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자본이 필요해
위이이잉- 위이이잉-
머리맡에서 울리는 요란한 진동 소리에, 우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으, 으으……. 왜 벌써 알람이…….”
이미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지만, 우진은 제대로 잔 기분이 아니었다.
선배, 동기들과 신나게 술을 마신 우진이 귀가한 것은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그 전날 밤도 꼴딱 샜던 우진으로서는, 잠이 부족한 게 너무 당연한 것이다.
“우진이, 일어났니?”
문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우진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우진이 알람을 맞춰뒀던 시간은 정오.
그래도 여덟 시간 이상은 푹 잔 셈이었다.
“네, 일어났어요!”
“수제비 해 놨다. 나와서 먹어라.”
“알겠어요, 잠깐만요!”
우진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문밖을 나섰다.
몸이 피곤한 것과 별개로 수제비라는 한 마디에, 어느새 그의 입에는 침이 고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이주희는 2010년을 기준으로도 이미 십 년이 넘게 수제비 칼국수 집을 운영하고 계셨고.
전생에서도 우진이 숙취가 있는 날이면, 항상 어머니의 수제비로 속을 풀곤 했었으니 말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엄마가 왜 출근을 안 하셨지?’
1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한 우진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수제비 칼국수 집은 항상 월요일이 휴무였고, 우진의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가 있었으니까.
“휘유. 정신이 하나도 없네.”
따뜻한 전기장판에서 벗어난 우진은, 어느 정도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제의 술자리가 떠오른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어제는, 기대보다 훨씬 재밌었단 말이지.’
전생에서 20년을 더 살아본 우진은, 사실 대학 생활 자체에 대한 설렘은 크게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가 가진 대학에 대한 로망은, 단지 디자인과 관련된 부분들뿐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술자리 이후로, 우진의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우진이 전생에서 겪었던 술자리는 대부분 드센 현장 아재들과의 술자리, 혹은 건설사의 접대 술자리 같은 것이었고.
파릇파릇한 신입생들. 그것도 여학생 비율이 압도적인 꽃밭에서의 술자리는, 얘기가 좀 달랐던 것이다.
전생에서는 이런 것도 못 해보고 마흔 살까지 나이만 먹었었다니.
조금 더 억울해지는 우진이었다.
후르릅-
수제비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우진을 향해, 어머니 이주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얘, 천천히 좀 먹어라, 천천히. 입천장 다 벗겨지겄어.”
“걱정 마세요. 저 원래 뜨거운 거 잘 먹잖아요.”
“그래도.”
회귀 후 달라진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중에도 가장 깊게 와 닿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었다.
여느 아들내미들이 다 그렇듯.
전생의 우진은, 무심하기 그지없는 아들놈이었으니까.
‘엄니, 이번 생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호강시켜 드릴게요.’
진부한 레퍼토리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였지만, 그래도 우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사실 어머니뿐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번 생에서는 전부 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엄니, 저 나갔다 올게요!”
“어휴, 술냄시 풀 풀 풍기면서 또 어딜 가려고.”
“친구들이랑 약속이 좀 있어서요. 늦진 않을게요.”
“녀석, 체력도 좋다.”
얼큰한 수제비를 국물까지 탈탈 털어먹은 우진은, 잽싸게 옷을 챙겨 입고 집 문을 나섰다.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그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강석현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친구를 만나기 전에, 따로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보자, 시간은 충분하고…….”
손목에 찬 싸구려 가죽 시계를 슬쩍 확인한 우진.
그가 버스를 타고 향한 곳은, 송파구 문정동이었다.
* * *
2010년의 수도권 부동산 시장은, 말 그대로 침체기였다.
06년부터 시작된 전례 없던 부동산 급등기 이후.
부동산 투자 열기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재가 되어버린,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몇 달 만에 억 단위로 뛰던 강남구 아파트 대형평형들은 순식간에 수억씩 툭툭 떨어졌으며, 부동산과 관련된 기사들은 부정적인 타이틀로 도배되던 시기.
[서울ㆍ수도권 `불 꺼진 아파트' 늘어난다.]
[분양가 할인 나선, xxx 재건축아파트.]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투자처는 분명히 있었고, 우진은 그 중 확실한 투자처를 몇 군데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가진 몇백만 원 정도의 소액으로도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투자처를 말이다.
끼익-
버스가 멈추고 우진이 내린 곳은, 문정동의 로데오 거리.
정류장에서 내린 우진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대로변에 있는 커다란 모델하우스로 들어섰다.
모델하우스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쓰여 있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레이크빌 아파트 특별 할인 분양!]
[계약금 100만 원 정액제! 미분양분 계약 시, 분양가 3% 할인!]
부동산이 활황일 때 서울 아파트 분양은,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당첨만 되면 수억의 차익이 생기기 때문에,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로또 분양’이라는 이름까지 붙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하락기에는, 반대로 손해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분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할인 마트 품목들 마냥, ‘할인분양’이라는 플래카드까지 걸려있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인하는 아파트라 해서, 전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로또 분양이라 해서 계약했다가 손해를 볼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진에겐,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네.’
‘○○○레이크빌’ 이라는 아파트의 이름을 확인한 우진은, 씨익 웃으며 분양사무소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이 없어 사무실은 한가하기 그지없었고, 다섯 곳이나 되는 상담 자리 중에는 단 한 명의 상담원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 앞에 앉아, 상담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담받으러 왔는데요.”
우진의 목소리를 들은 여자 상담원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손님을 반가워해야 했지만, 우진의 앳된 얼굴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진의 외모는 아무리 높게 봐 줘야 이십 대 중반.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아파트 분양 상담을 오는 경우는, 상담원 일을 하면서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음……. 아파트 분양…… 상담받으러 오신 것, 맞죠?”
