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96화 (196/209)

196. 따라갈래요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도, 하늘 높이 뻗어있는 얼음성의 구조물들도.

시야를 가득 메운 언데드 군단마저 모두 검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시야가 암전되었다 착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 이건 대체…. 크헉?!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도 잠시, 그는 한쪽 팔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감각에 시선을 돌렸고.

- ……!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의 팔을 보며,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 어, 어느새?

“지금 팔 하나 떨어진 게 대수가 아닐 텐데?”

허공에서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브리간테가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 크으으?!

검게 물든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눈이었다.

사람의 눈, 포유류의 눈, 파충류의 눈, 어류의 눈.

제각기 다른 생물들의 눈이 수백,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하는 눈들이, 다닥다닥 붙은 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쩌어억.

그리고 동시에, 입이 열렸다.

자신의 발아래에서, 병사들의 위에서, 허공에서, 하늘에서, 눈앞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눈처럼, 수많은 짐승의 입이 아가리를 벌린 채 이빨을 번득이고 있었다.

- 굴복할 줄 아느냐!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어버릴 광경이다.

그렇지만 불완전하긴 하나, 한낱 필멸자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거듭난 브리간테.

- 이렇게 끝날 것 같으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성싶으냐……!

정신이 나간 듯 되뇌이는 브리간테는, 두르고 있는 빛나는 갑옷의 광채를 한층 더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네.’

검은 그림자 속에서 몸부림치는 브리간테를 보며 그렇개 생각했다.

그림자에서 솟아난 기괴스러운 생명체.

미지의 존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애써 물리치는 모습은, 불굴의 정신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전사의 기백과도 같았다.

‘실상은, 그보다는 훨씬 천한 감정이지만 말이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채 날뛰는 저 모습은 얼핏 빛나는 철인의 전투같아 보였지만, 그 실상을 파고들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제 손에 들어온 것을 놓지 않으려는, 떼쓰는 어린아이의 발악.

- 뭣들 하느냐! 당장 이 혐오스러운 괴물을 짓이겨버려라!

그렇게 외친 브리간테는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을 황급히 움직이려 해 봤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크어어--!”

“끼이이이이…….”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낮춘 거인들이 하나둘 그림자 속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 어, 째서…?

“본능적으로 아는 거지. 자신들의 근원이 어디인지.”

인간을 변이시켜 구축한 육신.

그 몸 안을 돌고 있는 성혈.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떠올린다면, 사실 간단한 이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거다.”

- ……!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림자를 쳐내려 해 봤자 더 이상 수가 없었다.

신성력을 끌어올려 그림자를 불태워도, 불타는 창을 휘둘러 걷어내도.

시야를 전부 뒤덮은 그림자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서서히 그의 몸을 좀먹고 있었다.

- 어째서 실패한 거지?

무력감과 공포.

그 끝에 찾아온 것은 의문이었다.

- 한평생에 걸쳐 쌓아온 계획이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도달한 권좌다! 헤아릴 수 없는 희생 끝에 겨우 손에 넣은 힘이란 말이다!

“…….”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빛나는 갑주가 그 증거였다.

채 펼치지도 못한 열두 장의 날개가 그 증명이었다.

일평생을 바쳐온 노력의 과실이 눈앞에 있는데.

그것을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여기서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 그런데, 도대체 왜……!

“네 선택에 대한 대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가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 뭐라고?

“네 계획을 지지하고, 공감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네 손으로 쳐낸 탓이라고.”

그 말에 브리간테의 입이 굳게 닫혔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텐데?”

- …….

알고 있었다.

선망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신도들.

한 줌 빵과 함께 선심 쓰듯 주어진 호의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간 대행자들.

자신의 대의에 공감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인 신관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문득 든 그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도, 브리간테는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널 바라보며 동참한 이들을 이 꼴로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야.”

그림자 속에 먹혀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이들을 보았다.

한 치의 저항도 없이.

한 줌의 감정도 없이 서서히 녹아 내려가는 병사들.

자신은 그들을 도구라 칭했고, 그들의 의지를 없앴다.

“신이 되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놈이, 정작 그 인간의 인격을 지우고 괴물을 만들어?”

모순.

그것을 지적하는 클라인의 목소리에 브리간테가 이를 악물었다.

“배신하지 않는 병사? 신성의 첨단? 전부 다 핑계에 불과하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잖아.”

- 진짜 이유?

이미 그림자는 지척에 다다랐다.

도망칠 곳도,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그런 와중에도 브리간테의 눈은 마치 해답을 찾는 소년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넌 그냥 무서웠던 것뿐이야.”

- ……!

“만에 하나 있을 배신이 두려워서, 네 사람이 너와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이 두려워서. 그들이 네가 틀렸다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 말에,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먼 옛날.

