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골든 프린트(Golden Print)
일반적으로 신입생들이 오티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처음 만나는 동기들, 오티에 놀러 온 선배들과의 술자리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의 대학들은 K대의 디자인학부처럼 ‘디자인의 밤’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밤샘 술 파티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K대학이라 해서, 그런 술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티 당일 밤은 디자인의 밤으로 지나갔지만.
오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 그날 저녁에 2학년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잡혀 있었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친목도 다지고 선배들과의 안면도 트면서, 학과 생활에 대한 조언도 얻는 것이 이 술자리의 목적.
‘대면식’이라 불리는 이 술자리는 K대 디자인학부의 전통 같은 것이었고, 우진도 딱히 피해갈 생각은 없었다.
술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원만한 학교생활은 우진에게도 중요했으니까.
‘친구 많아서 나쁠 건 없지, 뭐. 다들 졸업하면 업계에서 만나게 될 확률도 높고…….’
20여 년의 세월을 미리 살아본 우진은, K대 디자인학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K대는 지금도 손꼽히는 디자인 대학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인지도가 높아지는 명문대였고.
20년 후에 얼마나 많은 업계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K대 출신으로 채워지는지, 우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에서, 우진은 학기 초 술자리에는 참석할 생각이었다.
“오빠도 그럼 참석?”
“그래. 참석할게.”
“자, 그럼 이대로 명단 짜서 예약 잡으면 되죠?”
“네, 선배님. 확인 다 끝났어요.”
“고마워요, 후배 님.”
오티에 참석했던 2학년 과대 진수현이, 1학년 임시 과대에게서 명단을 받아갔다.
1학년의 임시 과대는 명찰 번호 1번이 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김인하’였다.
“인하야, 우리 몇 명 참석이야?”
“서른다섯 명.”
“불참이 스무 명 정도 되는 거네?”
“일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 뭐.”
학교로 돌아가는 셔틀버스의 안은, 어제와 달리 무척이나 조용하였다.
다들 디자인의 밤을 불태운 여파로 인해, 차에 타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으니 말이다.
장학금 덕에 한껏 텐션이 올라있던 202호의 신입생들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대관령을 넘어 이어지는 영동고속도로가 꽉 막혀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셔틀에 앉아 눈을 감았다 뜨니, 어둑어둑해진 학교의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자, 공간 디자인과 후배님들은 이쪽으로 모이세요! 저 따라오시면 됩니다!”
2학년 과대 진수현의 인솔에 따라, 1학년 학생들은 삼삼오오 줄지어 운동장을 나섰다.
이어서 그들이 향한 곳은, <언니네 포차>라는 이름의 대학가 술집이었다.
* * *
10년도 즈음의 대학문화는, 선후배 간의 군기 같은 악 폐습이 많이 사라지던 추세였다.
하지만 디자인 대학과 같은 예체능 계열 학과의 경우 조금씩은 남아있었고, K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합리한 군기까지는 아니지만,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나 학과 활동의 강제성 같은 것이 약간씩은 남아 있던 것이다.
그것은 선후배 간의 호칭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학번이 높은 선배에게는, 첫 대면에선 무조건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했으니까.
“이야, 후배님들 많이 오셨네?”
“그러게. 우리 때는 절반도 안 왔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런 대학문화 중에서 우진에게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장기자랑’이었다.
딱히 장기자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진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2학년들이 말하는 ‘자기소개’라는 것에, 장기자랑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음을 말이다.
“별거 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후배님들.”
“그래, 그래. 서로 얼굴 익히고, 조금 있다가 자기소개나 한 번씩 하면 돼.”
실제 정신연령을 차치하더라도 우진의 나이는 스물둘.
‘내가 이 나이 먹고 장기 자랑이라니…….’
절반 이상의 2학년 학생들이 우진보다 나이가 어렸으니,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뭘 해야 하나.’
