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203화 (203/209)

203. 제국의 몰락(4)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의 법칙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약자는 빼앗기고, 강자는 취한다.

그 단순한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추구했다.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은 채.

취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취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얻어가며 이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넌 무릎을 꿇은 채로 이곳에 있구나.”

한평생을 충성하던 왕국의 깃발이 땅에 떨어졌다.

증조부 때부터 섬겨왔던 왕가의 핏줄.

자신에게 기사 직위를 내린 왕의 목은 알현실 아래의 카펫에 나뒹굴었다.

왕의 목을 벤 것은 자신이었다.

“몰락한 귀족이었던 널 기사로 받아들인 왕, 유력가와의 약혼을 거절하고 사랑하는 널 선택한 여자, 그리고 네 등을 바라보며 정진하던 올곧은 젊은이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을 베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여인의 목을 졸라 부러뜨렸다.

끝까지 믿지 않으며, 정신을 장악당한 거라 외치는 후배들의 심장을 도려냈다.

그리고 그들의 수급을 황제의 발아래에 바친 채, 자신은 땅에 엎드려 있었다.

“우습기 짝이 없구나. 충성도, 가문의 맹약도, 사랑하는 이와의 약속마저도 전부 내버린 채, 원수의 발밑에 매달려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신랄한 평가가 이어졌다.

정복자의 양옆에 도열한 적국의 기사들마저도 그의 행동이 역겹기 그지없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제국 황제의 발아래 엎드린 기사 진 클라크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무릎을 꿇은 채 그 말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까지 네 비루한 목숨을 이어가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더 얘기할 가치가 없다 간언하는 기사를 물리며 황제가 물었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그의 목표.

그는 표정 없이 눈을 들어 황제를 향해 말했다.

“아직 보지 못한 경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흠.”

더 말해보라는 듯 왕좌에 앉은 황제가 몸을 낮추자, 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이어갔다.

“제 재능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왕국을 지키려 하다 죽는다면, 제가 가진 재능을 다 꽃피울 수 없습니다.”

“……!”

“그딴 이유 때문에, 기사가 제 주군을 베었단 말인가?!”

그 대답을 들은 기사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명예, 사랑, 충성.

기사의 덕목이라 전해지는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저버린 그의 존재 자체가 제국 기사들에게 있어선 모욕과도 같은 것이었다.

“단지 그것 하나 때문이더냐?”

“예.”

“네가 손에 쥔 모든 것을 바쳐서까지 살고자 하는 이유가, 단순히 더 강해지고 싶어서라고?”

“그렇습니다.”

한 줌 죄책감은커녕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한 마디.

“이런 작은 나라에서 썩히기에는, 제 재능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지껄이는 그 모습에, 남자를 내려다보던 황제의 얼굴색이 천천히 변해갔다.

가치 없는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눈에서.

동족을 만났다는 환희에 가득 찬 눈으로.

“폐하, 더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황제의 심경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적국의 기사인 진 클라크 한 사람뿐.

“제 한 몸을 지키고자 조국을 배신한 파렴치한 작자입니다. 기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야만인입니다!”

“당장에 저 무도한 자를 죽여버리겠습니다! 부디 허하여 주십시오!”

적이기 이전에 같은 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외치는 기사들의 모습에, 황제는 같잖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너희들의 뜻이 그렇다면 내 허락하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말을 마친 황제는 바닥에 엎드린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망국의 기사여, 일어서서 검을 잡아라.”

그 말에 진은 말없이 검을 잡은 채 일어났다.

이미 황제의 수족이 되었다는 듯, 절도있는 움직임이었다.

“폐하……?”

“뭘 그리 놀라느냐? 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는 건 기사 된 도리가 아니지 않으냐?”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자신을 지키고자 모여든 기사가 아닌, 진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죽여라.”

그 명령은 자신의 기사들에게 내린 명령이었을까, 아니면 맞은 편에 선 진에게 내리는 명령이었을까.

스걱-!

황제를 둘러싼 제국 기사들은, 그것을 헤아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피를 쏟으며 허물어졌다.

“뭐야, 어느새……!”

“폐하. 어, 째서?”

