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제국의 몰락(1)
쿵-.
금실과 붉은 비단으로 이뤄진 바닥.
새하얀 기둥에 조각된 제국의 상징과 그 장엄한 공단을 뒤덮고 있는 제국의 깃발.
황태자의 몸을 뒤집어쓴 황제는 아무도 없이 텅 빈 알현실에서, 홀로 옥좌에 앉아 그 풍경을 둘러보고 있었다.
“후우…….”
사실, 평소 황성의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이것은 굉장히 어색한 광경이었다.
제국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의 중심부.
황제의 정무가 거행되는 이곳은 본래 수많은 경비병과 대신, 관료들로 꽉 차 있어야 했으니까.
“진.”
“여기 있습니다. 폐하.”
나지막한 황제의 부름에 답한 것은 검은 갑옷을 갖춰 입은 거구의 기사였다.
진 클라크.
선황제의 곁을 지켜오던 노기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의 앞에 부복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제3 집단군과 황도 수비군은 어찌 되었는가. 명령대로 궐 밖의 역도들을 진압하고 있는 것인가?”
진은 그 말에 굳이 소리 내어 답하지 않았다.
거사를 앞둔 주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배려였다.
“세 치 혀에 놀아났군.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
진의 뜻을 알아챈 황제가 한탄하듯 한숨 쉬었다.
황궁을 지키는 기사들이 자취를 감추고, 지하에 잠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 지금.
한낱 인간에 불과한 기사 나부랭이들이 자신에게 계속 충성할 것이라고는 황제 본인조차도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제국의 법은 지엄해야 하고, 배신의 대가는 가혹해야 하는 법.
대업을 마친다면, 황제는 그 어리석은 자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전선의 상황은 어떠한가?”
“북부 전구뿐만 아니라 서부, 동부에서도 전갈이 왔습니다. 사실상 완전히 포위된 상황입니다.”
옥좌 한편에 구겨져 있는 서신의 내용은 믿기 힘든 것이었다.
북부 대공세는 완전히 실패.
라인란트를 노리던 원정군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한 채 전멸했고, 3대 공작의 영지에서 동시에 병력들이 출발했다는 소식.
그리고 제국은 지금 200년 동안 자신을 지켜온 변경의 맹주, 제국 3대 공작의 사병들에 의해 포위되어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정보부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심상치 않은 소식?”
본래 반란을 진압하고 있어야 할 진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그것은 아마,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겠지.
“태양 십자군과 교국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얼음성이, 깨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진의 한 마디에, 팔걸이를 쥔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200년 전의 악몽이, 다시금 재현되는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때의 기억에 사고가 닿은 그 순간.
“하, 하하, 하하하!”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황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실험장에 처박힌 갓난아이 하나를 놓친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줄이야! 흐하하하하하!”
200년의 세월 동안 철저하게 준비해 온 계획이었다.
약점을 파고들고, 그들에게 내재된 욕망을 자극하여 분열시키기까지.
행여나 어긋날까 차근차근, 공들여 준비해온 모든 것들이, 설마 단 한 명의 존재 때문에 이렇게까지 일그러지다니!
뿌드득-!
“아키몬드, 네놈이 죽어서도 감히……!”
증오스러운 그 이름을 내뱉을 때마다 황제의 떨림은 점점 더 늘어났다.
분노에 의한 떨림인지, 아니면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 공포인지.
“후우-!”
그 자신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황제는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그렇지만 지금은 200년 전과는 달라. 칼자루는 내 손에 있다.’
황성 중앙에 떠오른 그것.
그것을 깨우기만 한다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반격을 준비하는 것.’
그렇게 생각한 황제는 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위기사들은 어떻게 되었지?”
제국이 아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
수십 년간 그가 손수 관리해 온 그들을 언급하자, 진은 곧바로 준비해둔 대답을 내뱉었다.
“‘공정’이 완료된 기사들은 곧바로 각 지역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현지 병력과 합류하는 즉시 동화(同化)될 것입니다.”
