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자본이 필요해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2월이 전부 지나고 3월이 되었으며.
한겨울 한파와 맞먹을 정도로 차가웠던 꽃샘추위도 한풀 꺾였다.
그 사이 우진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학과 일정부터 따지자면, 입학식과 수강 신청.
작업실 준비로 바쁜 우진은 입학식 땐 얼굴만 잠깐 비췄고.
수강 신청은 안타깝게도 완전히 말아먹었다.
우진은 수강 신청 페이지가 열리는 그 시간에, 코를 골며 자고 있었으니까.
[한소연(10학번) : 뭐? 오빠……. 설마 지금 일어난 거야? 맙소사.]
[한소연(10학번) : 대면식 때 선배들이 괜찮은 과목들 얘기해 줬잖아.]
[나 : 지금 신청하면 안 돼?]
[한소연(10학번) : 당연하지……. 선배들이 찍어준 과목은 이미 싹 다 빨간불이라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1학년 첫 학기 전공 수업의 경우 따로 수강 신청이 없다는 정도.
수강 신청 첫 경험인 신입생들에 대한 배려로, 학번에 따라 강제 수강 등록이 되어버리는 시스템이었으니 말이다.
[나 : 전공은 자동으로 되어있네 뭐.]
[한소연(10학번) : 하, 답답아. 이번 수강 신청은 교양이 중요한 거라고 교양이!]
[나 : 그래서 넌, 수강 신청 성공했고?]
[한소연(10학번) : …….]
[나 : 뭐야ㅋㅋㅋ 너도 망해놓고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한소연(10학번) : 그, 그래도 난…….]
[나 : 너 교양수업 뭐, 뭐 듣는데?]
[한소연(10학번)님이 채팅방에서 나가셨습니다.]
[나 : …….]
그리고 수강 신청이 망했다고는 하지만, 우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전공과목의 학점을 제외하고는, 딱히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뭐, 졸업하고 어디 취직할 생각도 아니니까.’
그리고 학과와 관련된 사소한 일들이 이렇게 흘러갔다면, 우진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바쁜 일들이 지나갔다.
작업실 개업을 위한 준비가 착실히 진행된 것이다.
“자, 이쪽으로 들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좋아. 제일 긴 책상을 이쪽으로 배치하고, 그쪽 방은 비워두세요. 따로 들어올 물건 있습니다.”
공실로 비어있던 사무실에 각종 집기들을 집어넣자, 제법 그럴싸한 작업실의 모양이 나온다.
아직 모형제작을 위한 값비싼 장비들은 들여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진은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내 첫 사무실인가.’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우진 자신이 주인인 사무실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었다.
‘석현이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K대가 개강을 했듯, 석현이 다니는 S대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전공 수업과 시간이 겹친 석현이, 이삿날에 오지 못한 것.
우진도 오늘 첫 번째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만, 아직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생각보다 이사가 일찍 끝났네. 점심 먹을 시간 정도는 있겠어.’
그리고 동업자인 석현 대신, 우진의 작업실에는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어느새 우진과 제법 친해진, 그의 몇몇 동기들.
수업에 가기 전에 모여서 점심이나 먹자 하여, 학교 근처에 있는 우진의 작업실 앞에 모이기로 했던 것이다.
“이야……! 오빠. 여기가 오빠 작업실이라고?”
“와, 형! 대박. 자취 안 한다더니, 언제 이런 큰 그림을…….”
물론 작업실에 들어오라는 얘긴 안 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을 신경 써줄 친구들이 아니었다.
“앞에서 기다리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은 해야지!”
“누가 들으면 어디 멀리 행차하신 줄 알겠어. 어차피 학교 앞인데.”
“그래도!”
혜진과 선빈의 들뜬 목소리를 시작으로, 우진의 작업실은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 * *
우진의 신학기 첫 수업은, 전공 수업 중 하나인 ‘기초 제도’ 수업이었다.
신입생들이 듣게 될 모든 수업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수업인 제도 수업.
수업 자체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거창한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닌,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는 수업이었으니까.
다만 매 수업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과제가 나올 뿐이라고 하였다.
“아무래도 제일 힘든 수업은 기초 제도지.”
