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제국의 몰락(3)
쿠콰앙-!
- 키이이이이-!
“크워억! 크워어어어-!”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스켈레톤과 썩은 살점을 흩날리는 괴물들이 충돌했다.
“1진 붕괴! 2진에서 틀어막혔다!”
“말이 안 나오는군. 언데드였기에 망정이지……!”
한 번의 충돌로 5천 구의 언데드가 말 그대로 갈려 나갔다.
방금 흩뿌려진 것이 망자의 영체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그간의 실전으로 단련된 지휘관들은 후방에 위치한 궁병대를 능숙하게 지휘했다.
“멈춰있는 전열은 언데드들이 맡을 테니, 우린 후방을 친다! 발사!”
- 석궁병, 사격 개시.
푸슈슈슈슉-!
스켈레톤 석궁병의 쿼렐이 달려드는 괴물들을 꿰뚫었다.
이 시대에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북부식 대형 석궁.
육중한 철제 쐐기가 괴물들의 진입을 차단한 사이, 폴와이번의 장궁병들이 쏜 불화살이 뒤엉킨 괴물들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파츳-!
이윽고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후열에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이 수인을 맺었다.
- 점화
화염마법을 작동시키는 것은 아일라시스에서 충원된 마법사들.
화살촉에 각인된 수천 개의 룬이 서로 공명하고, 연결고리에서 곧바로 푸른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화륵-!
“키에에에엑?!”
“크어어어--!”
순식간에 퍼진 불이 후열에서 돌진하던 괴물들을 뒤덮었다.
재생을 시작한 상처 부위에 불이 붙자,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괴불들의 진형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좋아! 기사단 돌입 준비……!”
- 아니, 아직 아니다.
불화살과 점화 마법을 이용한 화공이 효과를 보자, 지휘관이 곧바로 돌격을 명령하려 했다.
그렇지만 손을 들어 그것을 막는 스산한 목소리에 지휘관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아직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의 지시를 제지한 것은 검은 갑옷을 갖춰 입은 데스나이트.
자신과 나란히 선 언데드 기사의 모습에 지휘관이 미간을 좁혔다.
- 괴물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아라 필멸자.
그렇지만 데스나이트는 마치 그를 이해한다는 듯, 별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전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 어설프긴 하나 진형을 갖췄고, 병과도 분리되어있지. 지성없는 괴물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통솔된 군대처럼 행동하고 있어.
자신을 클라인의 수많은 종 중 하나라 칭한 데스나이트.
항상 적으로만 생각해왔던 언데드가 거리낌 없이 말을 거는 상황은 꺼림칙했지만, 이 자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즉, 저 괴물들을 통제하는 자가 따로 있다고?”
- 바로 그거지.
동맹군 본부에서 전해져온 정보.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반신반의했던 그들이었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들은 이미 괴물로 변이했고, 제국의 마법사들은 보다시피 저 모양 저 꼴이니.”
하늘 위에 부유하고 있는 구체.
사람의 얼굴이 박혀있는 그곳에서는 비명소리와 함께, 온갖 속성이 뒤섞인 광선이 발사되고 있었다.
거기에 그 모든 괴물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지배의 각인과 기괴한 기운.
“황제 폐하를 위하여…. 황제 폐하를 위하여…. 황제 폐하를 위하여…….”
그것을 확인한 지휘관은 곧바로 이들을 통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제국의 네크로맨서들인가.”
박해받던 자신들을 구원해준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광신도.
그렇지만 황제는 그런 그들조차도 불신하여, 성혈과 낙인으로 그들의 정신을 옭아맸다.
의지를 잃은 채, 괴수 군단을 지휘하는 일종의 정보처리장치로 전락한 인간들.
그것이 제국의, 황제의 네크로맨서들이었다.
- 방금 공격으로 소모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터. 곧 다른 방법을 시도할 거다.
“다른 방법이라니?”
해골의 한마디를 들은 지휘관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그 순간.
쿠콰아아아앙-!
스켈레톤 한 무리가 통째로 하늘로 솟아오르며, 사방에 피와 오물을 뿜어대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워어어어어억---!”
