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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5화 (15/315)

15화

자본이 필요해

우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업은, 어쩌면 건축사무소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생에서 그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이 현장의 목공 일이었으며, 설계부터 시공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빠삭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향후 20년간 한국에서 유행할 인테리어 디자인의 트랜드는, 전부 다 꿰고 있는 우진이었으니.

건축사무소를 내서 적어도 망할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내가 창업을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지금 우진이 시작하려는 사업은, 건축사무소와 조금 동떨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작게 시작한다 하더라도, 건축사무소를 열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 많았으니까.

‘시간도 부족하고, 돈은 턱없이 부족하고……. 당장 건축사무소 내는 건 미친 짓이지.’

아파트 분양권 투자로 3~4천만 원 이상의 자본금이 확보된다고 한들, 그 돈으로 건축사무소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다.

시공을 배제하고 설계만 하는 사무소를 오픈한다면 어찌어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진이 하려는 설계는 더 이상 남의 디자인을 가져다 하는 설계가 아닌,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공간에 대한 설계였으니까.

‘디자인 공부를 충분히 하기 전까지……. 본격적인 사무소는 오픈하지 않겠어.’

우진은, 자신이 한동안 가장 집중해야 할 분야가 학업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가 시작하려는 사업은, 자신의 학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업이었다.

“흐흐.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지.”

인문계열이나 이공계열의 학부에 진학한 대학생들에게, 학업이란 말 그대로 공부다.

하지만 디자인학부의 학생들에게 학업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물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해야 하는 공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부의 성적을 결정하는 전공과목 대부분이 실기 과목이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신입생들이 디자인의 밤에서 밤새 만들었던, 건축 모형 같은 과제물들.

우진은 그런 모형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작업실’을 오픈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건설사 몇 군데 뚫어서 모델하우스에 들어갈 모형만 만들어도……. 수입은 짭짤하다 못해 넘쳐날 거야.’

그래서 우진에게 필요한 것은, 작업실을 오픈할 공간과 공구들, 그리고 몇 가지 설비들이었다.

작정하고 작업실을 열어 외주를 받기 시작하면, 칼이나 가위 등의 1차원적인 도구들만으로 작업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설비들을 활용해서 돈도 벌고 자신의 과제물도 효율적으로 작업하고.

우진이 생각하기에 이 사업은, 지금 그의 상황에서 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업의 목적성과 최대한 부합하기 위해서, 그는 작업실의 위치를 학교 인근으로 잡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업자를 접수하고 법원에서 나온 우진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북으로 향했다.

학교 인근에 있는 부동산에, 작업실 매물을 보러 가기 위해서 말이다.

“흐, 오늘 아주 서울을 한 바퀴 투어 하는구만.”

학교 후문 쪽에 있는 적당한 부동산을 찾은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사장인 듯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이고, 학생 잘 왔어요. 마침 후문 가까운 거리에 원룸 한 개가 급하게 나왔거든.”

“아, 저 원룸을 찾고 있는 게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어떤 물건을 찾는 건데?”

“작업공간으로 쓸 만한 사무실을 찾고 있어요. 실 평수는 15평 정도면 충분하고……. 지층만 아니면 돼요.”

“지층? 반지하?”

“네. 환기가 좀 중요해서, 2층 이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우진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은 부동산 사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디자인과 학생인가 봐요?”

“아, 네. 맞습니다, 사장님.”

K대 근처에서 부동산만 십 년이 넘게 운영하다 보니, 작업실을 계약하려는 미대생 손님들도 종종 맞아 본 것이다.

하여 우진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한 부동산 사장은, 빠르게 매물을 검색하기 시작하였다.

신학기 직전이라 사실 원룸 매물은 많지 않았지만, 우진이 원하는 조건 정도의 물건은 몇 군데 나와 있었다.

“월세는 어느 정도?”

“칠십은 안 넘었으면 좋겠어요.”

“음, 예산이 좀 빡빡하기는 한데……. 없지는 않을 거예요. 찾아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우진에게 세 곳 정도의 매물을 제시했고, 월세는 다들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진은, 어렵지 않게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여기, 이 물건이 좋겠어요.”

“그래요?”

“일단 학교도 제일 가깝고……. 투 룸이라 한 명 정돈 숙식도 가능하겠어요.”

