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물과 기름
“온다.”
부켄하임 영지 최북단.
길튼 요새 남문.
밀집대형으로 다가오는 제국군을 바라보던 병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쿵- 쿵-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발소리를 맞춘 제국군 보병들.
선봉엔 제각각의 병장기를 치켜든 기사들이 마력을 이끌어 날아드는 화살을 이리저리 쳐내고 있었다.
“많군. 지난 번 전투보다 배는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지독한 놈들. 그렇게 많이 죽여댔는데, 어디서 또 이렇게 몰려든 거야?!”
수백 명의 손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제국군과는 달리, 북부는 병사 한 명, 기사 한 명의 손실이 너무나도 뼈아프다.
무의미한 인명피해를 줄이고자 포기한 요새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적을 끌어들여 소모시킨 후 후퇴, 그리고 또 후퇴.
그렇게 전투가 계속되기를 한 달여.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도, 이들을 이끄는 기사들의 체력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애당초,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제국에 대항하는 것은 바위로 폭포를 막으려 하는 것과 진배없는 짓이다.
병사의 양, 질, 그리고 투입되는 자원.
모든 면에서 북부를 압도하는 제국군이 백작령 하나를 뚫지 못해 한 달 이상을 소모하는 이 상황 자체만으로도, 북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터.
훌륭히 싸웠지만, 그조차도 점점 한계가 다가왔다.
체력은 바닥을 드러냈고, 화살의 비축분도 많지 않다.
부상병은 아직 다 후퇴하지 못해 성 안에 그대로 잔류해있으며, 식량 수급도 슬슬 난항을 보이고 있다.
사면초가.
그렇지만 성벽에 붙은 채 숨죽인 병사들은 겁먹고 도망치는 대신, 무기를 든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북부의 병사가 용맹하거나, 더 잘 훈련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보다는, 절박한 것이다.
이곳은 북부의 힘을 전부 끌어모은 최후의 보루.
이 요새가 뚫리면, 그 뒤에 있는 것은 부상병들과 영지민.
그리고 북부에 사는 자신의 가족들이었으니까.
“전투마법사 부대, 조준!”
지휘관의 구령과 함께 제국군 진영에서 마력광이 및나기 시작했다.
“저 개자식들……!”
수많은 병사들을 불태운 제국의 마법이 들판을 수놓았다.
북부와 제국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마법사의 수.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아무리 분전한다 한들, 절대적인 화력의 격차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화륵-!
치이이익-!
마법을 방해하기 위해 쏜 화살이 열을 이기지 못해 불타 사라졌다.
물방울처럼 일렁이며 타오르는 것은 인마살상용 화염마법, 착화.
성벽을 부수는 대신 성 곳곳에 달라붙어, 내부에 있는 병사들을 태우는 것에 특화된 지옥불이었다.
“발사……!”
마법이 장전된 것을 확인한 지휘관이 발사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쿠콰아앙-!
거대한 울림과 함께 제국군 진영 한 곳에서 병사들이 튀어 올랐다.
“끄아아악-?!”
“뭐야! 어디서 날아온 공격이야?!”
폭격 마법인가?
그렇게도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라인란트에 합세한 지원군들 중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저건……!”
수많은 병사들을 뚫고 지휘관의 지척까지 다다른 것은 검이 남긴 상흔.
저 폭발은 마법이 아니라, 검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라인란트 기사단!”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기 속에서 솟아오른 것은 라인란트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깃발.
그리고 그것을 앞세워 말을 달리는 한 무리의 기사들이었다.
“우익은 대열을 풀고 포위! 전쟁망치 기사단이 발을 묶는다! 전투마법사 조준!”
성 내부를 겨누던 마법들이 곧바로 목표를 변경했다.
북부 기사 특유의 전투 지속력을 갖추는 동시에, 저 정도의 검격을 쏘아낼 수 있는 기사.
그것이 가능한 기사는 라인란트 기사들 중.
아니, 대륙의 모든 기사들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선두에 선 것이 델라인 공자다! 놈을 집중적으로 노려!”
“발사-!”
투화악-!
지휘관의 명령과 함께 수십 발의 마법이 기사단을 향해 튀어나갔다.
말에 오른 기사들은 장창병의 창에 얽혀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
“성을 향한 화력을 분산시킬 속셈이겠지만,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구나!”
머리를 잃는다면 집단은 흔들린다.
반란의 수괴인 하인켈 라인란트, 그리고 그의 후계자 델라인.
그들 중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 요새보다도 많은 값을 치르는 셈이 될 터
그렇게 생각하며 환희의 미소를 지은 순간.