뿔과 갑각으로 뒤덮인 6미터 높이의 거대한 괴수.
순식간에 스켈레톤의 방어진을 돌파한 괴물은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후방에 위치한 궁병대를 향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저, 저게 대체 뭐야?!”
“마법사들은 전원 방어마법 전개! 기사단은 밀집대형으로 집결한다! 궁병대가 물러설 때까지 몸으로라도 막아야……!”
이변을 알아챈 지휘관들이 황급히 대응하던 것도 잠시.
쿠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두어 걸음 밀려난 괴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신을 제지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 21번 섀도우 골렘, 콜로서스. 정상 가동 중.
영체로 이뤄진 검은 연기와 주요 부위에 장착된 레어메탈제 장갑판.
클라인의 골렘 타이탄을 기초로 만들어낸, 수십 구의 골렘 중 하나였다.
- 지금이다, 필멸자들이여!
회심의 한 수를 막아낸 데스나이트의 외침과 동시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지휘관들이 지휘봉을 치켜들었다.
“적 진형을 돌파해서 저 네크로맨서를 처단한다! 기사단 돌격!”
“으아아아아-!”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말에 오른 기사들이 박차를 가했다.
그에 발맞춰 전진하는 스켈레톤 군단과 하늘 위로 수놓는 마법, 그리고 화살비.
지금 그들이 싸우고 있는 이 장소는 그야말로….
***
- 그야말로, 지옥 같은 광경이군 그래.
하늘 위에서 정장을 관조하던 앙헬이 한 말이었다.
한쪽은 하늘 위에 떠 있는 황궁에서 흐르는 피로 인하여 괴물로 변이한 제국인들.
그리고 반대쪽은 북쪽 끝 얼음성에 의해 언데드가 되어 일어난 북부인들.
“200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야.”
황궁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괴물들과 그것을 틀어막는 동맹군의 군대.
마치 그날의 광경을 뒤집어놓은 듯한 모습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설마, 베르켈 녀석이 하던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시시각각 가까워져 가는 황성과 200년 전의 얼음성이 겹쳐 보였다.
대륙 연합 기사단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총공세.
다음이 없다는 듯 매섭게 몰아치는 그들에게 맞서고자, 당시의 난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 사이, 베르켈과 그 기사들로 이뤄진 원정대가 얼음성 중심부로 돌입.
군단의 중심 역할을 하는 날 죽이면서, 200년 전에 벌어진 아키몬드 사변은 끝을 맺었지.
“클라인-!”
상념에 잠겨있을 틈도 없이, 사하크의 몸 앞쪽에 자리 잡은 스텔라가 날 향해 외쳤다.
황성이 지척에 다다랐다는 신호.
그 말이 들려오는 동시에, 황성 위층에서 수십 마리의 언데드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언데드라니, 별걸 다 보는구만!”
“저거 뭐 저렇게 많아요? 우리 설마 도착하기도 전에 끝나는거에요?!”
이안과 스텔라의 목소리에 답하려는 듯,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요?”
검은 코트와 마법용품으로 무장한 시엘.
맞은편에서 쇄도하는 수많은 비행체들을 향해 손을 뻗자, 그녀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쇠구슬이 굉음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기긱-!
비명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구슬들의 형태가 점차 변질되었다.
까득, 까드드득-!
뒤틀리고 비틀리며, 나선형의 철침으로 형태를 바꾼 쇠구슬.
얇디얇은 화살로 바뀐 것을 확인한 순간, 시엘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전방을 바라보며 활시위를 놓는 시늉을 했다.
“중력시, 전탄 발사.”
투웅-!
시엘의 한 마디와 함께 튀어 나간 수십 발의 철침이 날아드는 괴물들을 꿰뚫었다.
퍼퍼퍼퍽-!
아니, 꿰뚫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극한으로 압축시킨 금속 화살이 몸체에 닿는 순간, 날아드는 괴물들의 몸체가 말 그대로 터져나갔으니까.
“우, 우와아…….”