검격을 알아채지조차 못한 채 쓰러지는 기사들.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한 번 돌아본 황제는 허리춤에 찬 검을 들어 그에게로 가져갔다.

마치 이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황제의 검이 자신의 어깨에 닿는 것을 기다렸다.

“진 클라크. 자네는 오늘부터 나의 기사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양어깨에 한 번. 머리에 한 번.

간단한 의식을 마친 황제가 앞서 걸어가자 진은 곧바로 그의 등을 호위하며 자신의 왕궁을 걸어 나갔다.

마치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 오래전부터 그리 해왔다는 듯.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모습이었다.

***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데.”

황성 중심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중심부에서 다 흡수하지 못한 채 흘러나온 성혈과 희생자들의 시체가 엉겨 붙어 종양처럼 퍼지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돋아난 이빨과 촉수들은 밖에서 찾아온 이물질인 우리들을 경계하듯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이쯤 되면 이건 성이 아니라 거대한 생물체구만!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200년 전에 제가 하려던 일을 하려는 겁니다.”

“네가 하려던 일?”

퍼석-!

날아드는 촉수를 검으로 쳐낸 이안이 되묻자, 난 살덩이로 뒤덮이는 황성을 보며 말했다.

“얼음성은 중추에 위치한 ‘신의 심장’을 동력원으로 사용해서 언데드를 뿜어내는 요새. 이 성 또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하늘 위에 떠오른 이 황성은 얼음성을 본떠서 만들어낸 모조품.

“같은 구조를 지닌 요새를 만들었다면, 황제는 분명 그 뒤에 숨겨진 진짜 용도를 알아챘을 테고요.”

“진짜 용도요?”

스텔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성의 진짜 역할은 중추에 위치한 ‘신의 심장’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 언데드를 소환하는 건 부수적인 기능에 불과합니다.”

수백만 북부인들을 언데드로 되살려 진군시킨 이유는, 북부인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그들의 복수를, 그들 스스로 수행하겠다는 의지.

200년 전의 난 원한에 미친 그들의 광기를 받아들여 얼음성을 변질시켰다.

윈터폴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얼음성은 네크로맨서 아키몬드의 요새가 되어, 끊임없이 언데드를 뿜어내는 살인공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얼음성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목적은, 윈터폴 국토를 감싸는 거대한 방어막 생성기.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중추에 위치한 신의 심장이 폭주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누름돌이었다.

“그럼, 200년 전에 네가 하려던 일은 뭐였는데?”

“발악이었죠. 베르켈의 손에 죽기 전에, 제가 마지막으로 하려 했던 최후의 수단.”

설명을 들은 이안은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고,

그렇게 말한 난 표정을 굳힌 채 천천히 말했다.

“신의 심장을 과부하시킨 뒤, 얼음성을 붕괴시켜서 폭주하게 만드는 겁니다.”

“폭주…. 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그렇게 묻는 두 사람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대폭발이죠. 심장이 직접 보호하는 지역을 제외한 모든 대륙은 지반 째 뒤집히고, 그곳에 사는 생명체들을 남김없이 절멸시키는.”

“…….”

“……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미친놈이었구나?”

물론, 황제가 거기까지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불로불사의 몸이 되어, 이 대륙의 통치자로서 영원히 군림하는 것.

백성 없는 통치자는 성립되지 않는 법이니, 거대한 힘을 내보여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게 오히려 좋은 방법이겠지.

‘그리고 황성의 상황을 보아하니, 과부하까지 그리 멀지 않았어.’

생각한 것보다 더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을 할 즈음.

키이잉-!

양쪽 눈에 화끈한 감각이 느껴지는 동시에 전방에서 날아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젠장, 레이븐!”

아무런 의문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 방어를 올리는 데스나이트.

그리고 그와 거의 같은 타이밍에, 멀리서 날라온 거격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쿠콰아앙-!

- 말이 안 나오는군. 무슨 마력이……!

단 한 번의 공격을 흘려냈을 뿐인데, 최상급 데스나이트인 레이븐의 팔이 손상되었다.

델라인이 사용하는 폭검에 필적하는 위력.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후퇴는 없다.

