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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4화 (4/315)

4화

22살이지만,

경력은 20년찹니다.

김지훈은 업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목수들 사이에서 제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줄 설 정도로 뛰어난 기술자였으며.

지금 이곳 건물을 시공 중인 천웅건설에서 십 년 정도 일한 경력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우진이 그의 이름을 판 순간, 경완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지훈은 경완도 함께 일해본 적 있는 인물이었고.

그의 밑에서 몇 년 제대로 배웠다면, 어지간한 5~10년 차 목수보다 나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경완의 심경변화를 눈치챈 우진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까.’

실제로 김지훈은, 전생에 우진의 스승이었다.

현장에서 연이 닿아 거의 5년 정도 함께 손발을 맞춘.

우진이 본 목수들 중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

물론 이번 생에서야 아직 스쳐 지나간 적도 없었지만,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쯤 지훈은 잠적 상태일 테니, 경완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반장님 귀국하시는 게 언제였더라……. 그때 맞춰서 꼭 찾아봬야 하는데.’

그리고 우진이 오랜만에 전생의 인연을 떠올리는 사이.

경완은 생각을 마친 것인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내용이 정말 사실이라면……. 어리다고 일을 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겠죠.”

경완의 말을 들은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반나절. 아니, 삼십 분이면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제가 바보는 아닙니다.”

“흐음.”

“김반장님 지금 해외 계셔서 확인시켜드리기는 힘들지만……. 그야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현장에선, 일만 잘하면 땡 아니냔 말이죠.”

“…….”

우진의 화법은 뭔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여부 확인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오히려 먼저 꺼내면서도, 그 안에 경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내용을 담았으니 말이다.

‘그래. 김 반장 해외 있다는 사실은 나도 몰랐던 건데……. 그걸 알고 있을 정도면 개인적인 친분은 있다고 봐야겠지.’

전생의 지식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로, 은근슬쩍 김 반장과의 친분을 확인시켜주면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다시 한번 어필하였으니.

사실상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순간, 박경완의 마음은 이미 기울 수밖에 없었다.

‘뭐, 마음에 안 들면 일당도 안 줘도 된다 했으니. 손해 볼 건 없겠네.’

하여 잠시 생각하던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 정도 자신감이시라면…….”

경완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르며, 우진을 자리로 안내하였다.

“바로 한번 시작해 보죠. 실무자 불러오겠습니다. 저희도 지금 좀 급한 상황이라.”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좋습니다. 아, 그리고 말은 놓으셔도 됩니다, 부장님.”

이제 판은 깔렸으니, 실력 발휘를 할 차례였다.

* * *

우진은 1층 현장의 상황을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공고가 올라오기도 전.

내장목공 기술자를 모집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미리 알고 왔을 정도였으니 말이었다.

‘나중에 사람 없어서, 형틀목공 인력까지도 인테리어에 싹 투입되었었으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안 봐도 훤하지 뭐.’

해서 우진은 단단히 벼르고 이곳에 왔다.

전생에 갈고닦은 현장 기술력과 경험. 거기에 미리 알고 있는 수서 현장의 지식까지.

이것들을 십분 활용한다면, 박경완이 놀랄 정도의 성과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설계였다.

용돈 벌이도 어느 정도 쏠쏠하긴 하겠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보상일 뿐.

전생보다 더 어린 나이에, 보다 빠르게 업계의 인지도를 쌓기 위한 포석을.

미리 깔아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진의 꿈은 결국 건축 디자이너였지만, 그렇다 해서 현장 인맥과 인프라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이것은 전부, 그의 꿈을 성장시킬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었다.

“스케치업 파일은 따로 받아두신 것 있습니까?”

“투시도는 몇 장 뽑아둔 게 있네만……. 3D 파일은 따로 없어.”

“업체에서 모델링 파일은 안줬나 보군요.”

“보통 그렇지.”

“그럼 결국, 도면만 가지고 작업 쳐야한단 얘긴데…….”

우진의 눈이 살짝 빛났다.

“아직 저 말고는 작업자 세팅도 안 된 것 같은데, 간단하게 모델링 작업이나 먼저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우진의 말에, 실무자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모델링? 자네가 직접?”

“현장에서 바로 열어볼 수 있는 스케치업 파일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 그야 있으면 좋긴 한데…….”

“오래 안 걸립니다. 한 너댓 시간 정도만 주시죠.”

“모델링 페이는 따로 없다네.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그냥 저 편하려고 하는 작업이니까요. 그래도 일당은 챙겨 주실 것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

실무자와 우진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박경완은, 시작부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공고에 조건으로 올렸던 ‘간단한 스케치업 능력’이라는 것은, 사실 모델링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현장에서 필요한 스케치업 능력이란, 사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3D 파일을 열어서 치수만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수준.

‘이놈, 말만 번지르르한 건 아니겠지?’

경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 시작하였다.

* * *

우진이 언급한 프로그램인 스케치업(Sketch up)은, 보통 공간을 모델링할 때 쓰이는 3D모델링 툴이었다.

3D 툴 중에는 프로그램이 가장 가볍고 사용법이 간단한.

마치 3D계의 그림판 같은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

전생에서 우진은 이 스케치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무척이나 애용했었다.

