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첫걸음
우진은 기분이 좋았다.
그냥 기분이 좋은 걸 넘어서, 콧노래까지 흥얼흥얼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크으……! 바로 이거지!’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상황 자체가, 딱히 우진에게 기분 좋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목공 일이야 전생에서 지겹도록 했던 것이었고.
그렇다고 지금 그가 원했던 디자인 디렉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 우진의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역시 젊음이 최고라니까!’
군 전역 직후의 탄탄한 그의 몸뚱이가, 그가 생각한 대로 너무 완벽히 움직여주고 있다는 사실.
지금 그의 몸은. 팔다리는 얇고 술 배만 불룩했던 40대 아저씨 서우진의 몸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완벽한 상태였다.
때문에 우진은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히야……. 우진 씨, 보드 벌써 다 쳐 올린거야?”
“아니 무슨 젊은이가 이렇게 실력이 좋아?”
“젊으니까 일도 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핫.”
수십 킬로그램을 훌쩍 넘는 목공용 컴프레셔*[공기나 그 밖의 기체를 압축하는 기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질질 끌고 다니면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정확한 위치에 네일건을 탁탁 쏘아내는 신기를 보여주는 우진.
작업자는 딱 셋뿐 이었지만.
지금 우진의 팀은, 어지간한 10명짜리 목공 팀만큼의 속도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한 명은 쉼 없이 목재를 재단하고, 다른 한 명은 재단된 목재를 우진에게 가져다준다.
그리고 정확한 위치에 그것이 고정된 것을 확인하면, 어김없이 우진의 네일건*[못을 발사하는 기계식 공구]이 정확한 위치에 틀어박혀 나무를 고정시킨다.
준비해 둔 도면에 따라, 필요한 판재와 각재의 사이즈는 미리 정리해 두었고.
스케치업 작업을 미리 해봄으로써, 이미 우진의 머릿속엔 모든 목공 구조가 그림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따로 도면을 보면서 목재 위치를 맞춰볼 필요도 없이, 말 그대로 뚝딱뚝딱 구조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수십 번 조립해 본 퍼즐 조각을 하나씩 끼워 맞추기라도 하듯.
작업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박 부장님이 속는 셈 치고 딱 하루만 같이 해 보랬는데…….”
“이 친구 이거, 아주 물건이네.”
박경완의 사정에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나왔던 목수 김진태는, 우진의 작업 방식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마침 잡아뒀던 외부 일정이 펑크 난 탓에 어쩔 수 없이 끌려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진기한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저거 타카질 하는 폼도 그렇고, 하루 이틀 굴러본 솜씨가 아니야.’
사실 급조된 이 세명 짜리 목공팀 안에서.
원래 디렉팅의 역할을 했어야 하는 것은, 우진이 아닌 진태였다.
겉으로 드러난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것이 맞는 얘기였고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진태도, 우진의 스케치업 파일을 보며 설명만 조금 들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하루라도 먼저 투입된 우진이 현장에 대해 잘 아리라 생각했으니, 인수인계 정도나 받은 뒤에 본격적으로 나서 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진의 설명을 들으면서 하나하나 인계를 받다 보니, 어느새 이런 생각 하지도 못했던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자연스레 우진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린 것이다.
‘대체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일까?’
그런 우진이 딱히 못마땅하지도 않았다.
가장 나이 어린 우진이 거의 디렉터의 역할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도 앞장서서 가장 많이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이래라저래라 말만 했다면 진태의 성격상 뒤집어 엎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알아서 척척 다 해주는 우진이라는 존재는, 진태의 입장에서, 아주 승차감 좋은 안락한 버스였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자, 두 분. 조금만 더 힘내시죠.”
“음? 그게 무슨 말이야, 우진 씨.”
“박 부장님이 처음에 오더 줄 때, 오늘 여기까지가 야리끼리라고 했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우진의 말을 들은 두 목수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야리끼리란 그 날 정해진 할당량을 채웠을 경우 끝나는 일을 의미하는 공사현장의 용어였고.
당연히 야리끼리와 관계없이 일당은 전부 다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우진의 말에 따르면 야리끼리까지 진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작업자들로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시각은 정확히 두시 반.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퇴근하게 생겼다.
“크, 역시 오야를 잘 만나야 된다니까?”
“오야는, 누가 오얍니까?”
“당연히 우진이 자네지.”
“에이, 여기 진태 형님도 있는데, 제가 무슨 오야에요.”
함께 일하던 다른 목수 오영철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우진은 손사래를 치며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사실 전생에서야 항상 오더를 내리는 입장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기분이 좋아서 너무 나댄 것 같은데…….’
보통 목수들은 자존심이 강한 편이었고, 보기에 따라 오늘 우진의 행동은 충분히 아니꼬울 수 있는 것이었기에.
우진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원래 이러려던 건 아닌데…….’
특히 나이에 비해 업력이 짧은 오영철이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경력이 10년 넘는 김진태의 눈치는 조금 보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
그러나 우진의 걱정과 달리, 진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 현장에선 일 제일 잘하는 사람이 오야 아니겠어?”
“그, 그게…….”
“난 전혀 기분 나쁘지 않으니, 걱정 마 우진 씨.”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지어 진태는, 눈을 찡긋하며 한 마디 덧붙이기까지 하였다.
“대신 이 일 끝날 때까지, 우리 팀은 자네가 계속 오더 하는 거야.”
