정신이 더 크게 불타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석현에게만 의존할 것은 아니었다.
꼼꼼함이나 디테일 측면에서는 석현이 좀 더 나을지 몰라도, 노하우나 작업 숙련도는 우진이 훨씬 나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실질적인 작업은 내일부터 시작하고…….”
“그럼 지금은 뭐 하게?”
“일정을 한번 짜 보자.”
“일정?”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석현은, 살짝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둘이서 하는 모형작업에, 어떤 일정이 따로 필요하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설명이 시작되자, 일정이 왜 필요한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건축모형작업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모듈을 최대한 활용해야 해. 특히 이런 아파트 모형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모듈이라면…….”
“같은 구조의 형태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이야기야.”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 건축물의 경우, 첫 층의 구조가 그대로 탑 층까지 이어진다.
쉽게 말해 한 층을 잘 만들어서 모듈화하면, 그것을 쌓아 올리는 것으로 모형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단 첫 번째 일정은, 도면작업이야.”
“도면은 받아왔잖아?”
“그 도면 말고, 우리가 모형제작에 실제로 사용할 도면이 필요해.”
“응……?”
“프라모델 식으로 설명하면, 모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파츠를 부품처럼 하나하나 도면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우진이 받아온 아현 3-2구역 신축아파트는, 한 층당 네 세대가 들어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남향으로 설계되어있는 A타입의 세대 둘과, 남서향으로 설계되어있는 B타입의 세대 둘.
두 가지 모듈을 각각 두 개씩 넣어 한 층이 완성되면, 그 층을 수직으로 쌓아 아파트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진은 도면작업을 하면서, 모듈 하나에 들어갈 부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좋은 편인 석현은, 우진의 이야기를 금방 이해하였다.
“도면을 그린 다음에는, 한동안 칼질만 해야겠네.”
“칼질?”
“필요한 파츠 견적 다 뽑히면, 모형지 가져다가 싹 다 자르고 시작할 생각 아니었어?”
“하하.”
하지만 우진의 계획을 이해한 것과 별개로, 석현은 건축모형제작 프로세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우진은 수백 개가 넘는 건축모형 파츠들을, 일일이 손으로 자를 생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거 다 칼질로 해결하려다간, 일주일 동안 우리 죽어 나가, 석구.”
“그럼?”
“캐드로 도면 쳐서, 모형지 들고 을지로 갈 거야. 커팅비 몇만 원 정도면, 레이저 커팅기가 아주 예쁘게 잘라 줄 예정이거든.”
“오……?! 그런 게 있어?”
레이저 커팅기는, 말 그대로 레이저를 사용해 종이나 아크릴, 얇은 나무판 등을 자를 수 있는 장비이다.
캐드로 그린 도면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 도면에 그려진 대로 기계가 알아서 움직이며 레이저를 쏴주는 아주 편리한 장비인 것이다.
우진이 작업실에 설치하려는 설비 중에 일 순위인 장비였지만, 아쉽게도 당장 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우진이 사려는 모델의 레이저 커팅기는, 천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대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분양권 팔 때까지는, 일단 을지로 가서 잘라 와야지 뭐.’
레이저 커팅기를 떠올리며 입맛을 살짝 다신 우진은, 머릿속에 그려진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오늘내일 중으로 도면 싹 다 뽑고, 수요일쯤 을지로 가서 레이저 커팅 해오면……. 토요일까지 파츠 붙이는 작업 끝내고, 일요일부터 도색하면 될 것 같네.”
수첩에 슥슥 메모하며 일정을 정리하는 우진.
그를 응시하던 석현은, 새삼 놀란 표정이 되어 감탄하였다.
“야, 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설마 계획도 없이 사업한다고 일 벌였겠냐.”
“크……!”
“이미 사전 조사 싹 다 해서, 각 나오니까 시작한 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석현은 우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었지만, 사실 이런 지식들은 사전 조사 같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모든 과정을 경험해 봐야, 이렇게 술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이제 파츠 어떤 식으로 분리할지. 그거만 정하고 집에 가자고.”
