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골든 프린트(Golden Print)
모든 건축설계는 평면(Floor Plan)부터 시작된다.
디자인될 공간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면적 분할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도면이 평면도이기 때문이다.
같은 넓이의 공간이라도 어떻게 공간을 분할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공간이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평면만 잘 뽑아내면, 공간 디자인의 절반은 성공했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진이 가장 먼저 그린 도면도 평면도였다.
디자인 회의에서 이야기된 대로 필요한 공간들을 평면도에 배치해 보기 위해, 러프 스케치 평면도를 그린 것이다.
우진은 거침없었다.
전생에서는 직접 디자인한 공간의 평면을 그려본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실제 시공된 실시설계 도면도 수백 장 이상 그려본 게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얀 트레이싱지(Tracing Paper) 위를 쭉쭉 달려나가던 그의 펜대는, 순간 브레이크라도 걸린 듯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지?’
우진이 그리던 도면 위.
그의 시선이 머문 한쪽 부분에,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너무 집중했더니, 헛것이 보이나?’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얇고 투명한 금빛 유리판처럼, 우진의 도면 한 켠에 떠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
우진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고, 다음 순간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 환영……?’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빛 물체 위로, 우진의 손이 그대로 통과되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어디 창틈으로, 햇빛이라도 새어 들어오는 게 아닌지 착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미 창밖은 어두워 진지 오래였다.
“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우진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하지만 도면 위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금빛 물체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펄럭-!
심지어 도면이 그려진 트레이싱지를 한 손으로 잡아당겨 봐도, 펄럭이는 종이의 표면을 따라 금빛 물결은 그대로 출렁였다.
‘귀신이라도…….’
그리고 그 순간.
우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잠깐. 그때랑 비슷한 느낌이잖아?’
우진이 과거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그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는 공간인 작은 단독주택.
그곳에서 보았던 환영의 느낌이, 이 금빛 물체와 너무도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곳에서 보았던 환영이 좀 더 또렷하고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지금 우진의 도면 위에 떠 오른 황금빛 물체는 작고 투명하고 얇았지만.
우진이 회귀 전에 보았던 환영은, 사실 그 집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우진은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회귀 전에 봤던 환영도 그에게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해를 끼치지는 않았었다.
‘그래. 과거로 돌아오기도 했는데, 이깟 게 뭐 대수라고.’
하여 우진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눈앞에 나타난 이 기이한 현상을, 분석해보려 한 것이다.
‘이 황금빛은 뭘 의미하는 걸까? 내게 도움을 주려는 걸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렇게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곧 우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동기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으니까.
“형, 갑자기 왜 그래?”
“으응?”
“그래, 오빠. 갑자기 멍하게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아, 아냐. 잠깐 딴생각을 했네.”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믿게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일단 도면 위에 나타난 환영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하였다.
지금은 타임 어택이나 마찬가지인 디자인의 밤이었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으니까.
“선빈아.”
“응?”
“네가 윤정이랑 같이, 3층 평면도 한번 구상해봐.”
“알겠어.”
“혜진이랑 소연이가 1층 구조 잡고.”
“오케이.”
“문제없지.”
“다들 계단실 위치만 정확히 맞춰주면 돼. 나머지는 어차피 다 같이 다시 봐야 하니까, 일단 러프하게 위치만 잡아봐.”
“그럴게.”
팀원들에게 빠르게 작업을 분배한 우진은, 다시 자신이 맡은 2층 평면도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의문의 황금빛 환영에 대한 것은, 경연이 끝난 뒤에 고민해보기 했다.
‘평면도만 내가 가져가면……. 이 황금빛이 어디 사라지진 않겠지.’
그런데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어, 어어……?”
우진의 입에서 이번에는, 아예 육성이 터져 나왔다.
“오빠, 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심지어 우진은, 팀원들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조차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럴 수가!’
우진은 지금 당황이나 놀람의 감정을 넘어, 경악하고 있었다.
* * *
우진의 펜대가 황금색 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그렇게 그려진 사각형의 실루엣 위에, 새하얀 금빛 환영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어서 도면 위에 완벽히 겹쳐진 금빛 환영은, 마치 눈 녹듯 트레이싱지 위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우진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앞에 떠올랐던 황금빛 물체는, 그가 그려내야 할 도면의 일부였다는 것을 말이다.
‘말도…… 안 돼.’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금빛 홀로그램에 따라 도면 일부를 채워 넣은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2층 평면에 대한 고민도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 공간은 원래 이 자리에 이렇게 생겼어야 한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2층의 평면도가 완성되어 버렸다.
‘여기에 펜트리(pantry)가 들어가고 부엌과 거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완벽해. 동선 낭비까지도 싹 다 해결됐어!’
우진은 말 그대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지금, 완벽한 공간을 환영을 통해 엿본 기분이었다.
마치 퍼즐의 히든피스 한 조각이 끼워지면서,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퍼즐 조각이 완성된 것처럼 말이다.
툭툭-
이상함을 느낀 소연이 다가와 어깨를 두들겼지만, 우진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다, 다들 이리로 와봐.”
“응? 아직 평면 완성 못했는데?”
“무슨 일인데, 형.”
우진은 아직도 손끝에서 저릿하게 느껴지는 이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3층으로 구성된 모든 평면을 이대로 완성하고 싶었다.
“계단실 위치 왼쪽으로 천삼백만 조정하자.”
“천삼백이면……. 1.3미터 말하는 거 맞지?”
“응. 현장에선 전부 미리미터 단위로 얘기하더라고.”
흥분한 우진의 이야기에, 선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형 그런데 계단실 이렇게 옮겨버리면, 3층에 만들기로 했던 서재 위치가 애매해지는데?”
하지만 우진의 대답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서재랑 패밀리 룸 위치를 바꿔보자.”