스케치업으로 잘만 작업해 두면, 현장에서 마치 3차원 도면처럼 활용하는 것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평면도 입면도 하나씩 다 뜯어볼 시간에,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치수 확인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유용한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일을 하는 기술자들 중, 스케치업을 잘 다루는 인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3D프로그램 중에 가장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노력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프로그램은 또 아니었으니 말이다.

‘목공일 20년 하면서 캐드도 못 만지는 업자들이 수두룩 빽빽한데……. 어쩌면 당연한 현실이겠지.’

다만 우진이 이렇게 스케치업에 능숙한 이유는, 그가 별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십수 년이 넘도록 현장 일을 하면서도 끝까지 디자이너라는 꿈을 붙들고 있었던 별종 중에 별종이었고.

건축디자이너에게 3D 프로그램 활용능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이 아닌 필수 소양으로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우진으로서는 그나마 독학으로 공부해볼 만한, 스케치업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론 악착같이 배워놓길 잘 했지. 여러모로 잘 써먹었고……. 지금도 잘 쓰게 생겼으니 말이야.’

능숙하게 스케치업을 켠 우진은, 실무자로부터 받은 현장 도면 파일들을 빠르게 프로그램 안으로 불러들였다.

지금 우진이 하려는 것은, 평면 위에 그려진 현장의 도면을 3D 공간 위에 구현해 내는 것.

물론 모델링의 목적이 현장 시공용이었으니, 디테일한 질감묘사나 집기류 모델링은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인테리어 공사에 필요한 굵직한 구조물들의 치수와 위치를, 정확하게 3D로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딸깍- 딸깍-

그리고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여 작업하는 우진을 보며, 옆에 있던 경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혹시 목수가 아니라 모델러 아냐? 무슨 목수가 이렇게 스케치업을 잘해?’

경완은 현장의 총 책임자인 만큼, 실무경력도 뛰어났고 아는 것도 많았다.

때문에 스케치업을 할 줄은 몰라도, 우진이 지금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정도의 눈은 가지고 있었다.

‘손가락에 모터라도 달았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을 향한 그의 의심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었다.

결국 지금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이런 모델링 능력이 아닌 목공능력이었고.

우진의 목공실력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목공실력도 스케치업 실력만큼 좋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런 경완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하였다.

모델링 능력이 우진의 무기 중 하나였다면…….

목공은 그가 살아온 인생, 그 자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사무소에 나타난 바로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목공팀이 세팅되었고.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우진이 자네……. 일 몇 달만 더 해볼 생각은 없나?”

“목공은 이제 다 끝났는데, 무슨 일을 더 해요? 일정도 이틀이나 당겨 놨구만.”

“천웅건설에 사업장이 어디 여기뿐이겠어? 다음 사업장부턴 반장급으로 페이 맞춰주겠네.”

“안돼요.”

“왜?”

“학교 가야되거든요.”

“…….”

의심의 눈초리로 우진을 바라보던 경완의 시선은, 어느새 간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 * *

천웅건설의 관리팀장인 준민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알고 있는 인맥이란 인맥은 다 동원하여, 현장의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

준민은 제법 많은 인력들을 모아오는 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그 중 제대로 실력이 검증된 기술자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후우. 반장급 디렉터가 없는 게 치명적이긴 하지만……. 여차하면 다른 팀에 손 좀 벌려야지 뭐.’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전부 동원한 뒤.

다음 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현장에 출근한 준민.

밤늦게까지 돌아다닌 탓에 반차를 내고 늦게 출근한 준민은, 현장에 오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어야 정상인 1층의 인테리어 공사가, 뭔가 뚝딱뚝딱 진행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뭐지? 설마 부장님이 따로 사람을 찾으신 건가?’

준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금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작업 속도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기술자 영입에 성공한듯 싶었고.

그렇다면 자신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 테니 말이었다.

“부장님!”

“오, 준민이 왔나?”

이어서 한층 밝아진 박경완의 표정을 본 준민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단단히 꼬여있던 상황이, 극적으로 풀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 층에 인테리어 목공 시작했던데…….”

“후후. 봤어?”

“대체 사람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반장급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던데요.”

“내가 고스톱 쳐서 부장까지 올라온 줄 알아? 다 방법이 있지.”

창가의 소파에 앉아 으스대는 경완을 보며, 슬며시 그 건너편에 마주앉은 준민.

어찌 됐든 일이 좀 풀린 것 같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래, 일정만 사수했으면 됐지 뭐.’

경완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슬쩍 응시한 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관리실은 1층 현장이 훤히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하여 현장 돌아가는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본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준민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뭐, 인마.”

“사람이 왜 셋밖에 없어요?”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찾아봐도 작업자의 숫자는 고작 셋뿐이었고.

“그야 세 명이서 일하는 중이니까.”

“……?”

심지어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저기 쟤, 쟤는 뭐예요, 부장님?”

“쟤라니?”

“저기 컴프레셔 질질 끌고 다니는 빡빡이 말이에요.”

묵직한 에어 컴프레셔를 끌고 다니며 작업자들에게 오더를 내리고 있는 남자의 나이가, 아무리 봐도 너무 어려 보인다는 것이었다.

준민의 그 어이없음을 충분히 공감하는 박경완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이어서 찻잔을 한 차례 홀짝인 경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빡빡이, 그거 취소해라.”

“네?”

“어쩌면 저 친구가, 우리 구세주일지도 모르니까.”

경완의 대답을 들은 준민은, 더욱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작업장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준민의 그 표정이 놀람으로 바뀌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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