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출정
“왔느냐.”
회의실에 들어서자,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폴와이번 기사들을 지휘하는 라이아와 고든.
아일라시스의 대표로 참전한 시엘.
후계자인 델라인과 오랜만에 만나는 내 호위기사 듄켈, 그리고 장벽에 있던 코락스까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난 덤덤히 걸어가 원탁 한편에 자리했다.
“우선 한 가지, 제국에서 소식이 있소.”
희미하게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대신한 하인켈은 곧 표정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트레인 황자와 그 일파가 행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이오.”
“뭐라……?”
“전하, 그게 사실입니까?”
부관들의 되물음에 하인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인 화자는 황성 지하에서 벌어지던 인체실험을 폭로했고, 그에 발맞춰 그 측근들이 움직였소. 때문에 지금 황성은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오.”
그렇게 말하며 하인켈은 서신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가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의 문구가 써있는 것을 보자, 지휘관들 몇몇이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 우리 측과 보조를 맞추기로 협의가 돼있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성급하게…….”
트레인 황자.
제국 왕위 계승권 2위를 차지하고 있던 황자이자, 황가의 피에 얽힌 운명을 저주하던 남자.
“성급한 게 아니라,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난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를 냈다.
“황도를 벗어났다 한들 그는 제국의 황자. 정보전은 우리보다 한 박자 빠르겠죠.”
“당장 행동을 시작해야만 하는 정보…. 그런 것을 먼저 알았다면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군요.”
버크만의 첨언에 부관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폴와이번, 라인란트, 아일라시스.
제국의 세 공작이 연합하여 제국에 반기를 든 지금, 이 내전의 향방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일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겠지.
“트레인 황자가 단독으로 움직일 생각을 한 것이라면, 예사로운 일은 아닐 겁니다. 예를 들면….”
“‘황제가 황성을 비웠다’라는 정보라던지 말이죠.”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버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일 뿐이지만, 만일 그런 정보였다면…. 확실히 지금 상황이 설명이 됩니다.”
“황성을 비우다니, 황제에게 그럴 징후가 보였다는 말인가?”
“보였지.”
하인켈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천막 밖에서 이를 엿듣고 있던 이안이었다.
“…제국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부 연합과 전쟁 중이었다. 거기에 우리가 이 난리를 일으키면서, 제국은 북부에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게 되었지.”
원탁에 놓인 대륙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정글지대로 가로막힌 남부와 설원으로 뒤덮인 북부. 제아무리 제국이라 한들,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는 건 미친 짓이야.”
제국 기사단에 몸담으며 제국군의 전술에 익숙한 이안의 말에, 지휘관들의 귀가 몰렸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이들의 면면을 둘러본 이안은 지도에 놓인 기물들을 움직여 전황 상황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우선 징집병 위주의 병력으로 소모전을 걸어 북부를 압박, 움직임을 막는다. 그리고 그다음엔?”
“그 시간 동안 각 지역에 배치시킨 정예병을 결집시켜, 남부 전선을 한 번에 장악하는 거군요.”
이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챈 버크만이 그렇게 말하며 기물을 옮겼다.
“그렇게 된다면 최종적으로는 남부에 배치했던 병력을 곧바로 반전, 북부 공략에 집중시킬 수 있겠군요.”
하인켈의 정리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원정군 지휘관의 태반은 트레인 황자의 사람이었고, 지금에 와선 대부분이 숙청당했지. 원정군을 통제하려면, 황제가 직접 병력을 지휘할 수밖엔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트레인 황자는, 황제가 황도를 비우는 그 순간 행동을 개시했다.”
그렇게 말한 버크만의 말에 지휘관 몇몇이 말을 보탰다.
“전하. 그렇다면 이건, 트레인 황자가 만들어낸 기회입니다.”
“맞습니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남부 원정군이 회군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제국의 중심지에서 내전이 벌어진 이상, 라인란트를 위협하는 제국군에게도 혼란이 일 터.
어느 쪽이 되건, 지금이 반격에 나설 적기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해.’