“이렇게?”
“그렇지. 그리고 계단실이랑 서재 사이에, 작은 화장실을 하나 끼워 넣는 거야.”
선빈은 그렸던 러프 스케치 위에, 우진이 이야기한 대로 도면을 다시 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
선빈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렇게 하니까 훨씬 더 그림이 예쁜데?”
“그렇지?”
이번에는 소연이 물었다.
“그럼 오빠. 1층에 두기로 했던 게스트 룸이랑 작은 거실은?”
계단실의 위치가 바뀌면, 모든 도면이 조금씩이라도 조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그 모든 공간분할이 머릿속에 떠오른 우진은, 곧바로 소연의 스케치 위에서 펜대를 슥슥 움직였다.
“굳이 필로티랑 실내공간을 딱 잘라 나눌 필요가 없었어.”
“으음……?”
“이렇게 주차공간이 들어갈 필로티를 중앙으로 빼고, 실내공간을 그 주변으로 둘러치면…….”
“오……!”
우진이 그리는 양을 지켜보던 혜진의 동공이, 점점 크게 확대되었다.
우진의 손에서 고쳐진 새로운 평면이, 그녀가 보기에도 훨씬 더 세련되게 변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탄성을 터뜨린 것은, 공간감이 좋은 선빈이었다.
“와……! 잠깐. 형, 이러면 1층 벽체는 완전히 다 통유리로 하는 게 어때?”
“흐흐, 너도 그 생각 했냐?”
“이거 가운데 차고지에 슈퍼카 한 대 세워두면……. 완전히 전시 부스 느낌 나겠는데?”
선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진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거실 구석으로 움직였다.
아직까지 아무도 건들지 않은, 건축 모형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곳.
클라이언트가 자동차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조건지에 명시되어 있어서인지, 주어진 재료 중에는 작은 자동차 모형들도 있었다.
“좋아. 이거네.”
소연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중얼거렸고, 다른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작업에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 * *
디자인의 밤은, 제법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K대학교의 행사였다.
30여 년 전 처음 K대 디자인학부가 설립되었던 그해부터 오늘까지.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개최된 행사가, 바로 디자인의 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30년이 지나는 동안, 디자인의 밤이 같은 형식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 디자인의 밤은 고작 한두 시간 정도의 짧은 행사였고.
그 안에 간단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는 정도로 경연이 진행됐었으니 말이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밤샘 작업 경연이 되어버린 건데?”
“그건 나도 모르지. 으……. 졸려 죽겠다 진짜.”
아침 10시가 되면 조교들은 모든 호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작품을 수거한다.
개중에는 아예 경연을 포기한 호실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K대 디자인학부에 입학할 정도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 학생들이었고.
그런 학생들에게 경쟁심과 승부욕이 없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해서 총 쉰다섯 명이 참가한 K대 공간 디자인과 디자인의 밤에는, 정확히 11개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호실의 모든 학생들이, 경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다.
“하……. 하얗게 불태웠다…….”
“마무리 작업이 좀 덜 됐는데 어쩌지?”
“몰라. 너무 욕심부렸나 봐. 흑…….”
거의 녹초가 된 디자인학부의 학생들은, 늦은 아침 식사 후 시간에 맞춰 삼삼오오 대강당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들 중, 표정이 밝은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하룻밤 만에 컨셉 기획부터 시작해서 모형까지 뽑아낸 작업이, 만족스럽게 완성되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디자인의 밤에 출품되는 작품들 중, 미완성인 경우가 절반 이상일 때도 많았다.
“장학금은 물 건너간 건가?”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시간이 너무 부족했잖아…….”
“우리만 시간 부족했겠어? 다른 호실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가?”
“뚜껑 열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학생들은 저마다 밤새 불태웠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호실별로 배정된 위치에 차례대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당연히 우진을 위시한 202호 학생들도 있었다.
“와, 생각해 보면 진짜 아슬아슬했다. 그지, 선빈아?”
“그러니까. 우진이 형 덕에 진짜 엄청 빠르게 작업한 것 같은데, 그래도 시간이 모자랄 뻔했네.”
다른 호실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지난밤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202호의 신입생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다섯 명 모두의 얼굴이 빠짐없이 밝다는 점이었다.
“장학금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게.”
중얼거리듯 이야기하는 혜진을 향해, 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한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선빈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 못 받아도 후회는 안 해.”
선빈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정말?”
“정말이야.”
잠시 뜸을 들인 선빈은, 어깨를 으쓱 하며 말을 이었다.
“아쉽긴 하겠지만, 후회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어차피 다시 어제로 돌아가도, 그것보다 잘 만들 자신이 없거든.”
선빈의 대답에, 202호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빨리 결과나 나왔으면 좋겠다.”
“나두, 나두.”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대강당은 금세 학생들로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곧 오리엔테이션의 폐회식이 진행되었지만, 딱히 그것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없었다.
다들 밤을 꼬박 샌 상태라 정신이 몽롱하기도 했으며, 지금 신입생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디자인학도 여러분의 대학 생활에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입학식 때 뵙겠습니다.”
기획부 총장의 진부한 축사를 마지막으로, 간결한 폐회식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강당에 앉은 디자인학부의 신입생들은,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들 모두 오늘 이 자리에서, 장학생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디자인의 밤을 열었던 조운찬 교수의 발걸음이, 조용한 강당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단상 위에 올라온 조운찬은, 마이크를 잡는 대신 단상 위에 올려진 노트북의 스페이스 바를 가볍게 두들겼다.
탁-
그러자 폐회식이 끝나면서 까맣게 꺼졌던 대강당의 커다란 스크린에 다시 환한 빛이 쏟아졌고.
“……!”
“와아아!!”
강당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너도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 화면에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이름을 찾은 우진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