“그렇지. 뭐, 주거용은 아니라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학생 말이 맞아요.”

사실 월세만 놓고 보면, 우진이 선택한 물건이 셋 중 가장 비쌌다.

하지만 우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보증금 200만 원 이하로 우진의 자금 사정 내에서 계약 가능한 물건이, 딱 이것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주인분이랑 연락되시면 문자 한 통 남겨주세요.”

“그래요 학생, 시원시원해서 좋네. 금방 연락 줄게요!”

하여 깔끔하게 가계약금까지 걸어 놓은 우진은, 개운한 표정으로 부동산을 나왔다.

한낮에 집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전부 처리하고 나자,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런, 늦겠는데……?”

시계를 확인한 우진은, 살짝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오늘 그의 마지막 일정인, 친구 ‘석현’과의 약속 시간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약속장소까지 걸리는 시간은, 빨라도 40분 정도.

조금 늦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흐유, 어쩔 수 없지 뭐. 밥이라도 맛있는 거 사줘야겠다.”

석현은 그의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였지만, 오늘 만나면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셈이었다.

석현의 입장에서야 우진을 대략 반년 정도 만에 보는 것일 테지만, 우진은 얘기가 다른 것이다.

‘거의 10년 만이지?’

회귀 이전에 석현은 십 년 가깝게 연락이 끊긴 상태였었고.

회귀 후에는 오늘에야 처음 만나게 된 것.

오랜만에 만날 친구 석현을 떠올린 우진은, 기분 좋은 표정이 되어 지하철로 향했다.

* * *

우진이 석현과 처음 만났던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뚝딱뚝딱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래서 우진과 마찬가지로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그의 단짝 친구.

석현은 교사이신 부모님의 반대로 예체능을 포기하고 공대에 진학했지만, 그래도 취미는 한결같았다.

전생에서도 서른이 다 될 때까지, 우진을 불러 종종 프라모델을 만들곤 했던 친구였으니 말이다.

우진의 꿈이 건축 디자이너였다면, 석현의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였다.

‘그때 석현이네가 이민을 가지만 않았어도……. 계속 친하게 지냈었을 텐데 말이지.’

그리고 한때 십 년이 넘게 단짝처럼 지냈던 탓인지.

오랜만에 석현을 봤음에도, 우진은 전혀 어색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야, 우진! 너 지난달에 전역했다며. 왜 이제야 연락한 거야 짜샤!”

“지난달은 무슨. 이제 3주 차라니까.”

“그거나, 그거나.”

“됐고, 밥이나 먹자 석구. 오늘 형이 거하게 한번 쏜다.”

“뭐? 네가 산다고?”

“그래. 지난번 휴가 때 니가 쐈잖아.”

“그, 그랬었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따라 들어와. 괜찮은 데 알아뒀으니까.”

석구는 우진이 부르는 석현의 별명이었다.

딱히 어떤 뜻이 있는 별명은 아니었다.

언젠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부르게 된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것과 별개로, 우진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어디서 어떻게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사실 말이었다.

“야, 괜찮은 거지? 너 등록금도 내야 하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먹기나 해 인마. 형 요즘 잘나가니까.”

“미친……! 갓 전역한 빡빡이 주제에 잘나가긴 뭘 잘나간다고.”

“너 모르냐?”

“뭐.”

“원래 남자 인생에서, 병장 때가 제일 잘나갈 때야.”

“이제 병장 아니잖아.”

“시끄러.”

석현은 우진과 달리, 집이 제법 잘 사는 편이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었지만, 전형적인 강남 중산층 집안이었으니 말이다.

서른 즈음 갑자기 석현의 가족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 갔던 사실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만나면 높은 비율로 석현이 밥을 사는 편이었었다.

사실 그래서도 우진은, 오늘만큼은 꼭 석현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전생에서의 그에게 밥을 얻어먹을 때면, 항상 미안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크……! 역시 삼겹살은 맛있어.”

“여기 찌개도 얼큰하니 맛있더라.”

“근데 비계는 왜 잘라서 찌개에 넣는 건데?”

“후, 먹알못아. 이렇게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뭐? 먹알못? 그게 뭐야.”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회귀 전에 쓰던 신조어에, 우진은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나저나 왜 나만 불렀어. 기왕 볼 거면 영준이랑 호언이도 같이 부르지.”

