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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2화 (12/315)

12화

골든 프린트(Golden Print)

우진을 비롯한 많은 신입생들은, 조운찬 교수가 올해 디자인의 밤 행사를 총괄하는 교수라고 생각했었다.

학과의 내부사정을 잘 모르니, 행사를 소개한 교수가 책임교수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의 밤은, 신입생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K대에서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였다.

강당에 나타난 교수는 조운찬 하나뿐이었지만.

사실 더 많은 주임 교수들이 오티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학과별로 출품된 디자인의 밤 작품들을, 다각도로 채점해야 했으니 말이다.

“어이, 조교수. 올해는 괜찮은 작품 좀 있던가?”

“아! 김 교수님 오셨습니까!”

채점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공간디자인과의 두 교수는, 서로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디자인의 밤을 열었던 조운찬 교수와, 그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교수인 김기환 교수.

조운찬이 유학파 디자이너라면, 김기환은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실무 권위자였고.

두 교수는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성향도 상극에 가까웠지만, 사적으로는 제법 친한 사이였다.

“저도 아직 보러 가는 길이라 확인은 못 했습니다만, 조교들 얘기 들어보니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조운찬의 대답에, 김기환의 주름진 눈이 살짝 커졌다.

“그래?”

“교수님 윤호 아시죠?”

“알지. 얼마 전까지 내 사무실에 있던 놈인데.”

“윤호가 그러는데, 스파이가 하나 있는 것 같답니다.”

“스파이? 그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다른 학교 졸업반이 재입학이라도 한 줄 알았다더라고요.”

조운찬이 말하는 ‘윤호’라는 인물은, 2년째 공간 디자인과의 조교를 하고 있는 강윤호였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기환은, 조금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윤호가 막 던지는 스타일은 아닌데…….’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인 윤호가 저런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면, 빈말이 아닐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이거……. 기대되는데? 기대해도 되는 거지? 조교수.”

김기환의 말에, 나란히 걷던 조운찬이 웃으며 답했다.

“기대해서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교수님. 실망 한번 하면 되는 거죠 뭐.”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곧 목적지에 도착해 채점장으로 들어섰다.

채점장이라고 해 봐야 별다른 건 없었다.

리조트에서 가장 큰 호실 중 하나를, 공간 디자인과 작품 채점장으로 쓰는 것뿐이었으니까.

끼익-

그리고 말이야 기대하네 마네 해도, 채점장에 들어서는 두 사람은 별생각이 없었다.

날고 기어봐야 아무것도 배운 것 없는 신입생이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기저에 깔려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호실 안에 일렬로 배치된 작품들을 확인한 순간.

“……!”

“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윤호가 말한 작품이……. 아무래도 저거인가 본데?”

“그러게요 교수님. 하하.”

작품 자체가 11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그중 한 작품이 너무 눈에 띄었던 것이다.

* * *

우진은 디자인의 밤 주제를 조운찬 교수가 낸 게 아닌가 짐작했지만, 사실 이번 주제의 출제자는 김기환이었다.

매년 디자인의 밤 주제는 1학년 메인 과목 수업인 ‘기초 공간 조형’을 맡은 담당 교수가 내게 되어 있는데.

올해 해당 과목의 담당 교수가 김 기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김기환은 작품들을 보는 순간, 그것들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는지, 그대로 눈에 보였던 것이다.

“봐줄 만한 작품이……. 너댓 개 쯤은 되는군.”

김기환의 말에, 옆에 있던 조운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실상 그 작품들을 제외하면……. 미완성이라고 봐야겠군요.”

채점장에는 두 교수 말고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김기환과 마찬가지로 ‘기초 공간 조형’ 수업을 맡은 고승훈 교수. (김기환은 기초 공간 조형 A반을 맡았고, 고승훈은 B반을 맡았다.)

그리고 1학년의 기초적인 디자인 툴 수업인 ‘기초 그래픽’수업을 맡은 이아랑 교수.

그 외 타 학년 수업을 맡은 몇몇 의 교수들과 오티에 따라온 세 명의 조교까지, 대략 열댓 명의 사람들이 심사위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김기환의 의견에 딱히 이견은 없었다.

누가 봐도 그가 찍은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너무 엉성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 모두의 시선은 이미 하나의 작품에 꽂혀 있었다.

가장 연배가 높은 김기환 교수가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김기환이 그의 반대편에 서 있던 부교수 하나를 불렀다.

“자네.”

“네, 교수님.”

“자네라면 이거, 시공할 수 있겠나?”

김기환의 말을 들은 장내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학생이 디자인한 건축 모형을 가지고 시공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는데.

누구보다 현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자부심이 강한 김기환 교수가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뿐.

김기환의 부름을 받은 부교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형 자체는 잘 만들었지만……. 이렇게 지은 집에 살다가는 척추 나갑니다, 교수님.”

