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신장개업
건설사의 수주전이란, 쉽게 말해 일을 따기 위한 경쟁을 말한다.
수서 현장의 오피스 정도 되는 규모의 일이야 수주전까지 가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아파트단지 전체를 건설하는 재개발, 재건축 현장은 거의 모든 경우에 수주전이 붙는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천 세대 이상의 큰 단지의 경우 사업장 규모가 조 단위로 형성되다 보니, 건설사 입장에서는 이만한 돈줄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은 어떤 방식으로.
누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하느냐.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문제였다.
그 집이 지어질 땅의 주인. 즉, 개발되기 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
어떤 건설사가 그들의 마음에 드느냐에 따라, 수주전의 승자가 결정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우진과 경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아현동 일대의 아현 3-2구역 수주전에서는 천웅건설이 KC건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KC건설이 천웅보다 업계 순위가 몇 계단은 더 높은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고무적이랄 수 있는 성과.
이 현장에서 우진이 따오려는 일은, 다름 아닌 건축 모형 외주였다.
‘아현 3-2가 천 오백 세대가 넘는 단지니까……. 차 떼고 포 떼도 최소 천만 원 이상은 무조건 남길 수 있어.’
사실 아파트 재개발 현장에서 움직이는 돈의 규모를 생각하면, 모델하우스에 들어가는 건축모형 외주는 그렇게 큰 건이 아니었다.
실무자 선에서 얼마든지 외주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박경완을 찾았다.
부장급 정도 되는 박경완이라면, 충분히 그 정도 권한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으니까.
“그러니까……. 모델하우스에 들어갈 건축 모형 일을 가져가고 싶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부장님.”
“거 참. 이런 전개는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 박경완은 여러모로 놀라는 중이었다.
현장에서 우진이 일하는 것을 보고 이미 놀랄 것은 다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마냥, 우진이 계속해서 그를 당황 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다음 주나 그다음 주 안에는 내부에서도 모형업체 선정 이야기가 나왔겠지. 타이밍도 기가 막히고…….’
수주전에 승리한 건설사는, 그때부터 모델하우스 오픈 준비를 한다.
수주전으로 원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이제 성공적인 아파트 분양을 위한 상품 포장을 시작해야 했으니 말이다.
우진이 문정동의 모델하우스에서 분양권 계약을 했듯, 아파트를 분양받고자 하는 수분양자들은 모델하우스부터 먼저 찾을 수밖에 없다.
보통은 모델하우스에 꾸며진 집과 외관모형을 보고, 주택청약을 넣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델하우스에 세워질 건축 모형은, 제법 중요한 요소였다.
계약 규모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박경완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유다.
“잘할 자신 있나? 아니. 자신 있으니까 이렇게 얘기를 꺼냈겠지.”
“물론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우진과 일한 일주일 동안, 경완은 그를 제법 신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장 목공일에 관한 것일 뿐, 모형은 또 다른 얘기였다.
“이건 인력계약이랑 또 다른 문제야. 알지?”
“목수 하나 계약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죠.”
“포트폴리오는? 아니, 그 전에……. 사업자는 있나?”
젓가락을 내려놓은 경완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일 이야기가 시작된 이상 자리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우진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고 해서 가산점을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대신 색안경은 끼지 않고 다른 외주업체와 동일 선상에서 판단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 정도만 돼도, 갓 대학생에 불과한 우진에게는 충분히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포트폴리오는 아직 없고……. 사업자는 당연히 있습니다.”
“포폴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쩝, 그런가요?”
웃으며 얘기하는 우진을 향해, 경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네는 역시 뻔뻔하군.”
포트폴리오로 보여줄 작업물도 없는 상태에서 대기업의 일을 따러 온 것이, 사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연히 우진은, 무작정 떼를 쓰러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다고 박경완이 들어 줄 위인도 아니었으니까.
박경완은 공과 사가 제법 칼 같은 인물이었다.
잠시 경완의 눈치를 본 우진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보자……. 3-2구역이 지금 관리처분은 났죠?”
“관처야 지난달에 났지. 그건 왜?”
“그럼 분양 일정이 대충 여름쯤 잡힐 테고…….”
“……?”
“모하 오픈은 6월이나 7월이겠네요.”
“크게 변수가 없다면?”
뜬금없이 재개발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진을 보며, 박경완은 살짝 눈을 빛냈다.
스물두 살짜리 꼬마가 재개발 과정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도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우진이 또 어떤 이야기로 자신을 혹하게 만들지가 궁금해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은, 박경완에게 제법 합리적인 제안을 꺼내 들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죠.”
“그게 무슨 말이지?”
“모형업체 선정 전까지, 일주일만 시간을 벌어달라는 말입니다.”
박경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진이 말하지 않아도, 일주일 안에 업체선정이 끝날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면?”
“도면 하나 던져주시고 일주일 주시면, 제가 샘플 모델 하나 만들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샘플…… 모델?”
“단지 안에서 한 동 정도 샘플로 만들어서, 포폴로 가져오겠다는 이야깁니다.”
“흠……?”
사실 처음부터 포트폴리오가 있는 업체는 없다.