멜디르 황제는 2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온 능구렁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후손들의 몸을 취하며 제국을 키운 불멸의 군주.
그런 자가, 트레인 황자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해서 황도를 순순히 내어준다고?
그렇게 내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찰나.
“저, 전하……!”
회의실 천막을 박차고,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시선을 옮기자, 피투성이가 된 기사 한 명이 그곳에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갈기갈기 찢어진 갑옷.
그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을 본 기사들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붉은 칼날 기사단…! 트레인 황자의 호위기사입니다!”
“끄으-!”
힘이 풀린 듯 무릎으로 주저앉은 기사는 떨리는 손을 들어 한 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트, 트레인 전하께서 보내는 소식입니다. 부디, 부디 전하를……!”
털썩!
그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기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치료를 위해 황급히 치유사들이 다가갔지만, 그것도 잠시.
“이미 숨이 끊어졌습니다.”
“말도 안 돼, 이 출혈량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가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치유사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기사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트레인 황자에게 빚을 졌군.”
그렇게 말한 하인켈은 다 읽은 서신을 원탁에 내려놓았다.
“남부 정벌에 나섰던 원정군이 회군을 시작해 황도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일세”
“남부 원정군이, 말입니까?”
그렇게 되물은 것은 기사의 시신이 나간 곳을 계속해서 바라보던 델라인이었다.
“전쟁 중인 병력을 황도로 돌린다니, 그렇다면…!”
“아무래도 황제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군요.”
델라인의 말을 받은 것은 폴와이번 공작, 라이아.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 하인켈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부 연합은 이미…. 괴멸되었다.”
“……!”
“이미 보름 전, 황제가 직접 연방의 중심지를 괴멸시키고 연방 의원들을 참살했다는 소식이다.”
하인켈이 내려놓은 서신을 읽은 버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황도에 있을 트레인 황자의 호위기사가, 저 상태로 이쪽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래.”
델라인의 물음에 하인켈은 원탁 중간에 놓여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 정중앙에 위치한 제국의 황도.
그곳을 노려본 채로, 하인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는 이미, 황도에 도착해 있다는 뜻이 되겠군.”
“……!”
“………!”
황자의 소식이 이곳까지 전달되는 사이,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마치 자신은 이미 우리 머리 위에 있다는 듯한 움직임.
그가 대륙을 지배해 온 200년의 세월은, 그 시간에 걸맞는 통찰과 결단력, 그리고 행동력을 선사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우리들 뿐이라는 거군요.”
“지금까지의 수비전으로도 한계에 달했는데, 여기에 남부 원정군까지 합세한다면…….”
짙어지는 패색에 회의장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려던 찰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선 난, 마기를 내뿜어 원탁 위에 기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
“클라인 공자님. 이게 갑자기 무슨……?”
북부를 완전히 뒤덮어, 지도의 3할을 뒤덮은 수백 개의 기물.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듯, 하인켈은 눈을 크게 뜬 채 날 바라보았다.
“클라인, 이건 설마……?”
“예, 맞습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검은 군세.
지도에 놓인 기물을 바라보며,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제국의 패배였습니다.”
***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겠지만, 전쟁을 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병법을 연구하는 이들, 병사들을 다루는 이들의 모든 방법론은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법이다.
“클라인. 이걸…. 작전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거야?”
그렇기에 내 말을 들은 델라인과 참모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 국경 요새와 뒤에 있는 요새들을 전부 무시하고 진격, 3일 이내에 황도를 포위…?”
“게다가 보급계획도 없이 병력 운용계획뿐이라니요. 이건…!”
“전략이라기보단, 병정놀이에 가깝죠.”
적나라한 내 말에 참모들이 슬쩍 눈을 피했지만, 그것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군대는, 그 병정놀이 같은 전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 군대.
회의실에 모인 기사들이 그 말뜻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크, 크흠…….”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아키몬드의 언데드 군대라니….”
베르켈의 동료인 레이븐과 그의 후예인 코락스.
