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205화 (205/209)

205. 노르드빈트(1)

‘베르켈 전하의 업적은 눈부시지만, 지난 200년간 라인란트의 검술도 크게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는 하인켈 전하께서….’

불현듯, 이전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창 신부 놈에게 물고문을 받고 있던 때.

하인켈과 베르켈 중 누가 강하냐는 아린의 질문에 듄켈 녀석이 대답한 말이었지.

‘아니.’

그때의 난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고, 듄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날 달래듯 말했었다.

‘도련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서먹하기 그지없었던 하인켈과의 관계.

마력 없이 태어난 몸.

그것 때문에 듄켈은, 내가 내심 하인켈을 원망하고 있을 거란 지레짐작을 한 것이겠지.

“베르켈이 가장 강해.”

하지만,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평생 검에 매진하고 정진해 온 하인켈을 폄하할 생각도, 그를 원망할 생각조차도 없었다.

다만, 그와 직접 대적해 본 악당으로서.

그의 검에 쓰러져 생을 마감했던 자로서, 냉철한 평가를 내렸던 것 뿐이다.

환생을 겪은 이후 내가 만났던 모든 기사들.

모든 검사들과, 무력을 사용하는 모든 존재들.

그 모두를 통틀어서 비교한다 하더라도, 내 대답은 언제나 같을 것이다.

대륙 최강의 기사는 언제나 한 사람.

베르켈 라인란트 뿐이라고.

***

- 말도 안 돼.

- 베르켈 라인란트라고? 저자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움을 표하는 것은 나와 레이븐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제국에 사는 자라면.

아니, 대륙에 살고 있는 자라면 누구 할 것 없이 그의 이름을 듣고 자라왔을 테니까.

“…….”

우릴 향해 검을 겨눈 베르켈의 표정은 평온했다.

한 치 의문도, 한 치 감정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눈.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던 찰나.

“대륙의 영웅, 베르켈 라인란트 경.”

베르켈과 어깨를 나란히 한 황제가 손을 들어 베르켈에게 명령을 내렸다.

“200년 전에 경이 그리했듯, 대륙을 위협하는 적들을 모조리 처단하시오.”

황제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위화감.

그것을 느낀 내가 눈을 가늘게 뜬 그 순간.

촤륵-!

베르켈은 마치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이미 내 코앞까지 당도한 채 검을 뻗어오고 있었다.

“크으?!”

예지가 없었다면 공격을 인식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을 터.

그렇지만 난 한 박자 빠르게 검을 세워 베르켈의 검을 흘려냈다.

쿠콰콰쾅-!

검의 경로를 비틀자, 어깨 너머에 세워진 벽이 굉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200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검기과 망설임 없는 검로.

몇 번을 봐도 저것은 틀림없이, 베르켈 라인란트의 검술이었다.

“대응이 빠르군. 훌륭한 눈이야.”

“?!”

무표정한 베르켈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그 말에 흠칫한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은 채, 베르켈의 발이 내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어……!”

“하지만, 적의 말 한마디에 연연하면 이런 틈이 생기는 법이지.”

쿠콰콰쾅-!

발차기를 견디지 못한 채 날아간 몸이 무너진 벽의 잔해에 쳐박혔다.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지만, 다행히도 척추 쪽에 큰 손상은 없어 보였다.

“일어서게. 그대가 진정 라인란트의 일원을 자처한다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될 터.”

- 제길, 베르켈!

키리릭-!

베르켈의 접근을 먼저 알아챈 이유는 미래를 내다보는 내 눈 때문이다.

뒤늦게 베르켈의 공격을 감지한 레이븐이 검을 뻗자, 베르켈과 그의 검이 서로 뒤얽혔다.

“레이븐 폴드링. 자네인가?”

-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 베르켈! 왜 자네가 이곳에……!

카카카캉-!

서로 한 번의 검격을 내지른 것처럼 보였음에도 수십 개의 검명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곧잘 이렇게 검을 주고받았었지.”

- ?!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난 그대들의 적일세.”

하지만 그는 마치 레이븐의 검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익숙하게 레이븐의 검을 파훼해나갔다.

콱!

사선으로 검을 쳐내 레이븐의 가슴 쪽 방어를 풀어버린 베르켈이 그의 갑옷을 잡아챘다.

- 크으?!

마력이 가득 담긴 아귀에 영체로 된 레이븐의 갑옷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레이븐은 그 손을 쳐내기 위해 곧바로 그의 팔을 맞잡았지만 그 순간.

