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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7화 (17/315)

17화

신장개업

우진은 꾸벅꾸벅 졸았다.

옆에 앉아있던 소연이 옆구리를 찌르지 않았더라면, 코까지 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빠 너, 그러다가 교수님한테 찍힌다?”

“으으, 고마워. 젠장, 왜 이렇게 졸린 거지……?”

천하장사도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이 수마가 가득 낀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우진도 신학기 첫 수업부터 졸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일단 어제 작업실 개업 준비로 밤을 샌 탓에 무척이나 피곤했으며.

둘째로 수업 내용이 너무도 지루했으니 말이다.

박준민 교수가 수업 자체를 지루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늘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내용들 중, 우진이 모르는 것이 단 하나도 없을 뿐이었다.

‘십 년이 넘게 도면을 치면서 살았는데……. 기초 제도 지식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과제나 시험이야 뭐가 나와도 자신이 있었지만, 지도교수의 눈에 태도 불량으로 찍힌다면 좋은 성적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전공 수업만큼은 올 A+를 받자는 마인드로 등교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우진은 그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나 졸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이라도 깨어 있어야…….’

잠을 깨려고 고개를 휘휘 돌리는 우진을 향해, 선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줬다.

“이제 와서 뭘 깨려고 해. 수업 끝났어 형.”

“벌써?”

건너편에 앉아있던 혜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벌써는 무슨. 거의 세 시간 지났 구만.”

“…….”

할 말이 없어진 우진은, 멋쩍은 표정이 되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동기들의 말처럼 박준민 교수는 이미 단상을 정리하고 강의실을 나서는 중이었고, 시계는 어느새 4시를 가리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휴. 다음 수업부터라도 정신 좀 차려봐야지.’

그리고 우진이 그렇게 잠깐의 반성 시간을 갖은 사이, 먼저 짐을 챙긴 선빈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난 먼저 나가볼게. 다들 내일 보자고.”

“그래. 내일 봐 선빈아.”

“빠이.”

신이 나서 가방을 챙겨 나가는 선빈을 보며, 우진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평소 말수도 적고 소심한 편인 선빈이, 저렇게 텐션이 높아진 건 처음 봤으니 말이다.

“쟤, 왜 저렇게 기분이 좋대?”

우진의 물음에, 혜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오늘 수업 때 칭찬 좀 받았거든.”

“칭찬?”

“게다가 지금 준민 교수님께서 불려서 나간 거야.”

“왜?”

“그야 모르지. 하지만 분위기상 봤을 때, 뭔가 좋은 일이지 싶어.”

소연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 해 보였고, 우진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선빈에게 신경 쓰기에는, 오늘도 바쁜 일정이 산더미였으니 말이다.

“오빠, 오늘 뒤에 수업 또 있나?”

혜진의 말에, 소연이 삐죽거리며 대신 대답했다.

“이 오빠 교양수업 없는 거 몰라?”

“아, 맞다 그랬지.”

오늘은 기초 제도 말고 전공 수업이 없는 날이었기에, 우진의 시간표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정정 기간 안에 넣을 거야. 걱정하지 마.”

“웃기시네. 자리가 쉽게 날 것 같아?”

“정 안되면, 네 수업 같이 듣지 뭐. 그건 다음 주에도 비어있지 않을까?”

“…….”

결국 본전도 못 찾은 소연은 울상이 되었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자리 정리를 마친 세 사람도 천천히 강의실을 벗어났다.

“그럼 내일 봅시다, 언니 오빠.”

“그래. 수업 잘 듣고.”

“혹시 수업 마음에 안 들면, 나한테 넘겨도 좋아.”

“그럴 일은 없어. 걱정 마셔.”

선배들이 추천해 준 최고의 교양수업 중 하나였던, ‘인문학 독서’ 수업.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는 그 꿀 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혜진의 표정은, 박 교수를 따라나서던 선빈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야, 철학가. 오늘은 수업 없나 보네?”

