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오리엔테이션
우진이 가장 궁금했던 건, 이 학교에서 김기태의 직책이 뭐냐는 것이었다.
‘신입생은 당연히 아닐 거고. 대충 조교쯤 되려나…….’
군대를 다녀온 우진도, 신입생 중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김기태는 그런 그보다도 대략 세 살 정도 많았으니, 신입생일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게다가 스페인 국적인 저놈은, 군대도 안 다녀왔을 테니…….’
보통 스물다섯 정도의 남자라면, 사 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가 되기에는 좀 이른 나이다.
그러나 군대를 스킵 했을 김기태라면, 충분히 조교가 됐을 수도 있을 나이.
하지만 우진의 예상은, 살짝 빗나갔다.
김기태는 아직 학생이었고, 공간디자인과의 학회장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생 여러분! 공간디자인과 학회장 김기태라고 합니다……!”
김기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강당의 신입생들이 환호성을 터뜨린다.
그의 본색을 알고 있는 우진의 입장에서는 역겨운 목소리였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그를 처음 본 신입생들에게, 훤칠한 외모의 3학년 학회장은 충분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했다.
“와……! 공간디자인과 학회장이래.”
“학회장이면 몇 학년이지?”
“4학년?”
“아니. 아마 3학년일 거야.”
“너네 과 학회장 오빠 잘생겼다?”
“오오오……!”
물론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와중에도, 우진은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를 먹어야 했다.
‘3학년? 차라리 잘 된 건가. 조교보다는 3학년이 아무래도 부딪칠 일이 적을 테니까.’
하지만 우진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던 불쾌감을 빠르게 털어 내었다.
그 텁텁한 감정이 지금의 상황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전생의 악연을 잊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어떤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감정을 숨길 필요가 있었을 뿐.
그리고 그런 우진의 마인드 컨트롤에, 의외로 혜진이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뭐야. 엄청 느끼하잖아. 뭐가 잘생겼다는 거야.”
“응?”
“아니, 저 학회장이라는 오빠 말이야. 난 나보다 쌍꺼풀 진한 남자는 질색이거든.”
“그래?”
“목소리도 너무 느끼해. 아무튼, 내 스타일은 아니야.”
“흐흐. 아무래도 그렇지?”
“앗, 목소리가 너무 컸나?”
주변을 슬쩍 두리번거리는 혜진을 보며, 우진은 기분 좋게 웃었다.
혜진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방금 우진에게 제법 큰 가산점을 따냈다.
물론 쌍꺼풀도 없으면서 자신보다 쌍꺼풀 진한 남자를 운운하는 건 좀 어이없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넘어가 줄 용의가 있었다.
“난 성관이 오빠처럼 큰 눈에 쌍꺼풀 없는 얼굴이 좋아.”
“뭐야. 언제 봤다고 그새 성관이 오빠가 됐어?”
“오빠가 연결만 해준다면, 당장 다음 주에 만날 수도 있을걸?”
“흐음……. 좋아. 그 정도 열정이라면, 내가 한 달 뒤쯤 바로 연결해 줄게.”
우진은 능청스런 표정으로 대답했고, 혜진은 얼굴을 팍 찡그리며 인상을 썼다.
“한 달……? 치사하게 자꾸 그럴래?”
“아니, 성관이 형 전역은 해야 할 것 아냐 멍청아.”
“아…….”
혜진을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인 우진은,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한결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그래. 저런 놈에게 감정 소모하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도 없지. 오티에 집중하자.’
물론 오티의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기분 나빠도 김기태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어쨌든 그는 지금 공간디자인과 학회장으로서 이 디자인학부 오티의 오프닝을 맡은 상황이었고.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그가 하는 이야기들 속에,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십 분 정도 소요된 오프닝을 제외한다면, 김기태가 다시 단상에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는 정도.
“으……. 지루해. 몇 시간 동안 교장쌤 훈화 말씀 듣는 기분이야.”
옆에 앉은 혜진은 투덜거렸지만, 우진은 정보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꼼꼼히 메모하였다.
중요해 보이는 내용이 있으면, 간단하게라도 수첩에 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더 지났을까?
조금씩 집중력이 흐려지고 있던 우진의 두 눈이, 다시 번쩍 뜨여졌다.
“……!”
우진이 전생에서 알았던 또 다른 인물이, 강당의 단상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 * *
김기태가 단상에 올라왔을 때와 달리, 우진은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에 단상 위에 나타난 남자는, 완전히 예상 범주를 벗어나는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조운찬 교수……! 오티에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악연 중의 악연인 김기태와 달리, 조운찬 교수는 우진의 롤 모델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대외적으로도 막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으며, 교수로서는 정교수 1년 차인 햇병아리에 불과했지만.
우진이 회귀하기 전인 2030년에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최고의 건축디자이너였으니 말이다.
사십 대 후반에는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프리츠커상을 한국 최초로 수상했을 정도였으니. 건축디자이너가 꿈인 우진의 롤 모델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긴. 이 시점에서 정교수 중에는 조운찬 교수가 짬에서 가장 밀릴 테니……. 오티에 끌려온 것도 이해는 가네.’
2010년 현재 조운찬 교수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디자인 학부 최연소 정교수’라는 타이틀뿐이었다.
