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영웅이 돌아온다
“왔군, 아키몬드.”
그는 날 클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끔찍한 살덩이를 등지고, 왕좌에 오만하게 앉아있는 청년.
황태자의 몸을 뒤집어쓴 그는 200년 전 나와 대치했던 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얄궂은 일이군. 설마 자네와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난 감흥 없이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한 손에는 황실에 전해지는 보검 엑셀시어를 든 채, 천천히 날 향해 다가오는 황제.
- 크르르르르……!
그의 곁에서 하나 둘, 기괴하게 뒤틀린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철컥-!
검을 치켜든 채 날 노려보는 데스나이트들.
주먹을 맞부딪히며 날 향해 으르렁거리는 거구의 골렘들.
그리고 온갖 마법을 캐스팅한 채,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 노려보는 리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워어어어----!
굉음과 함께 황제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의 등 뒤에서 꿈틀대던 거대한 살덩이.
그곳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머리가 이빨을 번득이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시룡(屍龍).’
고대에 존재했던 용의 신체 구조를 골자삼아, 생명체의 살덩이와 피로 직조해내는 마물.
시엘의 몸에 용의 인자를 박아넣던 엘프란의 연구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익숙한 포진인데.”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기 그지없군.”
너무나도 익숙한 병력배치와 언데드의 설계.
그가 서 있는 이 성이 그렇듯, 저 언데드들이 누굴 보며 만들었는지는 이미 명확했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도 한 잔 내주고 싶은 심정이네만…. 보다시피 내관들 상태가 영 시원찮아서 말일세.”
진형을 갖춘 황제의 병진 뒤에 선 수많은 고깃덩이들.
중간중간 붙어있는 옷가지나 장신구들만이 그들이 예전에 무엇이었는지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피차 지체할 시간은 없는 듯하니, 슬슬 시작하지.”
그렇게 말한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카앙-!
불꽃이 튀며 코앞까지 날아온 데스나이트의 검이 튕겨져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군? 내 나름대로 기습을 걸어본 것인데 말이야.”
“기습은 개뿔, 살기나 좀 지우고 지껄이던가.”
파츳-!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는 동시에 푸르게 타오르는 계약문에서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이 베르켈 경이 상대했던 언데드 군단이란 말이지?”
베르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꼬리가 움찔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 옛날 생각이 나는군. 우리 원정대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건 아키몬드가 아니라 네녀석이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걸어나온 검은 갑옷의 기사가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친우를 모욕하지 마라, 황제.
베르켈과 함께한 열두 기사들 중 최초의 1인.
큰까마귀의 기사, 레이븐 폴드링이 검을 세워 황제의 목을 겨눴다.
- 너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입에 담아도 될 이름이 아니야.
“허, 그렇단 말이지?”
베르켈의 기사가 내뱉은 말에 황제는 재밌다는 듯 언데드들을 돌진시켰다.
- 크워어어어어-!
하늘을 수놓는 온갖 속성의 공격마법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데스나이트.
그렇지만 그것들은 내 앞에 도달하기 직전, 계약문에서 뛰쳐나온 그림자들에 의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끼기기기긱!
검을 치켜든 채 황제의 기사를 막아선 것은, 키예스를 위시한 하늘날개 기사단.
- 이제야 당신을 향해 검을 드는군, 황제!
“음? 그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에 미간이 좁혀진 것도 잠시.
“하하, 이것 참!”
황제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듯, 호탕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래, 그대들은 죽어서까지 짐을 배신하겠다는 말인가?”
황제의 비밀을 본 대가로 모든 것을 잃은 기사들.
황제는 그들을 도발하듯 일부러 웃음으로 그들을 자극했지만, 하늘날개 기사들은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 배신은 무슨.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는데.
- 네놈 모가지 정도면 우리 단장님 은퇴선물로 딱일 것 같단 말이야. 안 그래?
이안 라인란트.
그 이름이 들리자 내내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 애써 준비한 무대일 텐데, 벌써 가면이 벗겨지려고 하면 어떡하나, 젊은이.
그렇게 말하며 뒤이어 걸어나온 것은 아이신기오르의 마지막 궁정마술사인 언데드 리치 앙헬과, 옛 사막을 누비던 목없는 기수들.
딱-!
뼈로 이뤄진 손가락을 튕기자, 공중에 떠올라있던 황제의 리치의 어깨게서 순식간에 폭발이 일었다.
- 키에에에엑?!
- 이런 폭발마법도 제대로 못막는 삼류를 리치랍시고 데려오다니, 망국의 마법사라고 해서 너무 얕본 것 아닌가?
나보다도 오랜 시설을 리치로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마력.
앙헬이 다루는 고대의 마법은, 급조한 언데드 마법사 따위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쿠쿵-!
전열을 붕괴시키고자 돌진한 황제의 골렘들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 돌파. 불허.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아키몬드 군단의 선봉장임과 동시에, 얼음성의 수문장.
수많은 기사들을 좌절시킨 섀도우 골렘 타이탄이었다.
콰르르르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200년간 얼음성을 지켜온 골룡, 사하크.
-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인간. 내 동족을 본떠 이따위 장난감을 만들어내다니.
“……!”
황성 천장을 통째로 들어내며 등장한 용의 모습에, 황제의 얼굴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내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평온한 얼굴에서.
