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프린트
1화
Prologue
디자인이 하고 싶었다.
세상을 내가 만든 멋진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내 바람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양심은 있냐?”
“예?”
“단지 ‘그것뿐’이라 길래.”
“…….”
“차라리 김 주임처럼, 매주 로또나 한 장씩 긁어봐 서 소장. 그게 조금은 더 생산적일 것 같은데.”
후우-
한숨 섞인 탄식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며, 까만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순간 말을 잃은 우진을 향해, 권 실장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실없는 소리 말고, 빨리 퇴근이나 해 짜샤. 내일 L시네마 현장 감리 가야되는 거 알지?”
“예, 예. 나이가 먹으니, 헛소리가 느나 봅니다.”
등짝을 팡팡 두들기는 권 실장을 힐끔 보며, 우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얄미운 표정으로 능글거리기는 해도. 그의 곁에 몇 남지 않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우, 졸려 뒤지겠네. 딱 내년까지만 현장 다니고, 은퇴하던지 해야겠어.”
권종우의 말을 들은 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실장님도 퍽이나 현실적이십니다.”
“크크, 내가 적어도 네 녀석보단 현실감 있는 편이지.”
치이익-
불이 채 꺼지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털어 낸 우진과 권 실장은, 사무실로 내려와 퇴근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짐을 챙긴 그는, 꾀죄죄한 배낭을 메고 내 앞을 지나 사무실을 나섰다.
“태워 줘?”
“아닙니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구라치지 말고.”
“거 참, 진짭니다.”
“알겠다. 그럼 오늘은 나 먼저 간다?”
우진을 향해 피식 웃어 보인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사무실 문을 나섰다.
끼이익-
그런데 그 순간.
뭔가 잊었던 사실이 떠오르기라도 한 양, 권 실장이 우진을 슬쩍 다시 응시하였다.
“야, 서우진이.”
“예?”
“디자인. 그거 뭐 별거 있냐?”
“……?”
“니가 맨날 하는 그거. 그게 디자인이야 인마.”
“갑자기 그게 무슨…….”
“그러니까 어깨 좀 빨딱 펴고 다니라고. 사내자식이 축 늘어져가지고는…….”
쾅-
속사포처럼 할 말만 쏟아낸 그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문을 닫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그를 보며.
우진은 다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우진은 제법 큰 건설업체의 현장소장이었다.
그러니까 우진이 매일같이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수많은 건설현장과 인테리어 공사현장의 시공 총괄 역할이었다.
해서 우진은, 권종우 실장의 격려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실무는 x도 모르는 것들이 위에서 디자인 총괄이랍시고 설치니……. 이런 거지 같은 도면이 자꾸 현장으로 내려오지.
-휴, 어쩌겠습니까, 실장님. 개떡 같은 도면이 와도 찰떡같이 만들어내는 게 저희 일인데요 뭘.
-차라리 우리 서우진이가 디자인 팀장으로 올라가는 게 더 낫겠어. 서 소장 감각이면 정말 기깔 나는 건물 하나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방금 기분 좀 좋았는데……. 그 거짓말, 믿어도 됩니까?
-크크크, 당연히 안 되지, 짜샤. 디자인은 무슨……. 목공이나 빨리 마무리하고 막걸리나 한 잔 때리러 가자.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권종우 실장은 종종 디자인 팀을 까고 싶을 때면, ‘우리 서우진이가 디자인해도 이것보단 낫겠네.’라는 말을 뒤에 덧붙이곤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진은, 그 말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 도면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임 차장도 디자이너라고 설치는데……. 그놈보단 내가 백 배쯤 낫겠지.’
결국 디자인이란, 머릿속에 있는 어떤 추상적인 미(美)의 개념을 실체화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시안을 가져다가 멋들어진 공간으로 뽑아내는 서우진의 일이야말로, 진정한 디자인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그럴싸한 합리화조차도, 오늘만큼은 우진의 기분을 완전히 풀어줄 수 없었다.
그동안 현장 일을 하면서 쌓이고 쌓인 울화가, 펑 하고 터져버린 날이었으니 말이다.
“후우.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긴 우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 *
우진이 향한 곳은, 강남이었다.
하지만 권 실장에게 말한 것처럼, 정말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늘 그는, 퇴근 후에 가려던 곳이 있었을 뿐이었다.
‘꽤나……. 오랜만인가?’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선 우진의 표정이, 살짝 상기되었다.
고즈넉한 풍경과 차분한 분위기.
강남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남’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이곳은, 우진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여긴……. 오랜만에 와도 여전하네.’
우진이 버스에 내려 찾아간 곳은, 높다란 언덕배기 위의 다 무너져가는 빌라촌이었다.
강남.
그것도 대치동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낙후된 달동네.
이곳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도 평당 억 단위가 넘는 멋들어진 신축 아파트들이 즐비했지만.
