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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209화 (완결) (209/209)

209. Epilogue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

북부를 가득 덮고 있던 눈이 서서히 녹고 있었다.

사시사철 우중충하던 평소와는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경사에 걸맞은 화창한 날씨 아래에, 라인란트 영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분위기 속에 한껏 들떠있었다.

디리링-

선술집을 가득 채운 손님들과 무르익어가는 술자리.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류트를 튕기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가 그들의 좋은 술안주가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전장은 검은 장미로 장식된 결혼식장! 은발의 귀공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세기의 결투가 시작되니!”

“한 사람은 아일라시스 여공작! 용의 마법을 휘두르는 절세의 마법사요!”

“다른 한 사람은 폴와이번 여공작! 용을 죽이는 기사단의 수장일지니!”

……물론, 그 노래가 남의 연애사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어우, 쓰다 써.

먹던 술맛이 시시각각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우와아, 2년 전에 일어난 일이 벌써 노래까지 만들어졌네.”

“은근슬쩍 자기 일 아니라고 빼지 마십쇼. 그쪽도 좋다고 끼어들어서 치고받아 놓고는.”

전속신관이라는 핑계로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잠탱이 수녀.

5년 동안 같이 다니다가 은근슬쩍 말도 반존대로 변한 게, 내가 나름 왕족이라는 사실은 옛 저녁에 잊어버린 모양이다.

“전 그때 되게 재밌었어요!”

“그러냐.”

오늘의 메뉴인 사슴고기를 크게 베어 물며, 옆자리에 앉은 아린이 말했다.

약속해 놓은 게 있으니 결혼은 해야겠고.

그렇다니 결혼은 무효라고 나선 라이아를 막아서기엔 내 인생이 처량하니.

중간에 끼어 있던 난 아주 죽을 맛이었는데 말이지.

“이안 아저씨가 알려줬었는데, 뭐라고 했더라아아…….”

그때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는 한 마디를 떠올리려는 듯, 아린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아, 맞다 그거!”

어느새 제 나름대로의 표현법을 찾아낸 듯, 아린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예전에 이안한테 이것저것 배우는 것 같더니, 이제 제법 현학적인 표현도 쓸 줄 알게 된 것 같네.

역시 그 노친네, 성격은 그래도 애들 가르치는 것만큼은 최고…….

“원래 X밥들 싸움이 제일 재밌댔어요!”

“푸웁-!”

거침없는 신님의 한 마디에 스텔라가 먹던 음료수를 뿜으며 켁켁거렸다.

“그래, X밥 싸움…….”

아일라시스의 절대자와 폴와이번의 수장한테 X밥이라니.

그 두 사람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마, 대륙에서 얘 하나 말곤 없지 않을까.

아 그리고, 방금 전까지 칭찬하던 거 전부 다 취소.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안 보는 사이에 애한테 뭘 가르치고 있는 거야?

“그나저나, 얼마 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는지 모르겠네.”

뻐근해져 오는 어깨를 어루만지며 사슴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어우, 이 잡다 만 누린내와 과하게 쓴 소스의 단맛.

역시 북부인한테는 요리를 시키는 게 아니라니까.

“전쟁 도중에 흩어진 제국 네크로맨서들 처리에, 브리간테 교황이 남겨놓은 실험체에, 곳곳에 유통되어있는 성혈까지…….”

“그래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잖아. 나머지는 신부놈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잔뜩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스텔라가 식탁에 엎어졌다.

계속된 여행으로 피로가 쌓인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수고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몇 번 두드려주니, 금세 좋다는 듯 잔뜩 풀어진 얼굴로 헤실거리고 있다.

벌컥-!

선술집의 문이 열리고, 왁자지껄하던 여관이 조용해진 것이 딱 그즈음이었다.

“라, 라인란트 기사단?”

“그것도 근위기사단이잖아? 여긴 도대체 무슨 일로…….”

은백색 갑옷을 두른 기사들의 등장에 선술집의 손님들이 하나같이 놀랐지만, 그 눈에 담긴 감정은 공포가 아니었다.