“아, 걔들도 다음에 한 번 같이 보긴 해야지.”

“쩝. 오랜만에 넷이 모였으면, 밥 먹고 2대 2 한 판 조지면 딱인데.”

“오늘은 겜방 안 갈 거야, 석구.”

“엥? 겜방을 안 간다고?”

“어, 안 가.”

“야. 겜 안 하면 뭐해. 당구 한판 조지게?”

“넌 뭘 자꾸 조져, 조지긴.”

“쳇.”

“오늘 할 얘기 많아. 딴 거 할 시간 없다고.”

우진의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삼겹살을 굽던 석현의 손이 순간 멈췄다.

딱히 분위기를 잡거나 한 건 아니지만, 우진이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눈치챘으니 말이다.

“뭔데? 너, 뭐 고민 있냐?”

석현의 물음에, 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민은 무슨. 형 요즘 잘나간다니까?”

“뭐냐. 진지한 척하더니 또 장난임?”

석현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본 우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하려던 이야기를 슬쩍 꺼내기 시작했다.

“야, 강석현.”

“왜.”

“형이랑 일 한번 안 해볼래?”

“일? 무슨 일?”

“용돈 벌이나 한번 해보자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석현의 집안이 잘사는 것과 별개로, 그의 주머니 사정이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교사이신 석현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엄한 분이셨고.

때문에 석현이 받는 용돈은, 통학에 필요한 차비 정도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석현이 아르바이트로 생활해 보길 원하셨다.

“내가 괜찮은 사업 아이템 하나 들고 있거든.”

“야. 너 뭐,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지?”

꽤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석현은, ‘사업’이라는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물둘이라는 나이가 사회경험이 있을 나이도 아니었으니, 사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상한 짓은 무슨 이상한 짓. 너, 나 모르냐?”

“음…….”

하지만 우진의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자, 석현은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석현이 아는 우진이라는 인물도 그 못지않게 보수적인 성격이었으며.

우진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내용이었으니 말이었다.

“자금이 필요하거나 특별히 위험한 사업이 아니야, 짜샤.”

“그럼?”

“우리 좋아하는 거 있잖아.”

“우리가 좋아하는 게 뭔데?”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드는 거.”

“……?”

우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석현의 두 눈은 점점 더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좋은 석현은 공대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어릴 적 꿈의 잔재를 아직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모형 작업실을 만든다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럼 디자인과 애들 과제도 대신 해주는 거야?”

“대신해주는 것까진 아니야. 컨셉이랑 설계는 걔들이 할 거고, 우린 그걸 만들기만 할 거니까.”

“아하.”

“우리가 뭘 안다고 과제 전부를 대신 해주겠냐.”

“그것도 그러네.”

게다가 약간의 거짓말이 곁들여진 우진의 계획까지도 제법 그럴싸해 보였으니…….

“그리고 나 군대에서 알던 선임이 건축사무소에서 일하시는데, 그쪽에서 일거리도 준다고 이미 약속하셨어.”

아무리 보수적인 석현이라 해도, 넘어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정말? 근데 우리가 건축사무소 일을 할 수 있는 게 있어?”

“모형 만든다니까.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응……?”

“건축 모형 작업이 꽤나 많은가 봐. 우리 모형 만드는 건 자신 있잖아.”

“오오, 그렇지!”

자본금부터 시작해서 설명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우진은 미리 생각해 뒀던 변명들을 활용해 결국 석현을 설득시켰다.

어쨌든 사업 얘기를 하는 것이었으니, 수익구조에 대한 설명도 빼놓을 수 없었다.

“흐음……. 네 말대로만 되면 한 달에 일이백 정도는 벌 수 있겠는데, 정말?”

“그래. 둘이 합해서가 아니고 너 혼자서 그만큼은 충분히 가져갈 수 있을 거야.”

“학교 끝나고 와서 너댓 시간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뭐, 일단 나로서는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석현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지 뭐. 까짓거, 못 할 것도 없지.”

“크, 역시 석구!”

그렇게 우진은 석현이라는 사업 조력자를 성공적으로 설득해 내었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PC방을 가는 대신, 밤늦도록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석현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진은 또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놈만큼은, 공대에서 끄집어내야 해.’

석현과 함께 일하려는 그의 계획이, 제법 괜찮은 생각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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