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오리엔테이션
우진의 명찰 번호는 26번이었고, 혜진의 명찰 번호는 30번이었다.
즉 두 사람은, 같은 호실을 쓰게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호실이 같다 해서, 남녀 혼숙은 아니다.
호실 안에는 방이 두 개 따로 있었으니까.
그리고 신입생들은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오늘 그들 중 대부분은 잠을 잘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뭐야, 너도 202호야?”
“오빠도?”
우진은 피식 웃었다.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혜진이 같은 학교에 같은 과. 게다가 오티에서 같은 호실까지 쓰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신기한 면이 있었다.
“뭐지.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나쁘다고 해야 하나…….”
“시끄러.”
우진의 장난기 어린 말에, 혜진이 툭 쏘아붙인다.
그리고 티격태격하는 것과 별개로, 둘의 시선은 숙소의 구석으로 향해 있었다.
넓은 거실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각종 자재들.
‘자재라기보단, 잡화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우진과 혜진은, 그것이 왜 숙소에 비치되어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와 리조트에 이런 걸 갖다 놓을 줄이야…….”
“이거 보니까, 입시 때 기억이 막 새록새록 떠오르네. 스키장에서 입체 조형하게 생겼잖아 이거?”
2010년 기준 대부분의 디자인 대학은, 정시에서 수능과 실기 두 가지를 요구한다.
일반 인문, 공과대학과 마찬가지로 내신과 수능점수를 보면서, 각 학교별로 만들어놓은 실기시험을 따로 치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진이 입학한 K대의 실기는, ‘입체 조형’이라는 과목이었다.
매년 다르게 주어지는 주제와 컨셉을 반영하여, 실기장에 제공되는 재료를 가지고 조형물을 만들어야 하는 시험.
때문에 몇 년 동안 그 시험을 준비한 K대의 신입생들로서는, 지금 숙소에 비치되어 있는 다양한 재료들을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우진의 경우에는, 입시 때 보다 현장에서 활동하던 기억 때문에 더욱 빠삭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목재 사각 봉, 모형용 합판에, 401은 다섯 통이나 있고……. 아크릴, 폼 보드는 두께별로 다 있잖아? 이정도면 거의 문구점을 그대로 옮겨 논 수준인데.’
재료들을 하나씩 확인해 본 우진은, 혀를 내둘렀다.
문구점을 옮겨놨다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게 맞았지만, 그래도 정말 있을 건 다 있는 수준의 재료 세팅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진과 혜진이 그것들에 감탄하는 사이, 그들의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걸로 뭔가 모형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보네요.”
“그러게요.”
낯선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처음 보는 세 명의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같은 호실을 쓸 친구들인가?’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길쭉한 남학생 한 명과, 그에 못지않게 길쭉한 키를 가진 단발의 여학생 하나.
그리고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예쁘장한 외모의 여학생 하나.
우진은 그들의 이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오티에 참여한 모든 신입생들은 명찰을 목에 걸고 있었으니까.
“저희 호실은, 이렇게 다섯 명인가 보네요.”
젓가락처럼 길쭉한 키를 가진 남학생, 류선빈이 먼저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고.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선빈과 눈이 잠시 마주쳤던 우진은, 자연스레 그 옆에 선 두 여학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멀대같이 큰 키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류선빈과 달리, 완전히 상반된 인상을 가진 두 명의 여학생.
그 중 하얀 얼굴에 긴 머리를 올려묶은 여학생이, 자신의 명찰을 슬쩍 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한소연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녀의 말을 시작으로.
그들은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 * *
새로 알게 된 세 명의 동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한소연이었다.
티 없이 하얀 피부에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예쁜 두 눈.
오똑한 코에 도톰한 입술까지.
츄리닝에 가벼운 기초화장만 얹은 수수한 차림새였지만, 우진은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오티 와서 본 신입생들 중에서, 소연이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예쁘다는 것을 말이다.
‘어디 연예기획사에서 연습생이라도 데려온 줄 알았네.’
하지만 소연이 눈에 띄는 이유가,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202호에 합류한 세 사람 중, 가장 활달한 성격을 가진 것도 그녀였으니까.
“우와, 그럼 우진 오빠랑 혜진이는, 학교 오다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거야?”
“그렇다니까, 언니. 여기서 같은 호실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소연과 혜진은 이미지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제법 쿵짝이 잘 맞는 편이었다.
재수생인 소연이 혜진보다 한 살 많긴 했지만, 혜진이 언제 그런 것을 신경이라도 썼던가.
“반가워서 말 걸었는데, 내 실수였어.”
“왜?”
“이렇게 재미없는 할배일 줄 몰랐다니까?”
우진이 인상을 팍 쓰자, 혜진이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소연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같은 방에 오빠 하나 있어서 다행이야.”
소연의 말에, 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가 나이 제일 많으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거든.”
“아…….”
“할배라고 놀리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큰언니 노릇이 부담 되서 그런 거니까.”
“놀려도 돼, 언니.”
“넌 좀 빠져. 모옷된 꼬마.”
“흥.”
뭔가 소연에게서 좀 더 고차원적으로 놀리는 듯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우진은 애써 부정하였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얼굴로, 그런 흉계를 꾸밀 리 없지. 암.’
외모지상주의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원래 예쁘면 착한 법이거든.
“잊지 마라, 꼬마. 아직 성관이 형 번호 안 넘겼다.”
“와……. 이 치사한 할배가…….”