진귀한 것을 봤다는 경탄과 동경, 그리고 환희.

보자마자 벌벌 떨지 않는 걸 보니, 우리 착해빠진 형님이 기사들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실례하겠소.”

짧은 목례와 함께 한 무리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철컥- 철컥-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렇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의연한 자세로 술을 홀짝였다.

“클라인.”

“괜찮아.”

지금의 난 예전과 달리, 키도 훤칠하게 컸고, 머리도 검게 물들인 상황.

선술집에 있는 그 누구라 해도, 내가 클라인이란 걸 알아채지 못했단 말이다.

이번엔 절대로 안 들킬 자신이 있다.

자, 와라……!

“클라인 라인란트 제 2 왕자님.”

아, 진짜 제발 좀.

하다못해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줄 수는 없냐?

***

“소식이 온 이후로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대관식 준비가 한창인데, 이제야 나타나시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완공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라인란트 왕국의 왕성.

앞서서 복도를 걷고 있는 기사의 투구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난 그 대관식 때문에 이렇게 밍기적거린거라고.”

양옆에 기사들을 대동시킨 채 날 연행하는 것은 라인란트 왕국 근위기사단장 듄켈.

한때 내 호위를 맡았던 기사였다.

“아직 왕국이 설립된 지 5년밖에 안 됐잖아. 아무리 델라인이 태자 책봉을 받았다지만, 내가 왕국에 오래 붙어있어 봐야 좋을 게 없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라인란트는 왕국이 되었다.

북부인들의 압도적인 지지 아래에 건국되었기에 독립에 대한 반발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하인켈이 왕위에 올랐으니 문제없겠지만, 그것도 지금뿐이야.”

사람이 만든 체제인 이상, 그곳에는 반드시 틈이 있기 마련.

앞으로 10년만 더 지나면, 라인란트의 영웅담에 가려진 균열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10년의 세월은 라인란트에게 있어, 그 균열을 메꿀 수 있는 소중한 시간.

“그런 상황에 내가 왕성에 머물면, 쓸데없이 오해가 생긴다고.”

“오해라니…….”

내 말을 들은 듄켈이 내 쪽을 돌아보려는 순간.

“클라인!”

밝은 목소리와 함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라인란트 왕국의 1대 왕, 하인켈.

그리고 왕국의 태자, 델라인이었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다른, 화려한 옷을 입은 그들이 다가오자 기사들이 곧바로 예를 갖췄다.

“정말 오랜만이다 클라인! 키가 엄청 컸는데?”

“커야지. 언제까지 꼬맹이로 살 수도 없고.”

그렇게 나와 델라인이 오랜만에 만난 해후를 풀려고 한 것도 잠시.

댕- 댕-

“시간이 되었군.”

왕성 꼭대기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델라인이 황급히 날 재촉했다.

“가자, 클라인! 아바마마의 대관식인데, 너도 참석해야……!”

“아니, 난 안가.”

그렇지만 난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잡은 델라인의 손을 내렸다.

“안 간다니, 그게 무슨……?”

“…….”

내 말에 어리둥절한 델라인과는 달리, 하인켈은 내 말뜻을 이해한 듯 침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떠날 생각이구나.”

“예.”

하인켈의 말에 답한 뒤, 델라인에게 마저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건 대관식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별인사를 하러 온 거거든.”

작별.

그 말에 델라인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작별이라니, 가자기 그게 무슨……?”

“대관식은 향후 왕국을 운영할 인재, 그리고 권력자들이 한데 모이는 곳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걸어오는 것은, 왕국의 1대 황후. 프리실라.

대관식이라는 큰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정한 푸른 드레스 차림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전에 듣기로는, 내 어머니인 클레어가 손수 만들어준 옷이라 했다.

“거기에 내가 끼는 순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파벌이 생긴다는 말이지.”

프리실라의 설명을 보충하는 내 목소리에, 델라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난 가면 안 된다는 거야.”

지난 전쟁에서 내가 한 일, 그리고 지금의 내 위치.