“그래. 오늘 수업 끝이다.”

이제는 아예 자포자기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푹 쉬는 소연.

우진을 힐끔 쳐다본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이제 수업 끝났으면……. 집으로 가?”

“아니, 집은 아니고.”

“그럼?”

“약속 있어서, 종로 쪽으로 나가봐야 해.”

“아, 그렇구나.”

시끌벅적한 혜진이 사라져서인지, 둘 사이에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어서 교정을 따라 걷던 우진이, 문득 소연에게 물어보았다.

“소연이 너 바로 집으로 가면, 같이 버스 타면 되겠다. 같은 방향이네.”

하지만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냐, 나 카페 잠깐 앉아있다가, 저녁 약속 있어.”

“저녁 약속?”

“응. 2학년 선배들이 저녁 먹자고 했거든.”

“아. 그 대면식 때 봤던 윤택 선배?”

“뭐, 윤택 선배도 있고, 희영 선배도 있고…….”

“오, 사람 많이 오나 보네.”

“그렇지 뭐.”

“재밌게 놀고 와. 우리 내일 오전수업이지?”

“응, 맞아.”

대화를 나누던 우진의 눈에,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이어서 버스 번호를 확인한 우진이, 소연을 향해 빠르게 인사하며 튀어 나갔다.

“야, 버스 와서 먼저 가본다! 내일 봐!”

우진은 소연이 대답할 새도 없이, 후다닥 뛰어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오늘 저녁 약속은, 우진에게 제법 중요한 자리였다.

* * *

“건배!”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크으, 결국 공기도 맞췄고, 준공도 떨어졌고……. 오늘 같은 날은 좀 마셔도 돼!”

종각역 인근에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고깃집인 <마니돈>.

이곳은 평소에도 저녁 시간이면 제법 손님이 붐비는 음식점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더 이른 시간부터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크게 회식이 잡힌 ‘천웅건설’ 사원들이, 초저녁부터 <마니돈>을 통째로 빌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잔뜩 기분 좋은 천웅건설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오늘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은 박경완이었다.

사실상 그의 활약으로 회사 차원에서 제법 큰 손실이 날 뻔한 것을 막아내었고.

덕분에 오늘 아침, 기분 좋은 임원 호출도 받았으니 말이다.

[고생 많았네, 박 부장.]

[아닙니다, 전무님. 저야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이사님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자네 고생한 거 다들 알고 계신다네.]

[하하, 감사합니다.]

[머지않아 아마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김 전무님 이번에 승진하시면, 자리가 하나 빌 예정이거든.]

[……!]

직장인에게 사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란 당연히 승진이다.

물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사진에서 이야기가 나왔다면 충분히 기대해볼 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직급은 이미 부장.

부장급의 승진은 곧 임원 타이틀을 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일반적인 승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박경완이 아니라 누가 그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처음 일이 터졌을 때 옷 벗을 각오까지 했던 박경완은, 기분 좋은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탓인지, 성공으로 인한 보상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크, 네 시 반에 퇴근해서 회식이라니. 이런 회식이면 언제든 환영이라니까?”

“아니 임 대리. 자네 점심을 그렇게 많이 먹어놓고 지금 또 고기가 넘어가?”

“고기 앞에서 무슨 그리 섭하신 말씀을 하십니까, 과장님.”

“부장님도 한 잔 더 받으시죠!”

“하하하!”

이제 고작 다섯 시였지만,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천웅건설의 회식 자리.

하지만 박경완은 맥주 몇 잔 말고는, 고기나 술에 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곧 이 근방에서, ‘어린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으니 말이다.

회식이 잡힌 마당에 약속이야 미룰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 어린 친구가, 오늘 그에게 돌아온 보상의 일등공신일지도 몰랐으니까.

‘회식이야 2, 3차에 다시 합류하면 되겠지……. 전무님들도 그때 오신댔으니…….’