쿠콰아앙-!

베르켈은 한 손으로 레이븐의 몸을 들어, 언데드들과의 싸움이 한창인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내던져버렸다.

- 크어……!

- 데스나이트를 집어던진다니…!

내가 소환하는 데스나이트 중 가장 강력한 기사, 레이븐이 나가떨어지자 다른 기사들이 곧바로 경계를 취했다.

투화악-!

그렇지만 베르켈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다는 듯, 한데 모인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기사 한 명과 수십 명의 데스나이트들.

그렇지만 난 두 집단이 충돌하기 전, 손을 들어 다른 언데드로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이탄-!”

쿠콰아아아앙-!

소환 해제 후, 계약문을 다시 작동시켜 즉시 재소환.

급격한 마기 운용으로 인한 반동이 온 몸을 괴롭혔지만, 다행히 베르켈이 데스나이트들과 충돌하는 것은 막아낼 수 있었다.

- 접근, 불허.

“나이트 골렘. 이 녀석을 뚫는데 꽤나 골머리 썩었었지. 하지만.”

끼기기기긱……!

기사 한 명의 검과 레어메탈로 이뤄진 거인의 주먹.

체급, 육체재질, 마력 등 모든 면에서 격이 다른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존재의 힘싸움은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 나이트 골렘과 정면으로 힘대결을 한다고?

- 저게 정녕 사람이 맞기는 한 건가?

파츳-!

그 목소리와 함께, 힘싸움 중이던 베르켈의 몸 곳곳에 불꽃이 일었다.

“?!”

예고도 없이 생겨난 마력 반응에 베르켈의 눈이 가늘어진 그 순간.

쿠콰아아아앙-!

싸움을 지켜보던 앙헬이 설치해둔 마법, [폭뢰]가 베르켈의 몸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지금이야!”

- 명령 확인.

아무리 고강한 기사라 할지라도, 마법으로 인한 폭발에는 자세가 풀어질 터.

쿠콰아아앙-!

내 명령을 받은 타이탄이 곧바로 주먹을 올려치자, 한 막자 방어가 늦었던 베르켈의 몸이 황제가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촤아아악-!

그렇지만,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베르켈은 두 다리로 땅을 짚은 채 자세를 고쳐잡을 뿐.

연기를 걷어낸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 얼음성을 봤을 땐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 성을 뚫었는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납득이 되는군.

우세를 점하고 있던 전세가 단번에 황제 쪽으로 기울었다.

언데드들이 형성한 진형도 붕괴했고, 손상된 기사들도 부지기수.

설상가상으로 모든 언데드들이 베르켈 한 사람을 막고 있던 탓에, 황제의 언데드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복구를 전부 끝마친 상태였다.

- 홀로 군단을 상대할 수 있는 검사라니, 저런 말도 안되는 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지. 나도 200년 전에 그렇게 생각했어.”

베르켈과 함께한 열 두 명의 기사.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마법사와 신관들.

얼음성을 공략함에 있어, 그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원정대의 수장, 베르켈 라인란트의 힘을 최대한 온존하는 것.’

그만큼 베르켈과 다른 기사들의 실력 차이는 확연했다.

다른 열 두 기사가 전부 모여도, 그를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레이븐을 압도한 베르켈의 모습을 보니, 그 소문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훌륭하군.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전세가 역전된 것을 확인한 황제는 곧바로 손을 들어 나머지 언데드들을 준비시켰다.

- 놈들이 온다!

- 기사단 밀집 대형으로! 큰 놈들부터 차례대로 처리해야……!

술자의 지휘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언데드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전과 같은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옆에 선 기사, 베르켈 라인란트.

그가 난입하는 순간, 이 진형은 언제 붕괴될지 몰랐으니까.

“어떤가, 아키몬드? 제법 훌륭한 성취이지 않은가?”

언제 충돌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렇지만 불현 듯 침묵을 깨고, 황제가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 황좌에 앉아서 끊임없이 생각한 결과라네.”

“결과?”

얼굴을 찌푸린 내가 그렇게 되묻자, 황제는 한결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륙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만들어낸 연합군, 그곳에서 고르고 고른 최강의 기사단…. 그것들을 가지고도 난 그대를 이길 수 없었거든.”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통일왕조.

대륙 정중앙을 지배하는 제국의 힘이 창출하는 어마어마한 가치.

당시의 황제가 내게 대항하고자 모았던 힘은 말 그대로, 대륙이 지닌 모든 힘의 집합체였다.

