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0화 (10/315)

10화

오리엔테이션

팸플릿의 내용은 총 두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A파트에는 ‘디자인의 밤’이라는 행사의 취지와 진행 일정, 그리고 장학생 선발방식 등이 적혀 있었으며.

B파트에는 각 학과별로 다른 경연주제가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먼저 A파트의 내용을 읽던 신입생들은, 다들 조금씩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경연의 진행방식부터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작년까진, 개인전이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다섯이 한 팀인 거잖아?”

지하철에서 혜진이 우진에게 이야기했듯.

작년까지 디자인의 밤 경연방식은, 모든 신입생이 각각 한 작품씩을 출품하는 개인전이었다.

그리고 그 중 1~3등까지를 선정해, 등수에 따른 장학금을 각각 수여하는 방식.

하지만 지금 팸플릿에 명시된 내용을 보면, 올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각 학과별로 1등 한 팀만 뽑고, 그 팀 전원에게 반액 장학금이라…….”

“장학금 총액 자체는 조금 늘어난 셈이지.”

“그런데 왜 이런 방식으로 바뀌었을까?”

“글쎄.”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경연방식이 바뀐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A파트의 최 하단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2010 디자인의 밤 수상작은, 당해 졸업 전시에 함께 전시됩니다.]

수상작이 졸업 전시에 함께 전시된다는 것은, 일견 수상방식이 바뀐 것과 연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연관성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작품의 퀄리티.

아무리 한국 최고의 디자인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라 해도 신입생들은 신입생들이었고.

하룻밤이라는 제한시간 안에 신입생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의 완성도는, 아무래도 엉성할 수밖에 없다.

한데 K대학교의 졸업 전시는 수많은 업계 관계자들과 유명 디자이너들도 방문할 만큼 커다란 규모의 디자인 전시인데다, K대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연례행사였기 때문에.

디자인의 밤에서 배출된 작품의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서 팀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이 어찌 되었든, 지금 신입생들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 이 경연의 ‘룰’ 이었으니까.

일단 경연방식이 작년과 같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작품 출품까지의 데드라인이, 다음날 오전 10시라는 것.

“오늘 잠은 다 잤네.”

“흐으으.”

하지만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학생들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들 의욕이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A파트를 꼼꼼히 다 읽은 다섯 명은, 이제 경연의 주제가 담겨있는 B파트 팸플릿을 바닥에 펼쳤다.

* * *

2010 디자인의 밤, 공간디자인학과의 경연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를, 의식주라고 부릅니다. 입을 것(衣), 먹을 것(食). 그리고 생활하는 곳(住).]

[때문에 모든 건축은, 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은 학부 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첫 번째 공간을 디자인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디자인할 첫 번째 공간으로 집(宙)이 선택된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말은 거창했지만, 결국 주거공간이 주제라는 이야기.

여기까지만 보면 지난 주제들과 다를 바 없이 포괄적인 건축주제였지만.

이다음부터가 이번 경연에서 새로 추가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건지’였다.

[조건 1. 클라이언트는 40대 중반의 남성입니다. 그에게는 동년배의 아내가 있으며, 갓 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2. 클라이언트의 직업은 소설 작가이며, 그의 아내는 의류 디자이너입니다.]

[조건 3. 클라이언트는 자동차를 무척이나 좋아하며, 아내는 영화를, 딸은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조건 4. 필지(筆地)의 면적은 40평이며 층수 제한은 5층이고, 높이 제한은 12m입니다. (3p. 지적도 첨부)]

[조건 5. 클라이언트는 충분한 예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터무니없이 낭비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지난 경연주제에도 조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조건이 부여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신입생들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202호실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와, 지훈이한테 이런 얘긴 못 들었는데…….”

“이 조건들을 최대한 충족해야겠지……?”

“그러면서 디자인도 좋아야겠고.”

학생들은 각자 골똘히 생각에 감겼다.

사실 이 조건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어떻게 멋진 집을 그려낼지만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온 신입생들이 건축디자인을 떠올릴 땐, 멋지고 예쁜 집을 짓는다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해내기 쉽지 않았으니까.

물론 우진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신입생들과 사고구조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대지면적 40평에 층수, 층고 제한이 저 정도면……. 3인 가족 살기에는 넓다 못해 광활하겠네.’

현장 경력 20년이 넘은 우진은, 오히려 이렇게 조건지가 있는 것이 더 편했다.

그가 전생에 해왔던 모든 건축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서 시작해서 그들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우진은 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것이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 다들 한 번씩 읽었지?”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진 우진의 목소리에, 나머지 넷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입을 향했다.

“다들 알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아. 당연히 한숨도 안 잤을 때가 기준이야.”

우진의 말에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데드라인까지 주어진 시간은 대략 16시간 정도.

모형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기엔 무척이나 빠듯한 시간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섯 명 모두 입시 준비를 하는 동안, 모형이라면 수백 번이 넘게 만들어보았으니 말이다.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 우린 두 시간 안에 모든 걸 결정해야 돼. 그러려면 지금 당장 회의를 시작해야 하고.”

우진의 말에 동의한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촐싹거리던 혜진마저도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들 의욕이 불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충 분위기가 잡히자, 우진은 본론을 꺼내었다.

“혹시 여기서, 건축 모형 만들어 본 사람 있어?”

다들 모형이야 수없이 만들어봤겠지만, 그것과 건축 모형은 다르다.

입시 미술에서 하는 모형제작은 추상적이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모형이었고.

지금 신입생들이 만들어야 할 건축 모형은, 말 그대로 건축물을 모형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도 대답을 않자, 우진이 다시 말했다.

“내가 방학 때, 현장사무소에서 꽤 여러 번 알바 했었거든?”