혜진의 소개팅에 대한 이야기도 이미 들은 세 사람은, 둘의 투닥거림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예쁘고 착한(?) 소연은, 낯을 가리는 멀대에게도 친절히 말을 걸어줬다.
“그나저나 선빈이는 대체 성적이 얼마나 좋기에 전액 장학을 받은 거야?”
못된 꼬마도 놀란 표정으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우와. 선빈이 장학생이야?”
“그렇다니까? 얘가 우리 과 수석입학생이었어. 엄청나지?”
선빈이 수석입학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놀랐다.
‘저 멀대 같은 놈이 수석이라고?’
이제 20년도 더 된 기억이었지만, 우진은 K대 디자인학부에 합격하기 위해 정말 이 악물고 노력했었다.
성적이면 성적, 실기면 실기.
예체능 계열에선 정말 최상급의 실력이 아니면, 들어오기 힘든 학교가 바로 이곳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이 학과에 겨우 문을 닫고 들어왔었다.
아마 08년 수능에서 두 문제 정도만 더 틀렸었어도, 우진은 회귀하자마자 대학 입학 대신 재수 준비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때 수능을 좀 망치긴 했었지만…….’
우진이 부족한 성적을 압도적인 실기 실력으로 뚫고 입학한 케이스라면, 아마 선빈은 성적과 실기 모두 탑 클래스였을 터.
수줍은 멀대 정도로 생각됐던 선빈의 첫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근데 선빈이가 수석인 거, 언니는 어떻게 알았어?”
“우연히 들었거든.”
“우연히……?”
“아까 대강당 처음 들어갔을 때, 조교님이 선빈이랑 얘기하고 계시더라고.”
“아하.”
“선빈이 진짜 짱인데?”
“그,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운……?”
“평소보다 수능을 좀 잘 봤거든…….”
“그래서 몇 등급인데?”
“그건…….”
소연의 한 마디로 갑자기 몰리는 관심에, 선빈은 쑥쓰러운 표정이 되어 말까지 더듬었다.
키는 거의 190에 가까운 전봇대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으니, 그 모습도 뭔가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고 선빈 보다도 더 낯을 가리던 또 다른 멀대 오윤정은, 대화에 끼기 쉽지 않은지 입을 가리고 작게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얼추 서로에 대해 알게 된 신입생들의 대화 주제는, 다시 ‘디자인의 밤’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소연 언니.”
“응?”
“오늘 주제는 뭐가 나올까?”
“글쎄. 작년에는 타운하우스(Town House)였다고 하던데.”
“그래?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나, 재수했잖아.”
“음……?”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2학년 선배 중에 있거든. 박정훈이라고.”
“오……! 좋은 정보!”
타운하우스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연립주택이다.
하지만 단지 연립주택이라기보다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테라스 하우스(Terraced House)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운하우스라……. 역시 주제는 건축디자인인가?’
소연의 말을 들은 우진은 다시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그럼 소연아.”
“으응?”
“08년 주제도 혹시 알아?”
“08년이면……. 재작년?”
“응.”
“재작년 주제까진 알고 있어. 그것도 정훈이가 얘기해 줬거든.”
“오오……!”
“뭔데 언니?”
모두의 관심 속에, 소연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이어서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천루(Skyscraper).”
“응?”
“주제가 마천루였다고.”
마천루는 쉽게 말해 고층빌딩을 의미한다.
현대 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커튼월 룩을 자랑하는 도심의 아름다운 고층빌딩.
그리고 소연의 이 대답을 들은 우진은, 이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디자인의 밤에, 어떤 주제가 나올지를 말이다.
‘오랜만에 건축모형 만들게 생겼군.’
건축과 관련된 일을 이십 년이 넘게 했던 우진은, 당연히 건축모형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만들기를 좋아하고 손재주가 좋았던 우진에게, 건축모형 작업은 꽤나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자재를 잘만 아껴서 사용하면 수입도 꽤나 쏠쏠했기에, 현장 일을 하면서도 종종 아르바이트 식으로 모형작업을 했었던 우진이었다.
‘좋아. 재밌겠는데?’
우진의 기분이 살짝 상기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일단 디자인 경연의 형태가 자신 있는 분야라는 사실이 첫 번째였으며.
두 번째 이유는 처음으로 의뢰가 아닌 자신의 디자인이 담긴 모형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전생에서 그가 만들었던 건축모형들은, 전부 디자인업체나 건설업체의 외주작업이었고.
그는 업체에서 준 도면과 디자인 그대로 모형작업을 했던 것뿐이었으니까.
‘디자인의 밤 인솔 교수가 조운찬 교수님이었으니까……. 좀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주제가 나오려나? 어쩌면 공공 건축 쪽일 수도 있고…….’
그리고 우진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던 그때.
드르륵-
숙소의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바로, 신입생들을 숙소까지 인솔했던 조교였다.
“여기, 팸플릿(Pamphlet) 나왔습니다.”
조교는 숙소 현관에 얇은 책자 한 권을 툭 던졌고.
“팸플릿이요?”
우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네. 2010 디자인의 밤 팸플릿입니다.”
조교는 간결하게 대답만 남긴 뒤, 바쁘게 다음 호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진의 옆에 있던 혜진이, 재빨리 튀어 나가 팸플릿을 가지고 왔다.
“주제……. 나온 거야?”
우진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혜진을 향해 꽂힌다.
혜진은 대답 대신 팸플릿을 학생들 앞에 펼쳤고, 순간 숙소는 조용해졌다.
다들 팸플릿을 읽는데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우진은, 점점 묘한 표정이 되어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