포트폴리오만을 위한 작업을 따로 한 게 아니라면, 신생업체에게 과거 실적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경력 있는 신입사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진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샘플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군말 없이 돌아가겠습니다.”
“샘플 작업비용은?”
“당연히 안 받죠.”
“오호.”
패기 넘치는 우진의 제안에, 박경완의 마음이 살짝 기울었다.
자신감을 보여주는 우진의 모습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니 말이다.
“재밌는 제안이군.”
“그럼, 받아주시는 겁니까?”
박경완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 입장에서 손해 볼 일 없는 제안이니까.”
“역시 부장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경완의 대답을 받아낸 우진은, 무릎 위에 올려뒀던 왼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경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도 착각은 않는 게 좋아.”
“무슨 착각 말씀이십니까?”
“난 정말,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할 생각이니 말일세.”
“……?”
“자네가 가져온 샘플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까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야.”
힘주어 말하는 경완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하는 이유가 느껴졌으니까.
‘내가 정말 제대로 된 샘플을 가져오길 바라는 거겠지.’
그러나 우진이 위축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실력을 보여줄 기회만 있으면, 모형 외주 정도는 충분히 따낼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뵙도록 하죠.”
“대충, 다음 주 수요일까지 시간을 주면 되겠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아. 수요일 오후 다섯 시쯤, 본사 2층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경완은, 다시 젓가락을 들기 시작하였다.
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 이상의 대화는, 우진이 가져온 샘플을 본 다음에 하는 게 여러모로 생산적일 것이었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우진 또한, 아쉬울 것 없는 표정으로 다시 초밥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여기, 진짜 맛있네요.”
“그렇지?”
“다음 주에도 이거 사주시면 안 됩니까?”
“가져온 샘플 상태 봐서.”
“아니, 공과 사는 구분하셔야죠, 부장님.”
“왜,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
“아뇨. 샘플 퀄리티에 따라 밥집이 결정된다면, 그날은 한우를 먹어야 할 테니까요.”
“입만 살아가지고…….”
그 이후로도 우진과 경완은, 제법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경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진은 전화를 걸었다.
“야, 석구. 수업은 끝났냐?”
그의 동업자이자 개업 첫 프로젝트의 핵심인, 불알친구 석현에게 말이다.
* * *
우진의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어린 시절은 항상 가난했었다.
물론 밥을 굶어야 하거나 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이란 것은 원래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진은 또래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어머니께 사달라고 말조차 꺼내 본 적이 없었으며.
마트에서 과자 하나 사는 것도 눈치 보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진의 기억에 한정된 것일 뿐.
사실 그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더 어렸던 시절, 우진의 집은 제법 부유했었다.
우진의 아버지 서찬영이,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홀라당 날려 먹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사장님, 얼마 전에 정부에서 하남 미사 대규모 개발계획 발표한 것 아시죠?]
[이거 거의 눈먼 땅입니다. 삽 뜨면 시세 몇 배로 튀겨지는 거……. 진짜 일도 아니에요.]
서찬영은 한없이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어리석고 순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친한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기획부동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고.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린벨트로 단단히 묶여있는 임야를, 대출까지 받아가며 시세 열 배 이상의 고가로 매입한 것이다.
어쩌면 서찬영이 사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병환으로 요절하게 된 것도, 빚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여보……. 미안……해.]
[미안하면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렇게 포기할 순 없는 거잖아.]
[후우……. 이젠 틀……렸어…….]
[흑, 흐흑……!]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찬영이 책임감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실수로 인해 진 빚을 최대한 갚으려 노력하였고, 오억이 넘던 빚 중 절반 가까이를 털어내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2억이 넘는 빚이 이주희와 우진에게 대물림되었으며.
1990년대에 2억이라는 액수는, 남겨진 모자에게 숨이 막힐 정도의 거액이었다.
월급쟁이 평균 수령액이 한 달에 백만 원이 안 되던 시절.
수제비 칼국수 한 그릇에 2천 원이 겨우 넘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주희가 운영하는 수제비 칼국수 집이 십 년이 넘도록 장사가 잘됨에도 불구하고, 우진이 대학 갈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갚으면……. 이제 이 지긋지긋한 빚도 끝이야.’
오늘도 아침 일찍 수제비 칼국수 집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 주희는, 언제나 그랬듯 마음을 다잡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래도 요즘 그녀는, 전역한 아들 덕에 기분이 좋았다.
정확히는 힘들게 키워낸 외동아들을, 번듯한 대학까지 보냈다는 뿌듯함이 그녀에게 힘이 된 것이다.
“아유, 사장님. 이번에 우진이 K대 입학했다면서요?”
“이야, 아드님 잘 키우셔서 뿌듯하시겠어요.”
“우리 딸내미도 내년에 수능인데……. 우진이처럼 대학 좀 철썩하고 붙어줬으면 좋겠네요.”
학령기 자녀를 둔, 입시에 관심 많은 단골손님들의 칭찬을 들을 때면.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피로가 풀리는 것은 덤이었다.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 우진이 학자금 대출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갚아 줘야지.’
기계적으로 수제비를 뜯던 주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요즘, 행복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