하여 시간을 확인한 박경완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니돈>을 빠져나와 종각역으로 향했다.

* * *

사실 우진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박경완은 이번 공사 일정을 어떻게든 준공까지 맞춰 내었을 것이다.

우진이 회귀하기 전에도, 수서역의 오피스는 정확한 일정에 완공됐었으니 말이다.

물론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는 했지만, 우진의 역할은 결국 현장기술자 이상이 아니었고.

일정을 짜 맞춘 것은 전적으로 박경완의 실력이 맞았다.

하지만 나비효과라는 말도 있듯, 결과적으로 우진이 준 영향은 제법 큰 것이었다.

만약 우진이 없었다면 어떻게든 중간 단계에서 내부 일정이 꼬였을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박경완은 상부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우진이라는 작은 변수는, 박경완의 임원 승진을 일 년 정도 앞당기게 되었다.

물론 종각역 초밥집에서 한창 이야기 중인 두 사람은, 벌어지지 않을 과거의 일을 알 리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 학교생활은 재밌고?”

“이제 일주일 했습니다. 재밌고 말고가 뭐 있겠습니까. 하하.”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기는…….”

경완이 우진과 만난 곳은, 마니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이었다.

성격상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경완은 우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해서 이렇게 음식이라도 맛있는 것을 대접한 것이고 말이다.

“지난번에 거절하길래, 여름방학까지는 연락 없을 줄 알았더니.”

“제가 곧 연락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사실 수서현장의 일이 끝난 뒤.

먼저 연락을 한 것은 우진이 아닌 경완이었다.

다음 일거리가 생각보다 빨리 생기는 바람에, 우진의 의사를 한번 물어본 것이다.

물론 갓 입학한 우진이 올 확률은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이다.

그리고 그때 우진이 현장 일을 거절하면서 경완에게 했던 말이, 곧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이었다.

“준공 축하한다고 보자 했을 것 같지는 않고.”

“엇, 준공 떴습니까? 축하드립니다.”

“공치사는 됐고. 뭐 때문에 보자 한 거야?”

“방금 초밥 나왔는데,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궁금하잖아.”

능글맞게 웃으며 초밥을 한 점 집어 드는 우진을 보며, 경완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생긴 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십 대 초반인데, 매일 현장에서 같이 구르는 부하직원들 만큼이나 대화가 편했으니 말이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와서…….’

물론 우진이야 전생에서 수없이 함께 일했던 상대이기에 편하게 대화하는 것이었지만, 박경완이 그런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거리 받으러 왔습니다, 부장님.”

입에 넣은 초밥을 우물우물 삼킨 우진의 말에, 경완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지난번에 안 한다며?”

“그 일 아닙니다.”

“……?”

알 수 없는 우진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경완.

하지만 다음 순간, 경완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이번에 천웅건설에서, 아현동에 모하(모델하우스) 하나 오픈하시죠?”

“음……? 그걸 어떻게…….”

“아현 3-2구역, 수주(受注)전. 천웅이 이겼을 거 아닙니까.”

“……!”

우진의 말을 들은 경완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이놈에게……. 말했던 적이 있나?’

지난번에 우진에게 제안했던 현장 일자리가 바로 아현동 신축아파트 재개발 현장 일이었는데, 그때 분명 어디 현장이라는 얘기는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KC건설과의 수주전 결과는 아직 대외적으로 발표된 것이 없었는데,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얘기하니.

경완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어?”

“KC건설 이번에 동작구 쪽에 하나 따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지.”

“그쪽에 집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현동 쪽은 밀릴 거라 생각했죠.”

“…….”

우진의 청산유수 같은 대답에, 경완은 다시 말을 잃어버렸다.

분명 우진이 이야기하는 정도의 추론이야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아닌가?

“너, 솔직히 말해.”

“뭘요?”

“나이 속였지?”

“……. 제가 그렇게 삭았습니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홀짝인 우진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운을 떼었다.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요, 부장님.”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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