시야를 뒤덮은 비행체들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스텔라가 벙찐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지만 시엘이 발사한 중력시의 활약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쿠콰콰콰쾅-!
괴물들의 몸을 꿰뚫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직선으로 쇄도한 중력시가 성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쿠르르릉-!
시엘의 중력마법의 특징은 마법적인 방어수단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순수한 물리력.
방어마법와 속성강화로 빈틈없이 강화된 황성의 성벽은, 이렇다할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었다,
쿵-!
시엘이 뚫어놓은 구멍을 파고든 사하크가 그대로 황성 바닥에 착지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도시라 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제국 황성.
그 위용에 감탄할 새도 없이, 황성의 지면이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문지기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네요.”
그 말과 함께 앞으로 나선 라이아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들고 있는 메이스를 올려쳤다.
쿠콰아아아앙-!
풍압 만으로도 성벽에 금이 갈 정도의 완력.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가 걷히자, 그곳에는 황제가 보낸 수많은 괴수들이 이빨을 번득이고 있었다.
“크어어어어…….”
그리고 그 중심에 위치한 것은, 5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몸체를 지닌 괴수.
레어메탈로 이뤄진 갑주를 온몸에 두른 저것은, 내가 만들어낸 나이트 골렘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 크하…! 크하하하하……!”
치이이익-!
라이아의 일격으로 터져나간 팔을 재생시킨 뒤, 거대한 망치를 다시금 움켜잡는 거인.
“설마…. 설마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시엘……!”
그 뒤에서 나타난 그림자와 목소리에, 시엘의 얼굴에 띈 웃음이 짙어졌다.
“분명 흔적도 없이 갈아서 다져버렸을 텐데, 용케 그 꼴로 살아있었네요?”
이빨과 촉수로 뒤덮인 얼굴에, 양손에 떠오른 화염 마법.
완전히 뒤틀린 혐오스러운 모습의 괴물을 보며, 시엘은 즐거운 듯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엘프란 아일라시스.
시엘에 의해 완전히 짓이겨진 그는, 황제의 괴물로 전락한 채 다시금 이 자리에 나타났다.
“이걸 다 처리하고 가기엔 좀…. 번거롭겠는데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괴수들을 보며 라이아가 그렇게 말한 순간.
으직-!
중력마법으로 괴물들을 짓누른 시엘이, 옆에 선 라이아에게 눈짓했다.
“…쯧, 어쩔 수 없네.”
신호를 알아차린 라이아가 메이스를 들어, 한쪽 벽을 내려친 순간.
쿠콰아아앙-!
수십 겹의 벽면이 한 번에 무너져내리며, 황성 중심부로 통하는 일직선 루트가 만들어졌다.
“먼저 가요. 여기서 지체될수록 우리가 불리하잖아요.”
메이스와 방패를 치켜든 라이아가 그렇게 말하자, 수십 개의 돌을 압축시키며 나란히 선 시엘이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클라인.”
“…….”
“결혼식, 돌아오면 성대하게 치르자고요?”
…우와, 미치겠네.
한순간이었지만, 저 괴수 군단보다도 눈앞에 있는 시엘이 더 무서워 보였다.
“고생길이 훤~하구나, 조카놈아.”
그렇게 말하며 앞서간 이안을 따라서, 난 라이아가 만들어준 루트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거대한 망치를 집어 드는 나이트 골렘을 보며 라이아가 말하자, 시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등을 맞댔다.
“혹시 죽을 것 같으면 먼저 말하세요, 라이야 양? 괴물이 되기 전에 제가 죽여드릴테니까.”
“웃기고 자빠졌네. 누가 너 같은 미친년한테 순순히 죽어준대?”
클라인이 사라지자마자, 가식을 벗어던진 두 여인이 악담을 주고받는 사이, 수천수만의 괴수 군단이 두 사람을 향해 들이닥쳤다.
괴물의 두개골을 짓이기며 빛나는 폴와이번의 메이스와 하늘을 수놓는 아일라시스의 중력 마법.
폭음과 함께, 제국 황성이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