이곳만큼은 아직도 삼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이 낙후된 공간 자체를, 우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공간 안에 담긴 그의 추억만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젠, 좀 개발이 될 때도 됐는데 말이지.”
낡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우진의 행복했던 추억과 별개로, 이 낙후된 동네가 개발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으니 말이다.
낙후된 동네가 개발되기 위해서는 그 공간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만 했고.
이곳이 아직까지 개발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모두의 욕심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뭐, 그걸 전부 욕심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 실제로 생계가 걸려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랜만에 추억의 공간에 걸음을 해서까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이런 재개발 재건축의 현장일 포함되어 있었으니, 어찌 보면 퇴근해서까지도 일과 관련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것도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저벅- 저벅-
어둑해진 골목 안으로 한참 들어간 우진은, 익숙한 걸음으로 길을 찾아 낡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이층집에 작은 마당까지 딸려있는 단독주택.
이 집은 바로, 초등학생 시절 우진의 추억이 담긴, 그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 속의 집이었다.
물론 추억을 제외한다면, 우진의 지분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집이었지만 말이다.
“휴우.”
대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우진은, 결국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열어 젖혔다.
끼이익-
그러자 듣기 거북한 쇳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철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집을 가진 주인이야 따로 있었지만.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이 쓰러져 가는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
우진에게는 집안 곳곳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는 추억의 공간이었으나.
지금 이 집을 가진 소유주에게는, 그저 투자가치가 높은 강남 한복판 금싸라기 땅일 뿐이었다.
“……!”
마당에 들어선 우진의 표정은 더욱 상기되었다.
지금 그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에도 가끔 이 집 앞을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이 집의 안까지 들어온 것은, 거의 삼십 년 만의 일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어떤 공간보다 아름다운 곳.
우진은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 * *
우진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슴 속에 담겨있던 의문점 하나를 해결하고 싶어서였다.
‘정말 내 기억처럼……. 그렇게 완벽한 공간이었을까?’
우진의 기억 속의 이 집은, 그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비단 그가 가진 행복한 추억 때문만이 아니었다.
좁은 대지 위에 세워진 평범한 단독주택에 불과하지만.
잘게 쪼개진 구획과 디자인이, 수십 년 전에 지어진 주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공간.
어린 시절 그의 추억이 담긴 이 작은 단독주택은, 어쩌면 지금의 우진이 있게 해준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그의 손에서 그려진 수 많은 설계도면들은, 이 작은 공간에서 크고 작은 영감을 받은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저 추억 미화일지도 모르지만……. 꼭 한번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진은, 그의 꿈이 시작된 바로 이곳에서.
이제는 삶에 치여 희미해 져가는 그의 꿈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현실에 부딪쳐 꺼져가는 열정의 불씨를, 되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다시 예전처럼 설렐 수만 있다면……!’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은 우진은, 현관문을 덥석 움켜쥐었고.
이어서 조심스레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철컹-!
녹이 슨 것으로 모자라 누렇게 부식되어버린 낡은 철문.
이미 오래전에 잠금쇠가 고장 난 대문은, 우진이 당기자마자 활짝 열렸다.
이어서 현관 안으로 들어선 우진의 동공은, 조금씩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으니 말이었다.
“이, 이게……!”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아름다운 환상이 깨어져서?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금 우진의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그가 막연히 상상하던 바로 그 아름답고 완벽한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이미 수년이 넘어.
이제는 철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낡은 집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
어릴 적 우진이 살던 그 추억 속의 집이 우진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
우진은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치 소중한 애장품을 다루기라도 하듯, 집안 구석구석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하였다.
‘정말 내 기억 속 그대로야……!’
현관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우산꽂이부터 시작해서, 거실과 부엌 사이에 놓인 예쁜 무늬목 책장까지.
가구에는 먼지 하나 쌓여 있지 않았고, 모든 것은 우진이 기억하던 그대로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지만 잠시 후.
집 구석구석을 살피던 우진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경황이 없어 신발까지 신은 채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어디에도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방금 전에 생겨났던 옅은 발자국까지도.
스르륵-
거짓말처럼 우진이 보는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허, 허억……!”
그리고 이쯤 되자, 우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꿈인가?’
하지만 이것은 결코 꿈도 아니었고.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우진은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귀신이라도 만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어, 어쩌지……?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슬금슬금 집을 나서는 우진.
하지만 다음 순간.
우진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귓전으로, 기억 속 깊숙한 곳에 남겨져 있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었다.
[놀랍구나, 우진아.]
“……!”
[너는 정말 마흔이 넘도록, 삼십 년 전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방금 전처럼 소름 돋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아, 아저씨……!”
[자, 삼십 년 전에 약속했던 대로 네게 선물을 주마.]
“네……?”
[열두 살 서우진이 이 아저씨에게 얘기했던 꿈.]
“……?”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는 기회를, 네게 선물하도록 하마.]
우진은 고개를 휙 휙 돌리며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그를 결코 찾을 수 없었다.
‘어, 어지러워……!’
순간 그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으니까.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