공격이 날아온 곳으로 지체 없이 몸을 던지자 어두웠던 풍경이 한순간에 밝아지고,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난장판이 된 외부와는 다른 세상인 듯, 정갈하게 정리된 풍경.

그리고 그 웅장한 공동 한 가운데에, 방금 전 검격을 날린 장본인이 서 있었다.

“진, 클라크.”

황제의 옆을 지켜온 제국 최강의 기사.

검은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감싼 거한의 몸에선 저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 끼야아아아--!

그와 동시에 공중에서 들려온 귀곡성.

영체 상태의 밴시가 보낸 신호에 난 스텔라를 향해 눈짓했다.

“해야 할 일은 알죠?”

내 뒤에 선 스텔라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알았다는 듯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단검을 쥐었다.

“황성의 중심이 되는 핵. 그걸 찾아서 박살 내면 된다는 거죠?”

스텔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혈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혼을 정제하여, 마기로 빚어낸 산물.

어설프게 마력을 담아서 공격한들, 제대로 된 손상을 줄 수는 없다.

유일한 방법은 소멸의 성질을 가진 신성력 뿐.

거기에 이 복잡한 황성을 최단 시간 내로 돌파하기 위해선, 속도전에 특화된 스텔라의 기동성이 반드시 필요했다.

“경계가 삼엄할 겁니다. 교전은 최대한 피하고, 목표에만 집중할 것. 잘 알겠죠?”

“알아서 할 테니까, 공자님은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나 해요.”

그렇게 말하며 이리저리 몸을 푼 스텔라는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속신관 자리도 맡아놨는데, 죽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슬쩍 미소지은 스텔라가 그렇게 말한 바로 다음 순간.

투웅-!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스텔라의 신형이 사라졌다.

클레어의 눈이 아니었다면 언제 사라졌는지도 포착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

“그 사이 중심핵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린 것인가.”

그것을 본진 역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맞은 편에서 검을 들어 올린 남자 덕분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안 단장.”

“쓸데없이 친한 척 말게 진.”

이안 라인란트.

지난번에 다 끝내지 못한 승부를 내겠다는 듯, 검을 뽑는 그의 얼굴에선 평소에 자주 보이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자네한테 단장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으니.”

경멸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검을 뽑아 든 채, 이안과 대치하고 있을 뿐.

“먼저 가라 조카놈아.”

“…….”

내 쪽으로 눈을 흘기며 이안이 말했다.

“시간 없다며. 내 말 틀리냐?”

이안과 함께 합류하여 싸울 경우의 승산, 소요되는 시간, 그사이 벌어질 일들을 차례대로 계산했다.

결과는 명확하다.

이곳에서 발이 묶인 순간, 동맹군과 남겨둔 이들은 더 버티지 못한 채 작전 실패.

여기까지 도달한 지금, 내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죽지 마십쇼.”

“헹!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짧은 문답을 나눈 뒤 곧바로 몸을 날린 순간.

카앙-!

등 뒤에서 이안과 진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영웅 노릇도 할 짓이 못되지. 그렇지 않나?

레이븐의 말에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내게 맡기고, 먼저 가라.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 말과 함께 남겨둔 사람이 벌써 네 명째다.

“넌 이런 기분으로 날 찾아온 것이었구나. 베르켈.”

목적을 위해.

대륙의 구원을 위해 자기 사람을 사지에 내버리고 가야 하는 중압감.

눈앞을 가로막은 적에 대한 적대감.

그것을 전부 짊어졌음에도 그는 날 살렸고, 이 자리에 오도록 인도했다.

고오오오…….

코앞까지 다가온 황성 알현실 정문.

이 문 너머에, 황제가 있다.

“그렇다면 난, 그 책임을 다해야겠지.”

200년의 시간을 넘어, 윈터폴을 멸망시킨 장본인을 처단하기 위해.

북부를 모독하고 정복하려는 망집을 저지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지식으로 산 사람을 가지고 논 도둑을 잡아 죽이기 위해.

쿠르르르르-!

난 문을 열고 황제의 알현실을 향해 걸어갔다.

길고 길었던 내 여정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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