그리고 우진이 그런 사소한(?) 고민을 하고 있던 사이 <언니네 포차>는 어느새 만원이 되었다.
공간디자인과 1,2학년 학생들로, 모든 자리가 만석이 된 것이다.
이어서 대충 자리가 정해지자, 2학년 남학생 중 하나가 소주병에 숟가락을 꼽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둥글둥글하고 장난기 넘치는 인상에, 투실투실하고 커다란 덩치.
과대나 부과대는 아닌 것 같았고,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것이 갓 전역한 복학생인 것 같았다.
그가 ‘대면식’ 진행을 위해 사회를 보려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후배님들. 07학번 오윤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윤택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벌써 한 잔씩 걸친 학생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
“오윤택! 오윤택!”
“잘생겼다!!”
커다란 곰 같은 인상의 윤택이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잘생겼다는 추임새가 기분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김민주, 너. 뭘 좀 아는구나?”
“그럼, 그럼. 윤택 선배 잘생겼지. 일단 눈, 코, 입 정도는 전부 제자리에 잘 붙어 있잖아?”
김민주의 장난에 2학년 학생들은 왁자지껄 웃기 시작했고, 얼어있던 신입생들도 점점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너, 수강 신청 때 보자 김민주.”
“뭐! 왜! 왜!”
“내가 조운찬 교수님한테 말해서, 민주 너는 꼭 디지털 모델링 수업에 꽂아 넣을 거야.”
“아 선배. 잘못했어. 제발……!”
신입생은 보통 전원 모두 그 해 입학한 같은 학번 동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2학년부터는 얘기가 좀 다르다.
1학년만 마치고 휴학하는 학생들도 제법 많았고, 그들 전부 같은 시기에 복학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해서 김민주와 오윤택은, 같은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학번이 2년이나 차이 났다.
“자, 누구 때문에 갑자기 잡설이 좀 섞였는데…….”
김민주를 한 차례 째려본 오윤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튼 우리 공간디자인과 10학번 후배님들,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는 다들 아시죠?”
오윤택의 목소리에, 구석에서 1학년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대면식이요!”
그리고 목소리를 들은 오윤택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대면식이죠. 그럼 대면식의 목적은 뭘까요? 아시는 후배 님?”
“선후배 간의 돈독한 친목 도모요!”
“넌 좀 빠져 민주.”
“아 왜. 선배한텐 나도 후배 님인데.”
“우리 파릇파릇한 새내기 후배님들이랑 네가 같아?”
“우우- 선배가 후배 차별한다!”
오윤택이 특별히 끼가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면식의 사회는 자연스레 진행되었다.
2학년들의 분위기가 워낙 좋은 탓인지, 전체적으로 금방 화기애애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소개’라는 난관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 그럼 임시 과대 김인하 후배 님부터! 자기소개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김인하! 김인하!”
그 또한 무난하게 흘러갔고, 생각보다 재밌는 상황도 많이 연출되었다.
일단 첫 번째 타자였던 김인하부터, 기대 이상의 장기를 선보인 것이다.
“와, 저 친구 어디서 백댄서 알바라도 한 것 아냐?”
“진짜 춤 잘 춘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이돌 덕후였던 김인하는 왜소한 체구임에도 멋진 춤을 보여줬으며.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도, 개그맨 뺨치도록 성대모사를 잘하는 친구도.
중간중간 대면식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입생들이,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압박감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빠. 장기자랑 뭐 할 거야?”
한소연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한’ 씨인 그녀의 학번은 거의 끝 번호였기에, 우진보다도 더 뒤 순번이었고.
그녀는 수준급의 노래 실력으로 장기자랑을 때운 혜진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엄청 태평하네. 뭐 준비한 거라도 있는 거야?”
“아니. 딱히 막 대단한 걸 준비한 건 아니지만…….”
사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우진은 오히려 소연보다 더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좋아. 건설사 회식 20년 짬밥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혜진의 차례 이후 몇 번의 순서가 유야무야 지나가고 나자, 드디어 우진의 자기소개 차례가 왔다.
