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영웅.
새하얀 풍경이었다.
위도 아래도, 어디가 앞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새하얀 공간.
정처 없이 그곳을 걸어 나가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날 발견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어땠나? 두 번째 삶은.
“…어땠냐니.”
검의 영묘에서 만났던, 선과 잔향으로 이뤄진 사념체.
녀석은 그 질문과 함께 걸어온 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바로 앞에 마주 섰다.
- 가문의 환부를 도려내고, 출생에 얽힌 오명을 씻어내고.
“…….”
- 그렇게 달려나간 끝에, 결국 자네는 세상을 구했다네.
현세에 강림한 신이 되고자 하는 두 명의 성직자.
영원히 군림하고자 하는 한 명의 군주.
그들과의 싸움을 일컫는 말에, 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야.”
- …그대가 아니다?
그렇게 되묻는 사념의 말에 난 피식 웃었다.
“교단을 몰락시킨 건 내가 아니라 아린이야. 그들의 욕망을 위해 억지로 세상에 떨어진 찌꺼기지.”
이성도 지성도 없이, 그저 피만을 갈구하던 괴물.
그렇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날 불러 지성을 얻고자 했고, 끝내는 생명과 함께 공존하는 것을 선택했다.
- 그 안타까운 존재가 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네가 그녀를 인도했기 때문이야.
“지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걔처럼 순진한 성격이 나올 리가 없잖아.”
그녀가 만들어진 목적은 케르시아스의 신체를 재현하기 위함.
그리고 실패작인 그녀의 용도는 사람의 피를 성혈로 변환하는 도구였다.
태어날 때부터 그 몸에 지닌 끓어오르는 식인 충동,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들어낸 인간에 대한 악의.
아린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눌러 담으며, 날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날 따라다니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지금 아린의 모습은, 그 녀석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날개를 활짝 편 채 창공을 누비는 아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내가 만든 쿠키를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 그렇다면 황제는? 제국의 침공을 막는 것은 자네 아니었나?
“굳이 내가 아니라도 할 수 있던 일이었어. 헬리안 같은 머저리 따위, 하인켈이 마음만 먹었으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고.”
제국의 압박에 맞서 지금까지 가문을 유지한 것은 내가 아닌 라인란트였다.
제국이 아닌 자신의 고향에 긍지를 갖는 기사들을 키워낸 것은 내가 아닌, 북부의 기사 자신들이었다.
내가 한 것은 등을 밀어준 것뿐.
그리고 이따금씩 그들의 주변에 놓인 곁가지 몇 개를 쳐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지. 애당초, 이게 아니었으면 내가 손이라도 대 봤을 것 같아?”
손에 들린 노르드빈트를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성을 잃은 황제가 황성과 동화되려 한 그때, 난 이미 언데드와 무기를 모두 소모한 상태였다.
“폭주하는 황제를 막아낸 건 내가 아니라, 노르드빈트에 담겨있던 수많은 북부 기사들.”
- …….
“정확히는, 영묘에 자신의 의지를 남기기로 한 그들의 선택 때문이야.”
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더 신랄해지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뭐,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관대해봤자 일을 그르칠 뿐이니까.
- 아무래도 아키몬드, 자네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인가 보군.
끝까지 내 공을 부정하는 날 향해 사념체가 말했다.
처음 검의 영묘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퍽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너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나, 말인가?
그렇지만 난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유추한 결과, 이곳은 노르드빈트의 내부.
한데 모인 영혼이 머무는…. 일단 심상세계라고 부르면 되겠지.
“결국 이 모든 걸 시작한 건 너잖아.”
- …….
“성검이 아닌 노르드빈트로 날 베고, 내 혼을 안배하고, 끝내는 날 이곳에 데려다 놓은 대륙의 영웅.”
노르드빈트에 목이 베었다면, 그의 영혼 또한 안에 남아있을 터.
그렇지만 최후의 일격을 날릴 때, 그는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라 함은 어쩌면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
“베르켈.”
그의 이름을 부르자, 흐릿한 사념체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잠시 후.
후욱-!
바람 소리와 함께 흐릿한 형체가 걷혀나가고, 내 기억 속 영웅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베르켈 라인란트.
나의 숙적이자, 내 목표.
전락할 대로 전락한 이 악당에게, 원치도 않는 두 번째 삶을 준 장본인이었다.
“역시 윈터폴의 네크로맨서야. 설마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윈터폴.
얼마 만에 듣는 고향의 이름인가.
소소한 감동과 함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지. 반가워, 아키몬드.”
“……그래, 반갑다. 베르켈.”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고, 서로의 목을 노리던 전쟁.
200년의 시간을 지나서야, 그와 난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의문이 드는데.
“뭐가?”
짧은 인사와 몇 마디의 옛날얘기.
소소한 잡담에 한창이던 와중, 베르켈은 날 보며 물었다.
- 네 말에 따르면 교단도 제국도, 결국 언젠간 스스로 멸망했을 거라는 말이잖아?
“그렇지.”
수십 배는 많은 피를 흘리고.