“오케이 브로.”
작업실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작업을 할 수 있을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작업에 불이 제대로 붙은 두 사람은, 내일까지 계획으로 세워뒀던 도면작업을 앉은 자리에서 전부 다 해버리고 말았다.
새벽 두 시가 넘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동의.”
“당장 이거 도면 들고 을지로 가고 싶다.”
“진정해 석구. 지금 새벽 한 시라고.”
“후……. 내일 몇 시에 을지로 간댔지?”
성질 급한 석현을 보며, 우진은 실소를 지었다.
“원래 계획은 내일모레였어.”
“원래 계획이 중요하냐. 작업 끝났으면 내일 가야지.”
“그러지 뭐.”
“몇 시?”
“세 시.”
“오키. 나도 수업 끝나자마자 잽싸게 튀어올게. 역에서 만나.”
“오케이. 그러자고.”
뿌듯한 표정이 된 둘은 서둘러 짐을 챙겨 작업실을 나섰다.
해서 우진이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각.
“빨리빨리 좀 안 다니나 니.”
“과제가 많아서요…….”
“퍼뜩 자라.”
“옙, 주무세요!”
어머니의 가벼운 잔소리가 방에서 들려왔지만, 우진은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평소보다 길었지만, 그만큼 즐거웠던 하루였으니 말이다.
* * *
우진의 시간표는 심플하다.
기본적으로 1학년들에게 주어지는 다섯 개의 전공과목을 제외하면, 아예 시간표가 텅텅 비어있었으니 말이다.
3학점인 기초 제도, 공간 조형, 디지털 공간 그래픽, 비주얼 그래픽.
2학점인 공간 디자인학 개론.
현재 우진이 채워둔 학점은 이렇게 14학점뿐 이었으며, 그래서 수강 변경 기간인 이번 주 내로 4학점 정도를 더 채워야 하기는 했다.
1학년 때 학점을 텅텅 비워놓으면 고학년 돼서 고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우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하, 답 없네.”
등교하자마자 과실에서 선빈의 노트북을 빌린 우진은, 수강 신청 페이지를 확인하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신청 가능한 교양과목은, 소연이 듣는 ‘현대 철학의 이해’ 같은 강의들뿐 이었으니 말이다.
옆에서 우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선빈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혹시 영어 잘해요?”
“영어……? 그건 왜.”
선빈이 모니터 한켠을 툭툭 가리켰다.
“이 수업 어때요.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강의 제목을 확인한 우진은, 한숨부터 다시 튀어나왔다.
일단 ‘이해’ 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교양과목들은, 평이 좋은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뭔 놈의 강의 제목들에 ‘이해’ 는 빠지지가 않네.”
“크크, 그러게요.”
“이건 뭐 하는 수업인데?”
“선배한테 들었는데, 외국인 사귀는 수업이래요.”
“외국……인?”
“교수님부터가 외국인이셔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엄청 많이 듣고……. 수업도 거의 영어로만 진행한다고…….”
선빈의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이 수업이 왜 아직까지 파란불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야, 그런 수업을 왜 나한테 추천하는데?”
“영어만 잘하면 꿀이라고 해서요.”
“음……?”
“딱히 시험도 없고, 외국인 친구 사귀면서 놀다 오면 된다고…….”
선빈의 설명이 조금 더 이어지자, 우진은 약간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가장 크게 우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이 수업의 평가방식이 Pass or Non pass 방식이라는 점.
이런 수업은 출석만 잘해도 어지간하면 패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고, 그런 측면에서는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진의 마음이 선뜻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의 안타까운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으……. 나 영어 알레르기 있는데…….’
우진이 K대에 떨어졌다면 그 이유는 무조건 외국어 영역이었을 정도로, 영어는 우진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것.
우진의 입장에서 이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과목은, 소연의 ‘현대철학의 이해’ 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 어렵군. 어려워.”
하지만 우진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그의 결정을 도와줄,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우진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헤이, 브로스. 여기가 우리 과실 맞지?”
그는 우진의 10학번 동기들 중, 유일한 외국인인 ‘제이든’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