“다음 순서는……. 서우진 후배 님!”
“우와왁!”
“우진오빠! 파이팅!”
우진이 호명되자, 간단히 통성명을 한 몇몇 동기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2학년 학생들이 과장된 응원을 쏟아내었고.
멋쩍은 표정으로 일어난 우진은, 천천히 윤택이 있는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10학번, 스물둘 서우진입니다!”
“스물둘이시면……. 삼수생이셨겠군요?”
“아, 아닙니다, 선배님. 군대를 미리 다녀와서 늦게 입학한 거라…….”
“오오……! 군필 신입생이라니!”
우진의 대답에, 술집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우진의 케이스가 흔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웅성임 중에는,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08, 09학번 남학생들의 한숨이 가장 컸다.
“이야. 저 후배 님 군대도 다녀오셨대. 부럽지, 현수?”
“후우…….”
“휴학했으면 군대나 다녀오지 그랬어.”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군필이라 해서 신입생 장기자랑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
“우리 잘생긴 군필 후배 님은, 장기자랑 준비 좀 하셨습니까?”
학번은 차이나도 군번은 비슷한 오윤택이, 장난스럽게 군대식 말투로 포문을 열었고.
생각해 둔 것이 있었던 우진은, 씨익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예, 선배님. 물론입니다.”
“오오……! 역쉬! 군필!”
우진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좌중은 더욱 기대에 찬 표정이 되었다.
신입생의 입에서 저렇게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올 때면, 대부분 볼 만한 장기자랑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이 준비한 장기는…….
지독하기로 소문난 건설사 회식 자리의 20년 차 내공이 담긴, 초강력 폭탄주였다.
“여기 지금 테이블이……. 총 열다섯 테이블이군요.”
“뭘 하시려고?”
“제가 테이블마다, 전부 다른 종류의 폭탄주를 말아드리겠습니다.”
“음……?”
생각지도 못했던 우진의 이야기에,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간 정적에 빠졌다.
뭔가 장기자랑이라고 하기엔, 생각지도 못했던 장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저벅- 저벅-
가장 가까운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간 우진이 폭탄주 제조를 시작하자…….
탁- 촤아악-!
그 화려한 손놀림에 매료된 학생들은, 아예 일어서서 그 모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오오오!”
“대박!”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능숙한 폭탄주 제조실력.
치이이이익-!
우진이 쏘아낸 맥주 거품으로 인해 글라스에 절반쯤 찬 폭탄주가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그것을 잽싸게 집어 든 우진이, 테이블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김민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혹시 ‘회오리주’라고……. 들어는 보셨습니까?”
“……?”
“한잔하시죠. 선배님.”
“나……? 나요?”
생각지도 못했던 우진의 제안에, 김민주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윤택이, 이때다 싶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오오……! 김민주! 당연히 원샷이겠지?”
한껏 흥이 난 학생들의 추임새는 덤이었으며.
“김민주! 당연히 원샷이겠지?!”
2학년 중에서도 흥이 많기로 소문난 김민주는…….
“에라 모르겠다!”
그대로 잔을 받아 단숨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오……! 오오!”
“역시 선배님!!”
꿀꺽- 꿀꺽-
이어서 찰진 목 넘김 소리와 함께, 각종 알콜이 뒤섞인 폭탄주 한잔을 그대로 원샷 하는 김민주.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고.
“크으으……!”
폭탄주를 전부 마신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는지, 모두의 시선이 민주를 향해 있었다.
이어서 잠시 후.
조금 떨떠름했던 김민주의 표정은, 점점 더 묘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거…….”
단숨에 들이킨 정체불명의 폭탄주가,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으니 말이었다.
“뭐 이렇게 맛있어……?”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언니네 포차>에는 학생들의 환호성이 가득 들어찼다.
“우와아아악!”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