“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힘과 권력. 그것들을 가지고도 난 네크로맨서 하나를 이길 수 없었지.”

“…….”

“그렇다면 이런 황좌 따위, 그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장식품일 뿐이야.”

등 뒤에 놓인 제국 황제의 상징.

그것을 장식품이라 부른 황제는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언데드들을 보았다.

“하여, 난 200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대의 힘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네.”

“……뭐?”

“그대의 사령술을 연구하고, 그대의 언데드를 재현하며, 끝내는 그대를 넘어선 네크로맨서가 되고자 했었지.”

하늘 위에 떠오른 황성과 그곳에서 뿜어져나오는 언데드들.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불현듯 가슴 속에서 검고 탁한 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자네가 휘두르던 힘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으니 말일세.”

내 이름을 울부짖으며 힘을 좇던 아키몬드 교단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검은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그런 내게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 기대감이 가득찬 눈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도, 야심도, 반역도 생각하지 않는 나만의 군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살덩이들이 흐느꼈다.

적을 향한 적대감이 아닌, 그저 죽여달라 호소하는 희생자들의 아우성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히 사지로 뛰어드는 용맹한 기사들!”

완전히 짓이겨진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괴성이 흘러나왔다.

의지도 지성도 빼앗긴 채, 투쟁본능과 분노만이 남은 처량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내 옆을 보좌하는, 대륙 최강의 영웅까지-!”

“…….”

그림자에 가려진 베르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 속을 흐르는 마력의 흐름.

그리고 혼의 파장까지.

역시, 지금 베르켈의 상태는…….

- 클라인.

“괜찮아. 두 번은 안 넘어가니까. 그리고….”

앙헬의 부름에 답하며 마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의 검에 튕겨 날아갔을 때에 이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상한 대로야. 확인했어.”

난 전투 내내 언데드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그의 몸 속에 흐르는 마력 흐름, 그리고 혼의 파장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어떤가, 아키몬드? 후배의 연구 치고는 꽤 놀라운 성과 아닌…….”

“아니. 실격이다.”

기고만장해진 채 주절거리는 그의 말을 끊고, 끓어오른 감정을 가라앉혔다.

“하이델베르그의 부랑아, 멜디르 알펜.”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의 본명과 출생.

그것을 부르자, 여유롭던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넌 200년 전에 비해 발전하긴커녕, 그때보다 더 추한 몰골로 전락했다.”

“……뭐라?”

심기가 거슬렸던 것일까?

오히려 좋다.

끓어오르던 분노가 한층 가라앉자 그의 결함, 그의 약점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네가 베르켈에게 사용했던 건, 헬리안과의 싸움을 마무리했을 때 제국군 사령관을 자결시켰던 언령.”

평범한 인간은 잠깐 들은 것 만으로도 자결하게 할 정도의 위력을 지닌 권능.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가, 이 대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였다.

“넌 200년 전 확보한 베르켈의 신체를 성혈로 복구하고, 언령을 사용해서 정신을 구속했어.”

성혈을 주사하여 젊음을 되찾은 헬리안.

그리고 황제의 은총이라며 성혈을 받아마신 수많은 제국 귀족들, 그리고 신관들.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하면, 베르켈이 이 자리에 있는 이 상황 또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까지 추잡한 짓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절반 뿐인 성공일 뿐.”

“……!”

“그러니 아직 저 녀석한테 자의식이 남아있는 거잖아. 안 그래?”

전투 중 베르켈이 나에게 했던 말.

레이븐과 나눈 대화.

만일 그가 황제에게 완전히 정신을 장악당했다면, 그런 것이 가능했을 리 없다.

반란이 두려워 자기 사람들을 언데드로 갈아치운 저 겁쟁이가, 그걸 용납할 수 있을 리 없다.

“……꽤 훌륭한 추리였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걸 알아챘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네 말대로야. 그다지 달라진 건 없어.”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황제.

그렇지만 그 말에 동조하는 내 표정은, 방금 전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지.”

스릉-!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특징 없는 검은 손잡이에 달려있는 새하얀 칼날.

베르켈의 검, 노르드빈트였다.

“피차 이런 꼴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할 일은 끝마쳐주마. 베르켈.”

“…….”

날 살해한 영웅의 애검을 손에 쥔 채.

날 굴복시킨 기사의 가문을 짊어진 채.

난 왕좌 위에 고고히 서 있는 베르켈을 향해, 천천히 검을 겨눴다.

“200년 전의 패배, 이 자리에서 되갚아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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