“하하.”

부교수의 말을 이해한 사람들은, 저마다 실소를 흘렸다.

김기환이 가리킨 모형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했지만, 스케일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너무 멋진 외관에만 치중한 나머지, 휴먼 스케일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려면 허리를 반쯤 접어야 했고, 안방이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에는 침대 하나 제대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

부교수의 대답을 들은 김기환이, 이번엔 그 옆의 다른 작품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이번에도 부교수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스케일만 놓고 보자면 방금 전 작품보다야 낫지만……. 현대 건축기술로는 건축이 불가능하겠죠.”

부교수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아예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의 말처럼 두 번째 작품은, 건축의 역학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기하학적 형태를 가진 건축물이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웃던 조운찬이,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래도 창의성은 높게 평가할 만 하군요.”

“그건 그래.”

“달에서는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후후.”

조운찬의 농담에 가볍게 웃어 보인 김기환이, 그 옆의 작품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채점실을 가득 채우던 웃음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이어서 김기환은, 다시 부교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지?”

그의 말에, 부교수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이거……. 지을 수 있냐는 말씀이시죠?”

“그래.”

김기환이 짧게 대답하자, 부교수는 조금 더 가까이 모형 앞으로 다가왔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거……. 신입생이 한 거 맞습니까?”

“일단은, 그렇다는구만.”

“어디 모델하우스 같은 데서 훔쳐 온 건 아니겠죠?”

“결론부터 얘기해 봐, 결론부터.”

모형의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온 부교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꼼꼼히 모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이 다시 떨어졌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 모형 역시 시공이 가능한 완성도는 아닙니다.”

김기환은 입을 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걸 만든 친구들한테 시간을 며칠만 더 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군요.”

부교수의 대답이 끝나자, 좌중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가 과 내에서 인지도가 큰 교수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작은 건축사무소를 운영했던 경력이 있는 실무자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누구보다 실무에 빠삭한 김기환 앞에서 빈말을 할 리도 없었으니, 그의 말에 과장이 섞여 있을 리는 없었다.

조용하던 김기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자네, 그거 아나?”

“네?”

“이번에 내가 경연주제에 부록으로 첨부했던 지적도 말이야.”

“네, 교수님.”

“그거 실제 경기도 지적도에서 따 온 거거든.”

모든 땅은 그 쓰임새에 따라 분류된다.

크게는 토지(土地)와 임야(林野)로 구분되지만, 토지 안에서도 좀 더 세분화되어, 여러 가지 용도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그렇게 분류된 땅을 필지별로 구분하고 경계를 그어놓은 것이 바로 지적도(Cadastral Map)였다.

하여 김기환이 이번 경연 조건지에 이 지적도를 첨부해 놓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지적도를 통해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어울리는 건축물을 디자인하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가지고 지적도를 조건지에 넣은 김기환조차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근데 지금 내가 이 모형을 살펴보면서……. 좀 재밌는 걸 찾았어.”

부교수는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재밌는 거라시면……?”

툭툭-

모형이 올려진 다이를 툭툭 건드린 김기환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제시한 필지가 제2종 주거지역이거든?”

김기환이 들고 있던 지시봉이, 건축모형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데 이거 대충 면적 계산해 보면, 묘하게 용적률이 맞아떨어질 것 같단 말이지.”

아무리 김기환이 실무와 현장을 중요시 생각한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토지의 용도에 맞게 건축법을 고려하여 모형을 설계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수준의 실무설계는, 고학년 학생들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만들어진 깔끔한 건축모형은, 묘하게 그런 부분들이 맞아떨어졌다.

마치 지적도에 명시되어 있는 토지의 용도에 따라, 설계를 신경 쓴 것 처럼 말이다.

“우연일까?”

김기환의 물음에, 부교수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흐음…….”

“3학년도 과제를 그렇게 해오는 놈들은 없습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잘 맞아떨어진 거겠지요.”

부교수의 말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기환도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의 속마음은 조금 다른 상태였다.

‘우연이라……. 그렇다고 하기엔, 토지 활용을 정말 맥시멈까지 뽑아냈는데…….’

모형 앞에 붙어있는 ‘202호’라는 딱지를 한 차례 응시한 김기환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본능은, 이 건축모형의 제작과정에서 건축법이 고려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뭐, 사실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겠지.”

김기환이 다시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올해 장학생들은, 이미 정해진 것 같으니 말이야.”

“그렇습니다.”

김의환의 말에, 장내에 있던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 채점실 안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교수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공간 디자인과의 올해 디자인의 밤 선정 작품은, 채점이 시작될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모형을 한 번 더 응시한 김기환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쩌면 올해는 좀 재밌을지도 모르겠어.”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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