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22살이지만,
경력은 20년찹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특별한 일을 경험했지만, 우진의 일과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었다.
어차피 회귀자라고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니었으며.
새롭게 얻은 생활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허름한 집에 가족이라고는 어머니와 우진 두 사람뿐이었고, 며칠간은 딱히 집 밖에 나갈 일도 없었으니.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래야 생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무료해 보이는 하루하루는, 사실 우진에게 무척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달리며 쌓인 정신적 피로를 털어내고, 새롭게 얻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물론 우진에게 아침을 차려주던 어머니는,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었지만 말이다.
“우진이 너, 이제 슬슬 학교 갈 준비해야지?”
“학교 갈 준비요?”
“그래. 녀석아. 입학식 날 입을 옷도 좀 사고, 머리도 좀 정리하고…….”
회귀 후 처음으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은 우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않고 계셨지만, 집 안에만 틀어박혀 빈둥거리는 그가 조금은 걱정되셨음이 분명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나가려고 했어요.”
“그래?”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까요.”
나가려 했다는 우진의 말은 변명이 아니었다.
오늘부터는 정말, 세워뒀던 계획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어머니의 말씀처럼 학교 갈 준비 같은 것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늘이 2월 18일이니까……. 이제 슬슬 모집공고가 올라왔겠지?’
우진이 오늘 가려던 곳은, 전생에도 이맘때쯤 들락였던 건축사무소였다.
물론 전생과 달리 학교생활을 성실히 해볼 예정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용돈 벌이 정도는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학자금 대출도 대출이지만, 디자인 대학의 실습비도 한두 푼이 아니었으니.
부지런히 벌어둬서 나쁠 것이 없는 것이다.
우진은 단돈 백 원이라도 어머니께 손을 벌릴 생각이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지.’
든든히 식사를 마친 우진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금세 밖으로 나와,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 * *
전역 직후 우진의 집은, 강남구 개포동이었다.
우진이 회귀하기 전인 2030년 즈음에야 번쩍거리는 신축 아파트로 가득 찬 부촌 중의 부촌이었지만.
2010년인 지금의 기준에서는, 허름한 5층짜리 주공 아파트로 가득 차 있던 낙후된 동네 개포동.
‘진짜,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지.’
그의 집 또한 그 낡은 주공 아파트들 중 한 곳이었고.
우진은 그것이 아쉬우면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생의 어머니는 결국 내후년쯤 이 집을 파셨지만, 이번 생에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파신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시도록, 우진이 뜯어말릴 생각이었으니까.
‘그때 이 집만 안 파셨어도, 살림살이가 몇 배는 나으셨을 텐데…….’
4~5억에 겨우 팔리던 이 허름한 아파트가, 딱 십 년 뒤면 15억에도 없어서 못 판다는 사실을.
당시에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일단 일이나 가자, 지금 이런 생각 해봐야 뭣하겠어.’
부지런히 걸어 나와 버스를 탄 우진이 향한 곳은, 3호선 끝자락 수서역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서역 사거리에 자리 잡고 있을 현장사무소.
지금쯤 이곳에 인력이 엄청나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우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박경완 부장이었나? 그 사람을 찾아야 할 텐데…….’
정확한 날짜야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맘때쯤 3호선 종점이었던 수서역이 오금역까지 개통된다.
그리고 공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 모집된 현장인력들 때문에, 수서역 인근 인력사무소의 인력이 씨가 말라버렸다.
우진이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에서도 그가 전역하자마자 일했던 현장이, 바로 수서역이었으니 말이다.
수서역 사거리의 코너 라인에 완공을 앞두고 있는, 대형 오피스 건물 건설현장.
이번 생에도 우진은, 그곳을 첫 번째 일터로 정하였다.
‘물론 하려는 일은 조금 다르겠지만…….’
깡- 깡-!
버스에서 내린 우진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쇳소리를 들으며 빙긋 웃었다.
* * *
“아오, 미치겠네. 대체 인력확보 미리 안 해두고 뭐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희도 이렇게까지 부족할 줄은…….”
“안 그래도 준공까지 일정 빠듯한데……. 마감 치는 게 제일 빡센 거 몰라?”
“일단 연락 닿는 인력사무소에는 전부 다 전화 돌렸습니다, 그러니…….”
“하아, 전화 돌리면 사람이야 구할 수 있겠지. 그런데 비용은? 단가도 맞춰야 할 것 아냐!”
천웅건설의 수서역 오피스 건물 준공 현장.
그곳의 관리부장으로 나와 있는 박경완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건설현장에서 시간이란 곧 돈이나 다름없었는데, 마감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일정이 어그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준공이 늦어짐으로 인해 누적되는 손해는 곧 건설사의 책임이었고.
그 손해가 커질수록 현장 총 책임자인 박경완의 목은 위태위태하다 할 수 있었다.
“데모도(보조 근로자)야 어떻게든 구할 수 있어.”
“예, 부장님.”
“그러니까 내장 목공 제대로 가능한 업자 셋만 딱 데려와. 셋만.”
“아, 알겠습니다.”
“늦어도 내일부턴 B-1도 작업 들어가야 해. 알지?”
“B-1이면……. 카페 인테리어 말입니까?”
“그래 인마.”
경완의 말을 듣던 팀장 강준민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건물 1층에 대형 카페가 들어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쪽 인테리어 공사는 준공 일정과 무관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1층 인테리어까지 준공 날에 맞추랍니까?”
준민의 물음에, 경완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얼굴이 이렇게 썩어 들어가는 것 아냐.”