수천 배는 많은 인간의 목숨을 희생한 끝에 말이지.
그렇게 덧붙일 새도 없이, 베르켈은 날 향해 물었다.
- 그렇다면, 넌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라인란트를 도운 거지?
“…….”
이전에 들었던 질문의 반복이었다.
설원에서 레이븐이 내게 건넸던 질문.
내가 쓰러질 때마다, 아린이 내게 건넸던 질문.
“책임감 때문이지.”
언제나 그랬듯, 그들에게 들려준 대답을 읊었다.
“좋든 싫든 라인란트의 몸으로 태어났고, 내 탄생에 얽힌 비극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적은 내 지식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고 있었으니까.”
광기에 미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수려 했던 악당이, 한참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돌아보니 이게 참, 부끄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다.
아키몬드 교단.
팔리만 엘.
케르시아스 신성교단.
그리고 멜디르 제국까지.
하나같이 내가 했던 방식대로 제 욕심을 채우고자 창궐했고.
스승님과 선배들이 구축한 사령술은 망자와의 소통과 안내가 아닌, 혼을 속박하여 사람을 죽이는 기술로 변모해있었으니까.
“나로 인해 벌어진 흔적들을 지우고 떠나기 위해. 그게 내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뛰어다녔던…….”
줄줄이 읊고 있던 말이 점점 잦아들어, 종국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이 새하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베르켈 뿐.
그 사실을 떠올리자, 지금껏 말해왔던 이유 너머에 있는 한 마디가 나도 모르게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지.”
마음에도 없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 아무에게도 섣불리 꺼내지 않던 한 마디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난, 너처럼 되고 싶었다.”
베르켈을 향해.
내 앞을 가로막은 영웅을 향해, 난 말했다.
“광기와 증오에 미쳐 사람을 죽이고자 싸우는 게 아니라, 내 손에 쥔 것들을 지키고자 싸워보고 싶었어.”
200년 전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끝에 와서야, 난 싸움을 결심할 수 있었다.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의를 위해 행동하는…….”
하이델베르그의 하수구에서 날 꺼낸 스승님처럼.
내게서 사람들을 구하고자 날 말아선 베르켈을 보며.
그의 유지를 받들어, 선의와 명예를 위해 싸우던 라인란트의 기사들처럼.
“그래. 난, 베르켈 너와 같은…….”
어린아이의 투정이라 할 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을 보지도 않은 채, 허울 좋은 헛소리라며 비웃을 터였다.
한 번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제에, 품에 맞지도 않는 이상을 품었다며 손가락질 할 터였다.
그러니 이곳에서만큼은.
날 이곳에 있게 한, 영웅의 앞에서만큼은.
난 모든 허울을 벗어던진 채, 애원하듯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영웅이, 되고 싶었어.”
말하고 나서야 뒤늦게 수치심이 얼굴을 뒤덮었다.
주워 담으려 해도 할 수 없는 후회.
내 악행과 타락을 전부 지켜본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내가 항상 말했었지.
한참 만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기가 찬다는 듯.
힘 빠지는 목소리와 함께, 베르켈은 점차 내게로 다가왔다.
-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본질이 아닌, 행동과 선택일지니.
입에 붙도록 말해왔던 문구가 흘러나오고, 천천히 올라간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툭, 툭.
- 그리고 네 선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했어.
베르켈이 직접 내게 전하는 말했다.
- 그러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가라. 아키몬드.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곧바로 날 지나쳐 뒤편으로 걸어갔다.
- 넌 이미, 우리들의 영웅이야.
한 마디.
죄 많은 내 삶에서, 결코 들을 수 없다 생각했던 한 마디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가 걸어간 자리를 보았지만, 더 이상 베르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마지막 가는 길, 안내 잘 부탁한다. 네크로맨서.
다만 그의 마지막 전언만이, 내 귓가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
“도련님 일어났어요?”
“클라인…!”
“제기랄, 이젠 하도 쓰러져대니까 뭐 새롭지도 않다 이놈아!”
정신을 차리자 눈앞을 채운 건 나와 함께했던 이들의 얼굴이었다.
아린, 이안, 시엘, 스텔라, 라이아.
하인켈과 듄켈, 그리고 델라인까지.
저 멀리 황성의 첨탑에서 휘날리는 라인란트의 문양은,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 일어났나? 클라인.
“……그래.”
귓가에 들리는 망자의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라이아의 만류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난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할 일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내 말에, 시엘은 말없이 라이아를 제지했다.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 아린이 내게 힘을 공급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지려는 내 몸을 스텔라가 부축했다.
- 이걸로, 다 끝났군.
푸른 빛무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검의 영묘에 의지를 맡긴 기사들의 영혼.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 싸워온, 수많은 망자들의 혼이었다.
“맞아. 다 끝났지.”
내 말에 양옆에 선 레이븐과 데스나이트들.
그리고 리치인 앙헬이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파츳-!
정제된 마기가 푸른 빛을 내뿜었다.
- 망자의 왕이, 충성스러운 나의 군대에게 고한다.