이것들을 생각하면 단번에 답이 나온다.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둘째 왕자.

심지어 양옆에 있는 폴와이번, 아일라시스와도 연이 닿아있는 권력의 핵심.

만일 왕국의 귀족들이 날 중심으로 뭉치고자 획책한다면….

“애써 완성한 이 왕국을, 벌써부터 분열시키고 싶지는 않아.”

왕관의 무게는 무겁고, 그를 노리는 눈들 또한 너무나도 많다.

델라인과 하인켈에게 그럴 생각이 없다뿐이지, 일반적인 왕국이었다면 내 미래는 무조건 둘 중 하나.

숙청되던가, 아니면 내가 내 가족을 숙청하던가.

양쪽 모두 할 생각이 없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

분란의 중심인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다 핑계고, 귀찮은 일을 떠넘길 생각이란 말이지.’

이제 와서 태자니 뭐니 하는 감투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왕이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역시, 왕국의 태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툭-

어느새 주눅이 들어버린 델라인의 말을 끊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곧 한 나라의 왕족이 될 사람이 이렇게 순해서야.

앞날이 걱정되기도 한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기사들과 함께 싸운 게 누구지? 지난 5년 동안 이 왕국의 기초를 세운 건?”

“그, 그건…….”

“전쟁에서 내가 이끈 건 언데드. 북부 사람들이 아니야. 북부 사람들을 이끈 건 라인란트지.”

딱히 그를 위로할 생각도, 그를 두둔할 생각도 없이. 덤덤히 사실만을 입에 담았다.

“명심해. 자기는 자격 없다고 깎아내리는 거, 믿고 따라주는 사람한테는 엄청나게 실례라고.”

그 말과 함께, 난 등을 돌려 왕성을 걸어 나왔다.

“크, 클라인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괜찮네. 듄켈.”

날 막으려던 듄켈을 가로막은 것은 하인켈이었다.

“이제, 놓아줄 때가 된 걸세.”

그렇게 말한 하인켈은 떠나는 내 등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 덕에, 북부는 구원받았습니다. 아키몬드.”

아들인 클라인이 아닌, 아키몬드에게 보내는 한 마디.

“그러니 이젠 부디,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마지막은 떠나는 아들, 클라인에게 전하는 한 마디를 끝으로, 내 가족들은 대관식을 위해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벌컥-!

“와아아아아아--!”

“라인란트 만세! 하인켈 전하 만세!”

그들이 문을 여는 순간, 북부인들의 함성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왕성의 뒷문을 열어, 설원지대로 가는 길을 마주했다.

휘오오오오---!

이젠 언데드도, 몬스터도 없는 텅 빈 땅이 되어버린 설원지대.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오르자, 검은 깃털로 된 망토가 내 어깨를 감쌌다.

“늦으셨습니다.”

“가족회의잖아. 좀 봐줘.”

큰까마귀 기사단 단장, 코락스.

감시자들이 준비한 마차에 오르자, 몇 번 투레질을 한 말이 곧바로 북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완전 손해 보는 장사네요. 전쟁에서 그 고생을 한 보상으로 요구한 게 대장벽의 변경백 작위라니.”

“아뇨,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하는 스텔라였지만, 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일이 있어서요.”

“생각하던 일이요?”

그렇게 되묻는 아린의 목소리에, 난 목적지인 얼음성을 보며 말했다.

“얼음성에 남아있는 원혼들을 환원시키고, 그곳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 겁니다.”

대륙을 뒤흔든 악당의 요새는, 과거의 유물로 남겨져야 한다.

아무도 악용할 수 없도록.

누구도 이용할 수 없도록.

그리고 요새가 무너진 곳에는, 새로 태어날 생명을 위한 터전이 자리 잡겠지.

“그 옛날, 제 고향이 그러했듯이.”

짧은 맹세와 함께, 마차가 설원에 난 길을 내달렸다.

화창한 햇살이 오랫동안 땅을 뒤덮고 있던 눈을 녹이고, 그 아래에 숨죽여있던 한 줄기 꽃을 비추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끝난 자리에,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 完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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