“아니, 대체 왜……?”
“도급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는 걸, 어떡하냐 그럼.”
“…….”
보통 이런 오피스 건물의 상업 시설 인테리어는, 건물 준공이 끝난 다음에 따로 일정이 잡힌다.
그러니까 1층의 카페 인테리어는, 일반적인 케이스에서라면 천웅건설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박경완 부장의 이야기로는 그게 아닌 것 같았으니, 준민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안으론 무조건 구해와야겠네요.”
“그렇지.”
“하아…….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부장님.”
“조금 웃돈 줘도 되니까, 무조건 실력자로 데려와. 알겠지?”
“그래야죠. 카페 도면 보니까, 디자인도 엄청 들어가 있던데…….”
한숨을 푹푹 쉰 강준민은, 샐쭉한 표정이 되었다.
일정이 어그러진 데에는 조금 여유를 부린 자신의 잘못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굴러갈 상황은 아니었다.
수서역 지하철 공사라는 악재와 인테리어 공사라는 변수가 겹치면서, 상황이 꼬이고 꼬였을 뿐이었다.
‘젠장. 카페는 건물주가 직접 운영하나본데……. 어쩐지 디자인 기획이 건물 로비까지 싹 다 통일되어 있더라니…….’
얼굴이 흙빛이 된 경완의 앞을 잽싸게 빠져나온 준민은, 서둘러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젠장. 까라면 까야지 뭐.’
상황이 못마땅한 것과 별개로 이러다 진짜 준공 일정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실무진 중 하나인 그 또한 책임을 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만가지 생각에 정신이 없어서일까?
준민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젊은 남자를, 신경조차 쓰지 못하였다.
* * *
이십 년 전 이곳 현장사무소에 왔을 때, 우진의 목적은 무척이나 단순하였다.
[현장 일을 해보고 싶어. 나중에 언젠가 대학을 다시 간다 해도, 현장에서 배운 일들이 분명히 도움 될 테지.]
물론 전생에선 결국 대학 문턱을 밟지 못했지만, 이때만 해도 우진에게는 배움이 절실했었다.
때문에 배우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건설현장은, 우진에게 완벽한 일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장한 몸뚱이와 열정만 가진 우진은, 현장일이 얼마나 힘든 건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땐 참 순수했었네.’
우진이 건설현장에서 가장 처음 했던 일은, 현장에서도 힘든 일로 유명한 형틀목공이었으니까.
[학생, 몸 쓰는 건 자신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일당은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그럼 오늘 한번 씨게 굴러 보자고.]
[감사합니다!]
형틀목공의 주요 업무는 간단하다.
도면을 검토하여 합판과 각재를 치수에 따라 재단하고 마름질한 뒤.
철골 기둥이나 벽체 등에 거푸집을 설치하는 것.
콘크리트를 부어 구조체를 만들 수 있도록, 그 틀을 제작하는 것이 형틀목공의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말이 간단하다는 것이지, 실제 업무 난이도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거푸집을 꼼꼼히 만들지 않으면 수평선이 어긋나버리기 일쑤였고.
조심하지 않으면 작업 중에 철근에 얻어맞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목재를 다루는 것이, 형틀목공의 가장 중요한 덕목.
때문에 처음 현장에 투입되었을 당시, 우진의 직책은 보조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는 데모도, 혹은 조공 이라고 불리는 보조인력.
다행인 것은 워낙 일이 힘든 탓인지 반장을 비롯한 상급 기공들의 대우가 친절하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사람 구하기가 힘드니까.’
힘든 것은 물론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은 업무 특성상, 지원자들도 하루 이틀 일하고 나면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 열정 넘치는 청춘이었던 우진은, 현장에서 장장 세 달을 악착같이 버티며 일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기공들로부터 제법 신뢰도 얻었었다.
[학생, 금방금방 느는데?]
[하하, 이 기회에 한번 눌러앉아보는 건 어떤가?]
[그래. 학생은 젊으니까, 공부도 좀 해서 자격증 몇 개 따면 괜찮을 거야.]
당시에 우진은 힘들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완성되는 건물을 보면 무척이나 뿌듯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진은, 그때의 스물둘 청년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형틀목공에 뛰어들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가다는 전생에서 할 만큼 했으니까.’
이번에 우진이 이곳에서 하려는 일은, 단지 몸만 쓰는 일이 아니었다.
“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무소에 문을 열고 들어간 우진은, 관리부장 박경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집공고 보고 왔는데요?”
“모집공고라면…….”
“내장목공 경력 3년 이상. 간단한 캐드, 스케치업 가능한 목공인력 구인공고요.”
“……?”
우진의 말을 들은 박경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두 눈을 꿈뻑였다.
방금 우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여러 모로 현실성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공고 올라간 게 두 시간 전인데……. 그걸 보고 벌써 왔다고?’
물론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이렇게 인력이 제 발로 찾아와 준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경완의 눈앞에 나타난 이 청년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주려 해도 햇병아리가 분명했다.
제대로 된 내장목공 기능공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 것이다.
“정말……. 기능공 맞아요?”
“아니면 여기 왜 왔겠습니까.”
“실례지만 나이가……?”
“스물둘이요.”
“…….”
너무도 당당한 우진의 태도에, 기가 차서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경완.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김지훈 반장님 아시죠?”
“……!”
“그분 밑에서 몇 년 굴렀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루만 딱 써보시죠. 맘에 안 드시면, 일당 안 주셔도 됩니다.”
혼란에 빠진 경완의 동공을 보며, 우진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