“절대 과제 밀리지 마라.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끝이야 끝.”
“더 최악은 뭔 줄 알아?”
“한번 재수강 뜨면, 진짜 늪이나 다름없어.”
“05학번에 현주 선배라고 있거든? 작년에 4학년이셨는데, 1학기에 기초 제도 재수강하고 계시더라니까?”
“아니, 삼 수강이실걸?”
“끔찍하네…….”
“사학년쯤 되면 봐주실 만도 한데, 박준민 교수님 진짜 빡세다니까.”
그리고 선배들의 이런 엄포를 들어서인지, 수업에 들어서는 신입생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한 사람. 우진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손 제도라……. 진짜 추억이네, 추억이야.’
과거, 처음으로 현장 노가다를 벗어나 건축사무소에 취직했던 시절.
처음 수습으로 입사했던 우진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바로 손 도면을 그리는 일이었다.
딱히 손 도면이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현장에서 손으로 그린 도면을 사용하던 것은, 정말 먼 옛날의 일이었으니까.
손으로 도면 한 장 그릴 시간에 캐드로 열 장은 그릴 테니. 현장에선 손 도면을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이 학교에서도 그렇고.
손 도면을 이렇게 꼭 가르치는 것을 보면, 건축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손 때 묻은 도면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듯싶기도 했다.
‘확실히 트레이싱지 위에 그린 손 도면이, 나름의 맛이 있긴 하지.’
트레이싱지란, 제도할 때 쓰는 반투명한 뿌연 종이를 말한다.
그리고 제도를 배우는 건축학도들은, 이 트레이싱지 위에 샤프심 자국이 반질반질하게 코팅될 정도로 꾹 눌러서 도면을 그린다.
어쩌면 이 손 제도는, 지금 건축계를 이끌어가는 기성세대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추억의 잔재일지도 몰랐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의실의 전경이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인문학부 강의실과 달리, 널찍널찍하게 늘어서 있는 실기용 책상들.
그리고 그 위에 가지런히 설치되어 있는 하얀 제도판들.
우진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고, 그 건너편에는 혜진이 마주 앉았다.
이어서 뒤늦게 들어온 소연을 발견한 우진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게 누구야. 철학가 한소연 씨 아닌가.”
“시끄러…….”
옆에 있던 혜진도 거들었다.
“앗! 현대 철학을 이해하고 싶은 소연 언니잖아?”
“후……. 혼자 있고 싶으니까, 둘 다 좀 조용히 해 줄래?”
혜진을 한 차례 쏘아본 소연이, 우진을 다시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근데 수강 신청 성공한 혜진이야 그렇다 쳐. 오빠는 대체 날 왜 놀리는 거야?”
소연의 반발에, 우진이 손가락을 까딱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현대 철학의 이해’보다야, 차라리 비어있는 2학점이 낫지 않을까.”
소연은 분한 표정으로 뭐라 다시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의실에 낯선 중년의 남자 하나가 성큼성큼 들어왔으니 말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번 제도 수업을 맡은 박준민 교수.
시끌벅적하던 강의실은 조용해졌고, 학생들을 한 차례 둘러본 박준민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이번 학기 ‘기초 제도’ 수업을 맡은 박준민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자연스레 강의실 전체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박준민은 김기환 교수 라인의 부교수였다.
제법 유명한 건축사무소의 대표였다가, 김기환과 연이 닿아 K대 교수로 들어오게 된 케이스.
현재도 대표직만 내려놨다뿐이지 실무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그는, 이 제도 수업에 둘도 없는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손으로 그리는 도면이 실무에 쓰이지 않기는 하지만, 어쨌든 도면을 그리는 방법 자체는 실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니 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인 오토캐드(Auto CAD)로 그리든, 손으로 그리든.
제도이론에 대한 것은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박준민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아웃풋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벌써 십 년이 다 되도록 제도 수업을 맡고 있었다.
처음 시간강사로 들어왔을 때 맡은 기초 제도 수업을, 부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맡고 있는 것이다.
준민 또한 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학생들을 신나게 굴릴 수 있는 이 제도 수업은, 어쩐지 그의 적성에 잘 맞았으니 말이다.