그리고 그런 상담원의 기색을 느낀 우진은,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그게 아니면 여기서 무슨 상담을 받겠습니까.”
“아, 넵. 잠시만요. 일단 평형 타입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상담원은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곧 평정심을 찾고 우진에게 설명을 시작하였다.
어쨌든 그는 지금 미분양 된 아파트 한 채라도 더 팔아야 하는 입장이었고.
이 악성 재고를 소진해 줄 손님이라면, 그의 나이가 몇 살이든 전혀 상관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이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을 즈음.
그녀는 설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그녀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으니까.
“뭐, 대충 이해했습니다.”
“아직 옵션 설명이…….”
“팸플릿 다 읽어보고 왔어요.”
“그, 그러세요?”
“59A형 두 채, 계약하겠습니다.”
“예에……?!”
우진의 말을 듣던 상담원은, 당황한 표정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부동산 불경기에 미분양분 계약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고작 5분 전에 들어온 청년이, 순식간에 두 채를 계약하겠다는 얘기를 꺼냈으니 말이다.
59A형이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25평형 아파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학생이 25평 아파트 두 채를 계약하겠다는 말에, 놀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리라.
게다가 이어지는 우진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계약금 정액제 맞죠? 백만 원?”
“네. 마, 맞습니다. 2차 계약금 약 3900만 원은 5월까지 납입하셔야 하며…….”
“미분양분이니, 전매제한은 따로 없을 거구요.”
“그, 그렇죠.”
“RR(로얄동 로얄층)남아있는 물건 있나요?”
“아마 있을 겁니다. 찾아볼게요.”
분명히 이십 대로 보이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닳고 닳은 투자자 마냥 투자 전문용어를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는 우진.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상담원은 혼란스럽다 못해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아, 분양권은 잔금 전까지 따로 취‧등록세도 없죠?”
“맞…… 습니다. 잘 아시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는 몇 살이냐, 정말 살 생각이 맞느냐.
이거 샀다가 마이너스 피*[분양가보다 시세가 떨어지는 상황]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손님에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해서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우진과 대화하던 상담원은, 순식간에 25평 아파트 두 채를 그의 명의로 계약해 주었다.
물론 계약과정에서 확인한 우진의 주민등록증을 보고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89년생이면……. 스물두 살? 아니 무슨 금수저라도 되는 건가?’
계약금 정액제로 당장 200만 원이면 두 채의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는 게 맞았지만, 당연히 추가비용은 필요하다.
우진이 계약한 아파트의 분양가는 총 4억이었고, 5월까지 그 10%인 약 4천만 원을 납입해야 했으니 말이다.
중도금 대출을 받는다면 나머지 3억 6천만 원은 준공될 때까지 낼 일이 없었지만, 어쨌든 두 채를 계약했다는 건 당장 8천만 원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정도 액수를 쓸 수 있으려면,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다 됐나요?”
“일단 절차는……. 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손님. 살펴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상담원을 보며, 우진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통장에 이제 오백만 원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무슨 표정이 될까?’
애초에 우진이 아파트 두 채를 계약한 것은, 2차 계약금 납입일이 되기 전에 프리미엄을 붙여 팔아넘길 생각으로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 5월 전에 팔면 많아야 1, 2천 정도 붙겠지만……. 그거면 훌륭하지 뭐.’
계약금 100만 원으로 매입한 미분양 아파트 두 채에 각각 프리미엄 천만 원을 붙여서 팔면, 200만 원의 투자금으로 두 달 만에 2천만 원을 버는 셈.
게다가 할인분양분을 계약한 것이었으니, 4억의 3%인 천이백만 원을 추가로 이득 보는 것이다.
두 채를 계약했으니, 이 또한 이천만 원이 넘는 수익.
복비로 백만 원 정도 빠질 것을 감안해도, 기대수익을 다 합해보면 대략 4천만 원 언저리였다.
‘어디 보자. 내일이나 모레쯤 분양가 상한제 폐지가 발표될 테고, 위례신도시 때문에 토지보상금이 이미 쭉 쭉 풀리고 있을 테니……. 어쩌면 좀 더 먹을 수도 있어.’
이것은 미래를 알고 있는 우진이기에 선택할 수 있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투자방식.
게다가 전생에 그의 상관이었던 권종우 실장이, 자신의 투자실력을 근거로 툭 하면 떠들어댔던 아파트였으니.
기억이 틀렸을 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아, 갑자기 권 실장님 보고 싶네.’
회귀하던 날까지도 함께 일했던 권종우 실장.
그의 익살맞은 얼굴을 잠시 떠올린 우진은, 피식 웃으며 동봉된 계약서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두둑한 자본금을 챙겼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 해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만으로 자산을 불릴 생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불경기에 이렇게 확실하고 좋은 투자처가 많지도 않았거니와, 우진의 목적이 단순히 ‘돈’뿐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가 하려는 일에는 자본이 필요했고, 마침 단기간에 그 자본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을 뿐이었다.
“법원으로 가려면……. 몇 번을 타야 되더라?”
우진의 다음 목적지는 서초구에 있는 법원 등기소.
자본금은 얼추 해결된 셈이니, 이제 사업자 등록을 할 차례였다.
하고 싶은 사업도 많았고 전부 잘할 자신도 있는 것들이었지만, 지금 시점에 우진이 하려는 사업은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그의 통장에 남아있는 돈 중 오십만 원 정도는, 법인사업자를 설립하는 데 쓰일 비용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