그리고 진태의 그 말에, 우진은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갔다.
우진은 정말 초심으로 돌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였고.
처음 만난 팀원들과 손발이 잘 맞은 덕인지, 작업장의 분위기 또한 화기애애하였다.
작업 삼 일 차부터는 거의 열댓 명의 인원이 1층 내장목공에 투입되었음에도.
불협화음 없이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된 것이다.
물론 개중에 우진이 못마땅했던 사람도 없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티 내는 인원은 없었다.
진태를 비롯한 연식 있는 목수들이 우진을 지지해 주었으니, 불만이 있더라도 꺼낼 순 없었던 것이다.
‘현장에서 이렇게 즐겁게 일하기는……. 정말 오랜만이네.’
그래서 우진은 마지막 날까지, 정말 기분 좋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일정이 이틀이나 당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일정 기준으로 보수를 전부 다 챙겨준 박경완 덕에, 조금은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도 몰랐다.
“정말 일 더 안 할 거야?”
“학교 가야 된다니까요?”
“너, 진짜 대학생이었어?”
“아직은 아니죠.”
“그건 또 무슨…….”
“다음 달에 입학할 예정이니까요.”
“아…….”
“제가 대학 생활했으면, 이 나이에 경력 3년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말이 안 되는 게 뭐 한 두 가지여야지…….”
“…….”
그렇게 우진은, 훈훈하게 박경완과의 마지막 정산까지 마쳤고.
보너스로 명함도 몇 장 얻을 수 있었다.
우진에게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박경완의 명함은 물론.
“자, 명함이나 챙겨 가라.”
“감사합니다.”
“방학 때 일할 거지?”
“등록금 내야 되니까요.”
“딴 데 가지 말고, 어지간하면 나한테 연락해.”
“그래 볼게요.”
“얌마, 나처럼 착한 관리자도 드물어.”
일주일 동안 제법 친해진 베테랑 목수 김진태의 명함도 얻게 된 것이다.
“우진이, 다음 달에 학교 간다고?”
“네, 진태형.”
“학기 중에 시간 나면, 형이랑 술이나 한잔하자.”
“좋죠.”
“형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 주고.”
“좋습니다. 흐흐.”
그리고 이것으로, 우진은 원했던 첫 번째 목표를 깔끔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수서 현장은, 박경완 부장 눈도장이나 찍어두려고 왔던 거였는데……. 진태 형 번호는 보너스네.’
후에 천웅건설 임원까지 올라갈 ‘박경완’과의 친분이, 우진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김진태와의 인연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웬만한 현장 정도는 충분히 지휘할 수 있을만한 인재.
그에 더해 다른 작업자들과의 친분도 가능하면 유지해 볼 생각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첫걸음은 괜찮게 디딘 것 같아.’
건축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때문에 우진에게는, 사람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하였다.
* * *
수서 현장에서의 일주일 동안, 우진이 번 돈은 200만 원이 살짝 넘는 정도였다.
일당은 22만 원 정도로, 일주일이면 150만 원 정도여야 정상이었지만.
우진이 단축해 낸 공사 기간만큼의 임금을 박경완이 따로 챙겨줬기에 가능한 액수였다.
해서 지금 우진의 수중에 있는 돈은, 모아둔 것까지 해서 대략 570만 원 정도.
사람에 따라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돈이었지만, 스물둘 우진의 입장에서는 거금이라 할 만한 자본이었다.
‘딱 일주일만 더 땡겨 볼까? 그럼 첫해 등록금 정도는 얼추 나올 것 같은데…….’
속으로 잠시 등록금 생각을 했던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이지, 사실 우진은 통장에 오백이 아니라 천만 원이 넘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등록금을 낼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학자금 대출은 무조건 받아야지.’
유동자금이 한 푼이라도 아쉬운 우진의 입장에선.
무이자에 가깝게 돈을 빌려주는 학자금 대출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역시 대출은 최대한 많이 땡겨서, 최대한 늦게 갚아야…….’
현대사회에선 빚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특히나 제로금리를 향해 달리는 중인 이런 저금리 시대에는 더더욱 말이다.
전생의 우진은 이 사실을, 마흔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었다.
‘뭐 전생에서는…….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투자에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물론 무차별적인 대출이 옳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감당 가능한 이자 내에서의 건전한 대출은, 오히려 자산 증식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유동자금 딱 삼천만 모으자. 그 정도면 얼추 판은 깔아볼 수 있을 테니까.’
잠시 돈 벌 궁리를 하며 실실 웃던 우진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념을 떨쳐내었다.
이제 다음 주면 3월이었고, 3월 첫 주에는 입학식이 있었으니.
정말 대학 생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없는 형편에, 돈 벌 계획을 짜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오히려 금전적인 상황은, 회귀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열악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 가장 설레는 것은, 누가 뭐래도 학교생활이었다.
전생에서 질리도록 해 본 현장일과 달리 대학 생활은 그의 모든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고.
지난 세월 동안 너무도 갈구했지만 현실에 치여 결국 얻어내지 못했던 것이, 바로 대학에서의 배움이었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대학을 가보는구나!’
그리고 지금, 낡아빠진 폴더 폰을 확인한 우진의 입꼬리가 귀에 걸린 이유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간디자인학과 ‘서우진’ 님. OT(오리엔테이션) 참여 여부, 수신 부탁드립니다.]
스물두 살(?) 서우진의 심장이, 주책맞게 벌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