두 사람의 증언을 가주인 하인켈이 인정하자 회의실 안에 모인 기사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개중 몇몇은 칼을 뽑아 들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비교적 젊은 기사들과는 달리 몇몇 기사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비장한 얼굴을 했다.
하인켈, 델라인, 본가 직속의 기사단장들.
그리고 수 대에 걸쳐 라인란트에 충성하던 원로들이 그러했다.
‘이날을 위해 안배해 둔 가문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나.’
제국의 계획을 막을 열쇠로 날 선택한 베르켈.
그를 믿고 200년 동안 제국과 싸워온 북부의 후예들.
그들에게 있어 내 존재는 200년의 시간 동안 가문을 존속시킨 맹약의 증거요, 200년 동안 가문을 속박해 온 족쇄.
그러니 내가 성장을 마친 지금, 그들은 마지막 할 일을 마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 헌신의 대가로써.
한 가문을 묘판 삼아 이곳에 다다른 난, 이들에게 승리를 선사해야 한다.
그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증명을 위해.
“제 관점에서 볼 때, 살아있는 인간을 병사로 무장시키는 것은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100만이 넘는 언데드 군대가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헛소리.
각 지역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내밀었음에도, 그것을 믿어줄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이름에 얽혀있는 수많은 공포와 악명.
아키몬드의 환생이라 불린 내 존재가 지금, 그 헛소리를 납득시키기 위한 최고의 보증이 되고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생명체는 주기적으로 식량을 소모하죠.”
“…….”
“하루 중 일정 시간은 휴식을 취해야 하며, 각종 병균에도 취약합니다. 심지어 군대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위험은 늘어만 가고요.”
상비군이 아닌 징집병이라면 더욱 그렇다.
농민들을 징발해 병사의 머릿수를 늘려봐야, 결국 국가의 노동력을 군사력으로 바꾼 격.
병력을 오래 유지하면 할수록 손해 보는 장사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언데드는 다릅니다.”
기초적인 언데드, 스켈레톤만 해도 그렇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으며, 지치지 않는 몸을 지닌 존재.
그렇기에 이들은 병법을 논함에 있어 기초적인 상식이라 치부되는 것들을 깡그리 무시할 수 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전쟁을 수행할 만큼의 언데드를 사역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
그렇지만 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100만이 넘는 언데드가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
“이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내 설명을 들은 부관들이 기가 질린다는 듯 말꼬리를 늘렸다.
“아키몬드의 군단. 역사로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인켈이 그렇게 평했다.
제국과 교국을 한순간에 불태우고, 지금까지도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불멸의 군세.
그 명성을 만들어낸 것은 데스나이트와 같은 고위 언데드의 강함이 아닌, 언데드가 내재한 그 자체의 이점이었다.
“수적 우위가 이쪽에 있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군.”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하인켈은 주변을 돌아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금의 멜디르 제국은, 대륙의 수호자라는 의무를 져버렸소.”
제국의 세 공작이 황제를 향해 검을 겨누는 이유.
“돈과 권력으로 서부의 꼭대기에 앉아, 가문의 성전을 피와 살덩이로 더럽혔습니다.”
폴와이번의 맹주인 라이아가 그리 말하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들고 있던 창에 힘을 더했다.
“무고한 이들을 실험체로 삼아, 끝내는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 전장에 내몰았죠.”
아일라시스의 영주인 시엘이 엘프란의 악행을 입에 담았지만, 그 목소리에 별다른 감정은 실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된 이들의 피를 도구 삼아, 영생을 추구한 어리석은 자.”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이켈은 지도 중앙에 그려진 제국 황성을 바라보았다.
“이상의 이유로, 제국 3대 공작가의 대표 하인켈 라인란트가 선언하니.”
한때 충성했고, 고개 숙여 섬겼던 국가.
그렇지만 그것을 보는 하인켈의 눈은 조국의 타락을 목도한 충신의 눈이 아니었다.
“우린 지금부터, 악으로 점철된 제국의 심장을 무너트리러 간다.”
언제나 그랬듯 숙적을 바라보는 복수자의 눈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