물론 30대에 K대 디자인학부 정교수를 단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현시점에서는 공간디자인학과의 정 교수들 중 막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과 별개로 K대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단상 위에 나타났으니.
우진의 두 눈은 초롱초롱할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공간디자인과 교수, 조운찬입니다.”
물론 조운찬이라고 해도 축사의 시작은 다른 교수들과 다를 것 없이 진부한 편이었고, 때문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신입생들의 상태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조운찬의 손짓과 함께 스크린에 비친 페이지가 넘어간 순간부터.
팟-
강당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운찬이 맡은 순서가 바로 많은 신입생들이 기다렸던 ‘디자인의 밤’ 식순이였고, 스크린에는 2010년 디자인의 밤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었다.
물론 옆에서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던 혜진 또한, 우진의 한 마디 속삭임에 번쩍 눈을 떴다.
“야, 시작한다.”
“으음……? 뭐라고?”
“디자인의 밤 시작한다고, 멍충아.”
“……!”
‘멍충이’라고 한 것조차 그냥 지나칠 만큼, 디자인 경연에 대한 혜진의 관심은 우진 못지않았다.
왈가닥에 가까운 독특한 캐릭터이기는 했지만, 그녀 또한 승부욕은 대단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K대 디자인학부에 입성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혜진이 졸음을 털어내고 늘어졌던 자세를 바로잡는 사이, 조용해진 강당에 조운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여기 계신 신입생 여러분들 중에서는, 이 디자인의 밤에 대해 아시는 분도, 그렇지 못한 분도 계실 겁니다.”
‘디자인의 밤’에 대한 조운찬의 설명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그 구체적인 룰은 결국 각 과마다 전부 다를 것이었고, 때문에 모든 학부생이 모인 이 대강당에서 해야 할 이야기는 ‘본질’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오늘 이 밤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티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위에 첫 번째 선을 긋는 것입니다.”
찬찬히 신입생들을 둘러본 조운찬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디자인학부에서 매년이 ‘디자인의 밤’을 여는 이유는……. 그 첫 번째 획이 오롯이 여러분이 가진 그, 때 묻지 않은 색깔로 그려지길 바라기 때문이죠.”
조운찬 교수의 연설을 듣던 우진의 머릿속에, 과거 감명 깊게 읽었던 그의 칼럼 한 줄이 떠올랐다.
[디자이너에게도 배움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움이 시작되는 순간 자신만의 색깔이 조금씩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조운찬은, 그때 우진이 읽었던 문구를 거의 비슷하게 이야기하였다.
“누군가의 주관이 조금이라도 섞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원색(原色)이 아니게 된다는 겁니다.”
조운찬의 칼칼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우진은 살짝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남자의 진정성 넘치는 목소리가, 그의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감성을 자극한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디자인을 하면서……. 기술적으로 감각적으로 원숙해질수록, 점점 더 타성에 젖게 될 겁니다.”
목이 타는지 조운찬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켰고, 강당의 신입생들은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서 여러분이 만들어야 할 것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나침반입니다.”
이야기는 10분이 넘도록 장황하게 이어졌지만, 결국 조운찬이 말하고 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초심(初心).
처음 디자이너가 되고자 꿈꿨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 디자이너로서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디자인의 밤은, 소정의 장학금이 걸려있는 경연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경연’의 형태로 장학금을 걸어둔 것은, 단지 동기부여를 위함일 뿐이다.
조운찬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은 이것이었다.
[경쟁은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2010년 디자인의 밤을 시작하겠습니다.”
짝-!
조운찬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스크린이 다시 넘어가며 다음 페이지가 출력되었다.
스크린에 떠오른 것은, 각 학과별로 배정된 숙소의 위치와 안내도.
디자인의 밤에 대한 소개는 강당에서 이뤄졌지만, 본격적인 경연은 각 숙소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김 조교.”
“네, 교수님.”
“학과별로 인솔 부탁드립니다.”
“옙. 알겠습니다!”
조운찬의 말이 끝나자, 조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우진과 혜진을 포함한 학생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학과별 디자인 경연으로 장학생을 뽑는다는 거지?”
“그런 셈이지.”
“크……! 우리 과는 공간디자인이니까, 집이라도 지어보라고 하려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왁자지껄 떠들며 움직이는 학생들의 들뜬 얼굴에, 기대감과 흥분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이라……. 오늘 내 인생 첫 번째 디자인을 해보는 건가?’
아직 최고의 디자인을 할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디자인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진은, 자신의 최선이 기왕이면 최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이 안에서만큼은 말이다.
한쪽 입꼬리를 작게 말아 올린 우진은, 의욕적인 걸음으로 조교의 뒤를 따라 숙소에 도착하였다.
“각자 명찰에 번호 알고 있죠?”
“네, 조교님!”
“다섯 명 단위로 같은 호실을 쓰게 될 겁니다.”
그리고 배정된 숙소에 도착한 우진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커?’
다섯 명 단위로 배정되었다는 숙소의 크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넓었던 것이다.
대충 봐도 열 명 정도는 충분히 배정할 만한 공간.
하지만 그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와, 저게 다 뭐야?”
숙소의 한쪽 구석에,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