[정지.]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기사단을 향하던 불꽃들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뭐, 뭐라고?”
마치 공간을 통째로 잡아놓은 듯한 기괴한 광경.
“말도 안 돼.”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전투마법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중력마법…?”
“용들이 사용했다던 그 마법이 아닌가!”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다시 한 번, 맑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반전.]
그리고 그 목소리와 함께.
기사들을 향해 쏜 마법이 그대로 제국군을 향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쿠콰아아앙-!
“아아악?!”
“뭐야, 저게 왜 우리한테……!”
갑작스러운 마법 세례에 당황한 기사들이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라인란트를 앞에 두고 틈을 보이나?”
곧바로 튀어나온 델라인의 검이 기사들을 횡으로 그어버렸다.
퍼엉-!
검을 휘둘렀음에도 절삭음이 아닌 폭발음이 들려왔다.
선이 아닌 면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압도적인 마력량.
델라인 라인란트의 고유 검술인 ‘폭검’이었다.
“사, 사령관님!”
“당황하지 마라! 그래봤자 일개 기사단일 뿐이야!”
병사들의 동요를 다잡은 지휘관은 곧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사로뿔 기사단이 대응한다! 나머지 병력은 계속해서 요새로 진군! 이번에야말로 북부군을 완전히 없애……!”
“그게 어디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지휘관의 말을 끊고 눈 앞에 나타난 그림자가 있었다.
백발을 휘날리며, 낡아빠진 철검을 든 노인.
하얗게 죽어있는 두 눈동자를 목도한 순간, 지휘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이안 라인란트?”
자신을 호위하던 기사들은 어디로 갔는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말에서 뛰어올라 자신에게 다다르는 그 순간.
이미 주위에 있던 기사들의 목은 하늘을 날고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기사 학살자가 왜 여기에……!”
스걱-!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한 채 지휘관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상황에 뒤이어 다가온 기사들은 아연실색하면서도, 이안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침입이다!”
“이안 라인란트! 다 죽어가는 노구가……!”
일반 기사들은 한 걸음 물러선 채, 단장급 기사들이 전면에 나서서 대응.
집단전술의 교과서라고 해도 될 만큼 절도 잡힌 운용이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쿠콰아아앙-!
하늘에서 내리꽃힌 무언가에 의해, 돌진하는 기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허허, 이것 참. 옆집 이웃에게 신세지는구만.”
힘을 급하게 끌어낸 반동인지,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키는 이안.
“그 사람과 한 약속이니까요. 그리고.”
부웅-!
그런 이안을 지키듯 선 인영은, 거대한 마상창을 휘둘러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를 단번에 걷어냈다.
“덕분에 묵혀둔 분을 풀 수도 있었고 말이죠.”
한 손에 든 마상창.
그리고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깃발.
푸른 배경색을 지닌 깃발의 정중앙에는, 용의 문양이 새하얗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이아 렌 폴와이번?!”
“기사단은 북부로 향했을 텐데, 서부의 공작이 어째서 여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방금 전과 같은 폭음이 연달아 제국군 진지를 급습했다.
쿠콰콰쾅-!
하늘에서 내리꽃히는 중무장한 폴와이번의 기사들.
기사들이 황급히 그들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레어메탈로 온몸을 두른 그들에게는 상처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폴와이번의 적법한 계승자, 라이아 렌 폴와이번이 푸른 성창 기사단에 명령합니다!”
마력을 담아 외치는 라이아의 목소리에 기사들이 저마다 들고 온 병장기들을 꺼냈다.
트루 투핸더, 전쟁망치, 워 액스.
그리고 몸에 두르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
아밍 소드 같은 경장비를 즐겨 사용하는 라인란트와는 달리, 하나같이 육중하기 그지없는 중장비들이었다.
“가문의 성전에 먹칠을 한 제국의 개들을, 한 마리도 빠짐없이 전부 도륙하세요!”
“으아아아아-!”
“전부 죽여주마!”
맹주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인간 전차라는 이명에서 알 수 있듯, 방어력 하나만으로는 대륙 최강을 자부하는 폴와이번의 기사들.
그 위명에 걸맞게, 기세를 등에 업은 기사들은 파죽지세로 제국군의 진형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퇴각! 퇴각하라!”
지휘관과 기사단이 붕괴하자, 곧바로 병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많은 수를 갖췄다 한들, 이들의 태반은 급하게 차출한 징집병들.
자신들을 통제할 인간이 사라지자, 사기가 떨어진 병력이 곧바로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군 정지!”
도망치는 제국군들을 확인한 순간, 델라인은 손을 들어 진격을 중지시켰다.