공정, 동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은 알현실에 서 있는 두 사람뿐일 터.
쿵- 쿵-
그렇게 향후 대책을 지시하는 와중에도, 황궁 바깥에서 들려오는 울림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콰아아앙-!
마력을 담은 검이 황궁의 문을 후려치는 소리.
몇 번 더 반복되던 그 소리가 멎자 황제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가 바라본 알현실 입구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었구나, 트레인.”
***
쿵- 쿵-
황궁을 울리는 진동은 마치 생명체의 심장 소리와도 같았다.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이조차도 그의 간악한 계획의 일부일지.
차마 그것은 짐작하지 못한 채, 트레인 황자는 거대한 철문 너머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밀레드 형님.”
“오랜만에 동생의 얼굴을 보니 반갑구나, 트레인. 헌데, 네가 황성엔 어쩐 일이지?”
희미한 웃음을 띤 채 황좌에 앉아, 자신과 기사들을 굽어보고 있는 제국의 절대자.
‘아니, 아니야.’
자신의 형이자 경쟁자였던 황태자, 밀레드.
그렇지만, 그가 기억하는 황태자 밀레드는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으, 우와악?! 트레인! 버, 벌레! 벌레가!’
‘아오 이 쪼다 같은 형님이 진짜, 제국 황자가 벌레한테 쫄면 어쩌자는 거야?!’
심약하고 천성이 선하여, 궁 안으로 들어온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던 유약한 황자.
‘우, 우와아…. 이걸 다 외운 거야? 난 아직 반쪽 밖에 못 읽었는데…….’
‘계속 그 상태면 이따가 아바마마한테 혼날걸? 자, 빨리 베껴.’
서출이었던 자신을 업신여기는 황족들 사이에서, 정적인 자신을 보란 듯이 끼고 다니던 얼빠진 형.
그는 황금으로 이뤄진 감옥에서 찾아낸 유일한 자랑이요, 유일한 희망이었다.
쿵-
그런 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을 때.
트레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지핀 불을 거두었다.
불구덩이에 집어 던져진 자신의 작은 친구.
식사 안에 당연하다는 듯 들어있던 극독과 저주.
그것을 피하지 못한 채 독살당한 어머니.
그 모든 복수에 대한 열망을 져버리는 대신에, 다른 목표를 품게 된 것이다.
‘거, 걱정 마 트레인! 이 형님이 황위에 오르게 된다면, 이런 답답한 생활도 끝이야!’
원한과 증오로 살아온 자신이 왕이 된다 한들, 똑같은 증오와 원한을 남길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형을 황제로 만들고, 자신은 그의 그림자가 되자.
순해 빠진 형님은 얼굴 붉히는 일에는 젬병이니까,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 거야.
비바람을 막아주는 황제의 우산.
내 형제의 그늘막.
그렇게 되고자 결심한 순간, 트레인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호화로운 황궁을 나왔다.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대신에 전장으로, 전쟁터로 직접 나가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제국의 적을 흔적도 없이 부숴버리기 위해.
상냥한 그의 형이 만들 새로운 제국.
그 따뜻한 나라에, 더러운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 앞에 선 네놈은, 밀레드 형님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제 와서는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였다.
“글쎄,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실소를 흘린 트레인의 눈빛은 점점 더 사나워졌다.
“반란을 모의하며, 전해 들은 것이 있었다.”
“…….”
“그리고 이 알현실에 도달하는 와중, 그 증거들을 똑똑히 보고 왔지.”
황궁 중앙.
정원의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힘과 그곳에 힘을 공급하고 있는 수많은 고기단지.
그곳에서 본 절망을 떠올리며, 트레인 황자는 이를 악문 채 황좌에 앉은 황제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밀레드 형님이 아니다.”
“…….”
“200년 전부터 그 황좌에 앉아있던 존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어.”
자신의 형은, 저토록 차가운 눈으로 사람을 굽어보지 않는다.