‘작년에 재수강이 두 놈 밖에 나오지 않았단 말이지. 올해는 좀 더 세게 굴려야 하나…….’
학생들이 들었더라면 기겁을 했을 만한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린 준민은, 단상에 올라와 학생들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이번 학기 ‘기초 제도’ 수업을 맡은 박준민입니다.”
지금 수업은, 이번 학기 들어 준민의 두 번째 수업이었다.
신입생들의 전공 수업은 대부분 A, B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오전에 A반의 제도 수업이 이미 한 번 있었으니까.
그리고 준민은 이 두 번째 수업에 들어와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학생들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는 이 B반에서, 찾아보고 싶은 학생이 하나 있었다.
‘어떤 놈일까? 뭐 하는 놈인지 진짜 궁금한데…….’
준민이 찾는 학생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지난주 디자인의 밤에서, 장학으로 선정된 작품의 실질적인 디렉터 역할을 한 친구.
장학금을 받은 다섯 명의 이름은 미리 확인하고서 수업에 들어왔지만, 어차피 그 중 ‘진짜’는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신입생 중에 그 정도 실력을 가진 학생이 여럿일 리는 없었으니까.
‘어쩌면 어디 건축사무소에서 굴러본 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편입생일지도…….’
준민이 그 신입생을 찾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당연히 호기심.
채점장에서 김기환 교수의 요청으로 작품 크리틱을 했던 부교수가 바로 박준민이었고.
그때 작품을 본 순간부터, 공간계획과 설계를 주도한 디렉터가 누구인지 줄곧 궁금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공모전.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공공디자인 공모전이, 바로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신입생이 기태나 예진이보다 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1학년 한 놈 밀어 넣는 게 모양새는 나쁘지 않을 테니까.’
서울시는 매년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공공디자인 공모전을 주최한다.
줄여서 SPDC(Seoul Public Design Contest)라는 이름을 가진, 제법 큰 규모의 공모전.
상금만 놓고 보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SPDC의 인지도는 대외적으로 무척 큰 편이었다.
만약 이 공모전에서 대상이라도 수상한다면, 실제 지어질 공공 건축의 디자인으로 어느 정도 반영되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참여조건이 ‘현재 서울시 소재의 대학에 재학 중인 학부생’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니, 공모전의 인지도에 비해 경쟁률도 낮은 편.
학부생 입장에선 매년 한 번씩 오는 최고의 기회 중 하나였다.
‘물론 1학년 때 여기 나가는 케이스는 거의 없지만…….’
사실 준민에게는 약간의 사심도 있었다.
공모전에서 학생이 특선 이상의 성적을 내면, 지도교수의 실적도 올라가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김 교수님, 제가 먼저 침 발라 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마 그날 함께 채점을 했던 김기환 교수도, ‘그 신입생’을 탐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정교수가 된 지 오래인 원로교수 김기환보다, 실적에 더 목마른 것은 부교수인 박준민.
해서 준민은, 양심의 가책 같은 배부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자, 누구냐. 어서 나와라.’
건축도면을 그 정도까지 뽑아낸 학생이라면, 분명 제도 수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그 정도의 건축 지식을 가진 신입생이라면, 수업에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싶어 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강의가 끝난 후에 녀석을 불러 슬쩍 공모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덥석 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라.
‘서우진, 한소연, 류선빈, 오윤정, 임혜진. 분명 얘들 중 하나인데…….’
사실 당장이라도 누가 주도한 작품인지 학생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양 빠지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준민은 기다렸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보통 출입문의 최소 너비는 900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가 휴먼 스케일에 가장 적합한 길이니까요.”
“좋아, 학생. 이름이 뭐지?”
“류선빈입니다!”
갓 입학한 신입생으로서는 알기 힘든 도면과 관련된 질문에, 막힘 없이 술 술 대답하는 멀대같은 남학생.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본 준민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요놈이구나!’
그 확신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었지만 말이다.
“선빈이.”
“예, 교수님.”
“강의 끝나고, 잠깐 나 좀 보지.”
“넵! 알겠습니다.”
사실 선빈의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우진에게서 뭔가를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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