선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형은, 건축 모형도 만들어 본 거야?”

혜진도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얘길 꺼냈겠지?”

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실 현장사무소에서 건축 모형 만드는 알바를 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우진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할 명분이었으니까.

“내가 한번 방향을 제시해 볼게. 물론 디자인 방향성을 말하는 건 아냐. 내가 하려는 건 단지 교통정리 정도니까.”

우진의 말에 202호의 신입생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영부영 시간을 날리는 것 보다, 우진의 제안을 따르는 게 나쁠 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202호의 디자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류선빈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건축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제법 큰 건설사를 운영하는 중견기업의 오너.

선빈은 어릴 적부터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였고, 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뛰어난 건축 디자이너가 되어, 아버지보다 더 멋진 건물을 짓는 건축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처럼, 랜드 마크가 될 수 있는 멋진 건물을 설계하는 디자이너가 될 거야.’

물론 건설업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그의 아버지는, 똑똑한 선빈이 다른 길로 가기를 원하셨다.

선빈이 가진 꿈은 한국에서 이뤄내기 너무도 힘든, ‘이상’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빈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고.

결국 건축디자인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K대학교의 디자인학부에 입학하였다.

‘내가 해냈어……!’

선빈이 전액 장학금까지 타내며 수석으로 학부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꿈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한번 해 보거라. 졸업까지 열정을 잃지 않는다면, 유학도 보내주도록 하마.”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선빈은 수석 입학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 크게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뤄낸 결과는, 스무 살 청년이 자부심 갖기에 충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고 말이다.

‘여길 수석으로 졸업하고, AA스쿨에 입학할거야.’

AA스쿨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대학이었다.

바틀렛(Bartlett)도 AA스쿨과 함께 양대 산맥으로 꼽히기는 하지만, 선빈이 가장 진학하고 싶은 학교는 AA스쿨이었다.

이유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 렘 콜하스(Rem Koolhaas) 등이 졸업한 학교가, AA스쿨이었을 뿐이었다.

‘난 할 수 있어.’

선빈은 자신 있었다.

K대의 디자인학부가 한국에서는 최고의 명문이었지만, 어쨌든 수석 입학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자신감은, 이상한 시점에 조금씩 꺾이고 있었다.

“자, 조건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건물은 최대 5층이야. 하지만 실질적으론 4층을 초과해서 지으면 안 돼.”

“왜?”

“5층으로 지으면, 층고가 너무 낮아지거든. 조건에 명시된 12미터를 넘기면 안 되니까.”

“한 층당 3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것도 솔직히 아주 넉넉하진 않아.”

“그래?”

“이 정도 면적에 고작 세 가족이 사는 단독주택을 짓는다는 것부터가 프리미엄 하우스라는 얘기고, 그런 고급 주거공간의 천장고는 3미터 이상 올려주는 게 좋거든.”

“아하.”

“층간 간격까지 생각하면 한 층당 4미터 정도 잡는 게 괜찮을 거야.”

“그럼 3층?”

“난 그렇게 생각해.”

선빈은 디자인의 밤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경연에서도, 내심 자신이 돋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우진이 처음 팀을 주도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실질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개개인의 실력이 드러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디자인 회의가 시작되자, 뭔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형……. 대체 뭐지?’

나이가 두 살 많기는 하지만, 분명 자신과 같은 신입생인 우진.

그의 모습에서, 선빈이 막연히 상상했던 ‘건축 디자이너’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게다가 단독 세대가 사는 주거공간에서, 층수가 많은 건 생각보다 불편해. 그렇다고 엘리베이터를 만들기엔, 대지면적이 너무 좁고.”

단지 인상 좋은 동네 형 정도의 이미지였던 우진이 갑자기 활약하기 시작하자, 선빈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3층으로 가고, 1층 절반 정도는 필로티로 쓰자. 어차피 3인 가족이면 2, 3층만 써도 주거공간은 넉넉히 뽑힐 거야.”

“필로티에 주차공간을 만들면, 자동차를 좋아하는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킬 수도 있을 테고.”

우진이 도화지 위에서 슥슥 펜대를 놀릴 때마다 그럴싸한 투시도가 그려져 갔고,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들은 신이 나서 우진과 어우러져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심지어 그 신난 팀원 중에는, 어느새 선빈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 옥상은 루프탑으로 가는 게 어때요?”

“오호, 그거 괜찮은 의견인데?”

“여기 지적도상으로 보면 제법 넓은 강이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거든요. 이쪽으로 테라스를 뽑으면…….”

“좋아. 리버뷰 괜찮게 뽑히겠네.”

그리고 그렇게 두 시간 정도의 디자인 회의가 끝났을 때.

“우와……! 오빠. 이대로만 나오면 진짜 그럴싸하겠어.”

“이러다 우리 장학금 타는 거 아냐?”

“선빈이는 이미 전액 장학인데, 장학금 안 나오면 어쩌지?”

“바보야. 다음 학기 장학금으로 밀어주겠지. 아니면 따로 입금해 주던가.”

“아하……!”

그렇지 않아도 열정 넘치던 팀원들은 거의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우진을 보는 선빈의 눈빛에는, 뭔가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앞으로 이 형 뒤만 졸졸 따라다녀야겠어. 아니, 잠깐. 수석은 내가 해야 하는데…….’

처음 디자인의 밤이 시작되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선빈의 심리상태.

하지만 선빈은 알 수 없었다.

컨셉 회의가 끝나고 도면 작업이 시작된 지금.

“……!”

자신감 넘치게 팀을 리드하던 우진의 두 눈이, 갑자기 화등잔처럼 커진 이유를 말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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