언데드들의 몸에 새겨진 계약문이 빛나며, 그들과 나의 정신이 이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 수많은 시련을 넘어, 기나긴 싸움이 끝났습니다.
망자의 마지막 여행길에는 그에 맞는 격이 필요한 법.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에 앙헬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은 채 내 말을 기다렸다.
- 그리고 싸움이 끝남으로써, 우리가 맺은 계약 또한 종료되었죠.
스스스스……!
언데드들의 몸에 새겨진 계약문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계약문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은 이제 언데드가 아닌, 환원을 기다리는 망자.
네크로맨서인 내가, 길잡이로서 인도해야 할 양들이다.
- 하여, 그대들의 길잡이 클라인 라인란트의 이름으로 이곳에 모인 망자들을 환원합니다.
양팔을 벌려, 영혼들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초창기부터 소환해 함께했던 스켈레톤.
사막에서 만난 목 없는 기수, 듀라한.
그리고 얼음성에서부터 나와 함께했던 수많은 영혼들.
질서정연하게 마지막 예를 표한 망자의 군대가, 푸르른 빛무리가 되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봐, 저기……!”
“우, 우와아아…….”
수백만 영혼이 한데 모여 환원되는 광경.
극도로 높아진 혼의 밀도에 의해, 사령술과는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도 그 편린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어.”
네크로맨서에게만 허락된, 영혼의 빛무리.
하늘로 올라가는 그들이 자아내는, 솟아오르는 영혼의 은하수.
그것을 보고 있는 사이, 곳곳에서 이별을 고하는 영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먼저 갑니다 대장.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쇼!
- 보고 싶다고 먼저 죽으면 꼭 언데드로 만들어라. 알았지 꼬마야?!
악담인지 덕담인지 모를 말과 함께, 하늘날개 기사들이 먼저 여행길에 올랐다.
‘잔말 말고 꺼져!’라고 외치는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목소리에 한없이 고여있는 물기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아챘을 것이다.
- 이야~ 라인란트 왕국이라니, 오질라게 출세했구만! 크하하하-!
- 명심하거라 7대. 왕관의 무게는 무거울 거다. 단단히 각오하고 받아들이도록.
- 걱정 말거라. 너희들이라면 잘 견뎌낼 테니까.
이제 노인이 된 아들들의 미래를 축복하며, 루델이 선조들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제 모른 삶을 걸고, 과업을 완수하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하인켈을 보며, 루델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깨에 힘 좀 빼라니까.’
그 말에 하인켈의 어깨가 흠칫 떨리고, 그는 결국 참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 이상한 데로 보내기만 해봐 아키몬드! 죽어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 이미 죽었는데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 늦지 않게 와요. 선배! 엇갈리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절교야!
레이븐을 제외한 베르켈의 기사들은 언제나 그랬듯, 정겹게 어울리며 여정을 떠났다.
200년의 세월을 넘어 함께 싸운 기사들.
붉은 수레의 기사 로드릭은 떠나기 전, 내게 열세 번째 기사라는 과분한 호칭을 남겨주었다.
- 클라인.
수많은 작별 끝에 고개를 들자, 그곳에 있는 것은 내 고위 언데드들.
- 나이트 골렘 타이탄, 임무 종료. 다시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어.”
타이탄이 맨 먼저 그렇게 예를 표하며, 천천히 가동을 정지했다.
- 옛 제국의 동료들을 만나면, 할 얘기가 산더미겠군.
“그러냐?”
- 그렇지. 그리고 가는 길에 한 마디 하자면….
앙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맞장구치자, 그는 내 어깨룰 두드리며 날 자니쳐갔다.
- 책임을 다했으니, 이젠 자네 인생을 살게.
“……!”
- 자넨 그럴 자격이 있어. 클라인.
할 말을 마친 앙헬이 여행길에 올랐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사이였기에, 구태여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 그리고, 마지막엔 내가 남는군.
나와 마주선 레이븐이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없는 깡통 대가리.
다 썩어가는 몸뚱이에서 여기까지 키워놨는데 떠나보내야 한다니, 아깝기 그지없었다.
- 먼저 할 말은 앙헬 녀석이 다 했으니, 난 간단히 하고 가겠네.
감회가 새로운 듯, 그는 내 이마를 통통 두드린 뒤 날 지나쳐 걸어갔다.
- 먼저 가겠네. 잘 살다 오게, 친구여.
“……친구.”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
처음 들어보는 한 마디와 함께, 레이븐이 마지막으로 길을 떠났다.
올려다본 밤하늘을 가득 메꾸는 영혼의 빛.
한동안 그들을 지켜본 뒤, 하늘에 두었던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클라인…!”
“우리가 이겼어, 클라인!”
“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라인.”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망할 조카놈아.”
“어서 오세요, 도련님!”
내가 구한 세상에서, 이 땅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내 사람들.
“……가자.”
한 때 증오했던, 한 때 적대했던 이 땅을 박차며, 난 그들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네크로맨서 아키몬드로서의 책임이 아닌.
클라인 라인란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