자신의 희망은, 무고한 사람들을 지하에 가둬 피 주머니로 만들지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자 한 황제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을 이성 없는 괴물로 전락시키는 추악한 자가 아니란 말이다!
“제국 초대 황제, 멜디르! 제 핏줄의 살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이여!”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트레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제국 황가의 마지막 생존자. 그 저주받은 핏줄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여 없애겠다!”
그리고 그런 트레인 황자의 외침과 동시에.
스릉-!
서슬 퍼런 금속음을 두른 채, 그 앞을 막아서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무례한 발언은 삼가십시오. 트레인 황자 전하.”
기계적으로 예를 갖춘 채, 감정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기사.
“황제 폐하의 어전입니다.”
“진, 클라크.”
제국 최강의 기사임을 뜻하는 검은 갑옷과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검.
검은 투구에 가려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붉은 빛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아……. 난 또 무슨 거창한 야망이라도 가진 놈인 줄 알았더니.”
“뭐라고?”
진을 향해 눈을 흘긴 밀레드. 아니, 멜디르 황제가 조소했다.
“결국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은 황위를 위한 욕망이 아닌, 죽은 네 형에 대한 앙갚음이냐?”
정확히는 트레인 황자가 아닌, 그를 호위하는 제국 기사들의 면면을 보며 떠올린 비웃음이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얕아빠진 정의감만 앞세운 버러지들뿐이로구나.”
“……!”
“뭐, 라고……!”
자신들을 향한 모욕에 몸을 떨었지만, 섣불리 나서는 이는 없었다.
“분노하는 건 그대들 마음대로다만, 감히 검을 뽑을 수 있겠는가?”
웅- 웅-
시퍼렇게 검명을 울리는 진의 기백.
마력을 지닌 자라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힘이었으니까.
“늙고 노쇠했다 한들, 이 자는 제국의 수호신이다. 정 잡고 싶다면, 적어도 기사 학살자 정도는 데려왔어야 했을 텐데.”
이명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한 듯, 황제의 미간이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놀라운 기백이올시다, 진 클라크. 못 본 사이 노쇠해지기는커녕, 더욱 강해졌군.”
“……?”
크레인 황자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투구를 뒤집어쓴 기사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두 자루의 곡검을 손에 쥔 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노인.
그의 움직임에 맞춰 휘날리는 도복은 제국의 것이 아닌, 머나먼 남부 연방의 무사들이 입는 복장이었다.
“화이룬, 엘, 카이프.”
“기억해주니 영광이군. 20년 전 갤러만 정글에서 치고받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진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경계를 푼 채 벌레들을 잡으려는 무심한 눈과는 다른, 강자와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자세였다.
“남부 연방군의 총사령관이, 십 년 동안 대립하던 트레인 황자의 반역에 가담한 것인가?”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지만 뭐, 어쩌겠나.”
척-
서서히 푸른 빛을 발하는 두 자루의 곡검.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분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네놈들에게 학살당한 수많은 남부인들이, 복수를 원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제국의 손에 형제를 잃은 동생.
제국의 손에 나라를 잃은 검사.
적으로서 수많은 세월 동안 칼을 맞대던 트레인과 화이룬은, 복수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동지가 될 수 있었다.
“폐하. 만에 하나가 있습니다. 중앙으로 피하시는 것이….”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진.”
화이룬과 대치하는 사이, 트레인과 그 기사들은 황제를 노릴 터.
그것을 알고 있는 진의 당부에도 황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새로 얻은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기회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킨 황제는, 황좌 한 편에 기대놓은 자신의 검을 쥐었다.
제국의 황권을 상징하는 황금검.
피와 비명, 저주로 가득 찬 이 황성에서도, 오직 그 검만큼은 본래의 광채를 간직한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 오거라! 어리석은 짐의 핏줄이여!”
쿠우우-!
원형으로 퍼져나간 파동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기사들을 필두로 한 트레인 황자가 달려나갔다.
“이 대륙의 진정한 수호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