“바로 이거야……!”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광기에 찬 웃음으로.
“이것이야말로 200년 전, 날 패배시켰던 네크로맨서의 군세! 그토록 목표로 쫓아왔던 아키몬드의 힘!”
“………!”
내 언데드를 보고 환희하는 황제의 모습.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그 모습에, 난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아키몬드 님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의지를 받들어, 대륙에 멸망을……!’
내 이름을 연거푸 외치며 죽음을 뿌리던 자들.
날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유린한 역겹기 짝이 없는 버러지들.
지금 황제가 자닌 저 눈은, 그들이 지녔던 눈과 놀랍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파앗-!
- 클라인?!
- 위험하네! 네크로맨서가 정면으로 뛰쳐나가다니…!
뒤에서 두 언데드의 만류가 들려왔지만,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다……!”
츠츠츠츠츠……!
이미 손에서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는 수정검.
마기를 다루는 자, 망자의 혼을 다루는 자에게는 그 어떤 검보다도 강한 위력을 내는 검이 그의 목을 향했다.
“아키몬드 교단도, 크리펠도, 그리고 황제 네놈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내 추종자들의 손에 모든 것을 빼앗긴 개리슨.
내 연구의 실험체가 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시엘.
성혈에 미친 여인에게 가문을 빼앗긴 라이아.
크리펠에서 가족을 잃고 고통받았던 스텔라.
그리고 날 이 자리에 서 있게 하기 위해서 200년이라는 시간동안 고통받은 라인란트까지.
“왜 내가 남긴 것들은, 전부 이딴 쓰레기들 밖에 없느냔 말이야-!”
내 사람들을 둘러싼 그 모든 불행의 씨앗이 나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모든 불행을 낳은 저 버러지들이 날 동경해왔다는 그 사실이,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이 검으로 저들이 아닌, 내 목을 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쐐애애애액-!
지척까지 다가온 황제의 몸.
그때까지도 황제는 내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듯, 광기에 찬 웃음으로 하늘 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희 같은 것들을 만들고자 싸운 게 아닌데……!”
악에 받힌 채 외치며, 황제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쩌적-!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내 검을 막아내며, 수정검의 검신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뭐……?”
점점 커져가는 수정검의 균열을 보며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아직 남아있던 언데드가 있었나?
하지만, 어떻게?
언데드는 수정검을 막을 수 없었을 텐데?
내 눈은 어째서 이걸 예지하지 못했지?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내 검을……?
가정, 가설, 추측.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던 그 순간.
파창-!
산산이 부서지는 수정검의 파편과 함께, 돌진하던 내 몸이 반대로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억……!”
낙하한 충격에 잠시 시야가 하얘졌다.
마력은 담기지 않는 단순한 견제기.
그렇지만 단지 그것 만으로도, 비장의 한 수라고 생각했던 수정검이 완전이 박살나 바닥에 흩뿌려졌다.
‘언데드가 아니야. 그렇다면 이건 대체……?’
우웅-!
거기에서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내 눈은 이어지는 다음 공격을 예측했다.
방향은 정면,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정순한 검기.
그리고 현 시대의 라인란트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마력파장까지.
“말도, 안 돼…….”
잊을 수 없는 검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눈이 예측한 이 검술은.
쿠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시야가 섬광에 뒤덮히고, 전투에 한창이던 알현실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아득한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았지만, 아직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
날 비웃는 황제의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전장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단 한번 내지른 검.
그것만으로 경로상에 있던 모든 언데드가 증발했다.
“설마…….”
정적에 휩싸인 제국 황제의 알현실.
아직 웃음을 지우지 않은 황제를 보며, 난 그제서야 머릿속에 있던 퍼즐이 하나둘씩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델과 계약했을 때.”
헬리안을 타도하고자, 라인란트 공작가의 영묘에 발을 들였던 그 순간.
“난 분명, 수많은 라인란트 가문의 선조들 중, 그의 무덤을 봤어.”
그 영묘 안에, 그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가문의 영지에도, 그의 유지를 받들고자 세워진 대장벽에서도, 그리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얼음성에서도….”
그의 시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했어야 할 그의 시신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200년 동안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네 아키몬드! 흐하하하하하-!”
봇물이 터지듯 뿜어져 나오는 황제의 웃음소리와 함께, 날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 클라인. 정신 차리게.
날 다그치며 앞을 막아선 레이븐의 목소리에서도 전과 같은 평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벅- 저벅-
화려한 검을 치켜든 채, 붉은 망토를 두르며 나타난 기사.
언데드에서 흔히 보이는 망자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살아있는 육체.
땡그랑-!
금빛으로 빛나는 검을 뽑은 채 황제의 앞을 막아선 그의 모습을 보며, 난 산산이 부서진 수정검의 손잡이를 떨어트렸다.
“베르, 켈……?”
200년 전, 타락한 내 심장에 검을 꽂아넣은 기사.
네크로맨서 아키몬드에게서 대륙을 구원한 영웅.
나와 같은 아픔을 지닌 채 날 막아섰고, 원한으로 점철된 내게 새로운 목표를 주었던 남자.
제 1대 라인란트 공작, 베르켈 라인란트.
200년 만에 돌아온 영웅은 옛날과 전혀 변함없는 모습을 한 채, 맞은편에 위치한 날 향해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