폴와이번 기사단 역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병기를 회수했지만.
“하아~ 이래서 기사분들은.”
그렇게 말한 한 사람만큼은, 도망치는 제국군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사님들의 성품이 고결한 건 알겠지만,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도 아시죠?”
쿠궁-!
“끄으……?!”
“뭐야, 갑자기 몸이……!”
머리 위에서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감에 도망치던 제국군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추로 자신을 누르는 듯한 감각.
영문을 몰라하는 병사들과 달리, 그들에 섞여 도망치던 전투마법사들은 엄습하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틀림없어. 이 마법은 역시!”
“시엘 라 아일라시스. 동부의 마녀…!”
떨리는 목소리로 마법사들이 입을 연 순간.
[짓이겨라.]
“아, 안……!”
퍼석-!
시엘의 한 마디와 함께, 도망치던 병사들은 곤죽이 되어 넓은 평원에 흩뿌려졌다.
“으윽……?!”
“……!”
핏빛으로 불든 평원의 모습에 질색한 듯, 델라인이 어깨를 떨었다.
“음, 깔끔하네요!”
그렇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들이복 차림을 한 시엘은 청소를 끝냈다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 뿐이었다.
***
열 배에 달하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제국군의 패배.
그것도 생존자는 두 자릿수에 불과한, 그야말로 완패였다.
전투가 끝난 길튼 요새.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 라인란트 진영이었지만, 아쉽게도 승리를 자축할 여유는 없었다.
“델라인 녀석이 고생이구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 전투를 이겼다 한들, 다음 침공이 올 것이다.
한 달 동안의 싸움으로 그들은 그것을 깨달았고, 북부군은 이어질 다음 전투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으음~”
그러나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것은 병사들을 먹이고 입혀야 할 라인란트, 그리고 폴와이번의 일.
병력 없이 홀로 지원군을 자처한 시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조금 있으면 클라인이 도착할 텐데, 이러면 별로 좋은 풍경이 안 나오겠네요. 그렇죠?”
한동안 피칠갑된 평원을 바라보던 검은 프릴 드레스 차림의 소녀, 시엘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쿠르르르르……!
수많은 시체로 가득했던 평원이 요동치고, 지반 째 들어 올려진 땅이 뒤섞이며 시체들을 땅속으로 묻어버렸다.
“음! 이제 좀 낫네요!”
“낫다니, 저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할 소리냐 그게?”
흡족한 듯 그렇게 말하는 시엘을 보며, 이안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만 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저 혼자 온 게 부족하다던 사람들한테는 꽤 좋은 대답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 시엘.
“안 그래요 이안 님?”
입은 이안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엘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쯧.”
기사들의 무장과 마력을 점검하던 라이아.
시엘의 말을 들은 듯, 그쪽으로 눈을 흘긴 그녀가 얼굴을 찡그린 것도 잠시.
“그러게요. 다시 봤어요. 아일라시스 공작.”
언제 그랬냐는 듯 특유의 가식으로 얼굴을 뒤덮은 라이아가 환하게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저항하지 않고 도망가는 패잔병을 굳이 참살하다니, 정말로…….”
“시엘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라이아.”
그녀의 잔혹성을 입에 담으며 비꼬는 라이아의 말을 끊고 시엘이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이름을 불러대는 무례에도 라이아는 미소 띤 얼굴에 힘줄을 띄울 뿐,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아가씨. 제발 성질 좀 죽이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반대편 영지랑 싸우면 안됩니다. 아시죠?”
“아가씨 심호흡! 후-! 후-!”
아니, 반응을 안 한 게 아니었네.
그냥 머리끝까지 올라온 무언가를 참아내는 도중이었나.
그렇지만 시엘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유의 맑은 웃음과 함께 라이아의 악담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패잔병은 적군이 아닌가요?”
“징집병들이죠.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들이라고요.”
“그럼 오히려 더 잘됐네요! 적국의 노동력을 이렇게 많이 줄일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 받아넘겼다는 말도 취소.
말에 가시가 박혀있는 것이 보고 있는 이안의 등이 다 따가워질 지경이었다.
“자자, 그만, 그만! 어쩌다가 내가 이 틈바구니에 껴선.”
물과 기름은 모아놓고 섞이라고 하니, 이 꼴이 나지.
그들 사이에 난입한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향해 탄식했다.
“빨리빨리 좀 튀어나와라, 망할 제자놈아…….”
두 공작 가문이 동맹으로써 합류한 지 2주일.
그들 사이의 중재를 맡은 이안은, 오늘따라 말 안 듣는 조카의 얼굴이 한층 더 그리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