그가 교황이 아닌, 일개 신부였던 시절.

자신의 작은 실험실을 발견한 뒤 분노하던, 그녀의 모습을.

‘내가 널 한참 잘못 봤구나, 브리간테.’

미리암 라프탈리아.

어릴 적 함께 수도원에 들어와, 숱한 임무를 함께 해 온 여자.

함께 싸우고, 성장하고, 서로 웃고 떠들며, 결국엔 사랑했던.

‘당장 꺼져.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니까.’

그리고 끝내는, 자신을 비난하며 떠난 그녀를.

자신의 곁은 떠난 그녀는 대행자의 지위를 버렸다.

교단의 모든 행사에서 손을 뗀 채, 이름 없는 고아원을 운영하며 그가 저지른 죄의 부산물을 거둬들였지.

“인간의 감정을 두려워한 끝에, 의지 없는 인형이 아니면 대면하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겁쟁이.”

- …….

“그런 놈이, 세상을 구한다며 신을 자처하면, 누가 거기에 따를 것 같나.”

털썩-!

턱밑까지 차오른 그림자에 교황은 몸에 힘을 풀었다.

- 그때부터,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회한, 후회.

그 수많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 끝내 그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 미리암…….

콰득-

그림자가 그의 존재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필멸의 몸으로 신의 권좌를 노리던 남자는 그렇게, 한 줌 양식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촤르륵-!

사방을 뒤덮은 그림자가 걷히며, 새하얀 하늘이 드러났다.

“이건…….”

- 이곳에 햇빛이라니, 희한한 일이지.

개리슨을 향해 그렇게 말한 것은 수백 년 동안 이곳을 지킨 골룡, 사하크의 목소리였다.

- 얼음성이 위치한 동토지대는 망자의 영역일세. 한을 다 풀지 못한 북부인들의 원한으로 가득 찬 곳이지.

“…….”

- 그런 곳에 햇빛이 비친다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개리슨은 자신을 향해 내리쬐는 태양빛이 눈부신 듯 손으로 그것을 가렸다.

주신 케르시아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양의 빛.

교단의 교리대로라면 그 태양빛을 거부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으나, 지금의 개리슨에게 교단의 법도를 들먹인 마음은 없었다.

까득, 까드득.

교황이 만들어낸 언데드들의 잔해를 씹어대는 아린의 그림자.

곳곳에 뻗어있는 그림자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종종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가는 아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히히!”

소년을 향해 활짝 미소짓고 있는 천진한 모습.

그렇지만 그런 아린의 모습이 점점 바뀌어 가고 있었다.

츠츠츠츠……!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풀어져,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되었다.

갈색 머리칼과 검은 눈은 마치 물감을 탄 듯,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저건…….”

시리도록 새하얀색에, 이따금씩 비추는 금빛.

눈동자 또한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박아넣은 듯, 찬연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스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린의 치마 속에서 흘러나온 그림자들이 한데 뭉쳐, 마치 무언가를 감싸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형태를 갖춰가며, 아린의 얇은 허리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한순간 부서지더니.

촤악-!

그곳에서 화한 한 쌍의 날개가, 그녀의 머리칼과 같은 백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난 모양이군.

의식.

그 말에 개리슨은 방금 전, 클라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수천에 달하는 검은 거인.

그리고 그들의 힘을 제물 삼아,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난 브리간테.

클라인은 그런 그들을, 제물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사용하여 진짜 의식을 치를 때라고.

“아린 양이 그 결과라는 말인가.”

화사하게 웃으며 날개를 펼치는 소녀의 모습.

그와는 별개로, 개리슨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힘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거대한 힘이라니. 게다가 이 파장은….”

자신을 신이라 자칭하던 브리간테를 먹어치운 존재.

그림자 속에 감춰둔 힘을 가감 없이 드러낸 아린이 지닌 힘은 말 그대로, 케르시아스의 재림이라 부를 만했다.

“모처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어디 아픈 덴 없냐.”

“네! 없어요!”

나지막이 물어보는 소년의 말에 아린이 큰 소리로 답했다.

원래 모습.

그렇게 말한 클라인의 말과는 달리, 아린은 제 몸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날개가 신기한 듯, 등에 솟아난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네.”

그렇게 말한 클라인은 한 발짝 물러선 뒤, 아린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남은 건, 네 선택뿐이구나.”

선택.

그 말에 의아해할 새도 없이, 클라인은 아린과 눈을 맞춘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곧바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제국을 쳐부술 거다.”

그렇게 말하는 클라인의 등 뒤에는, 백만이 넘는 언데드의 군세가 도열해 있었다.

“성혈과 거기에 얽힌 마지막 잔재를 전부 박살 내러.”

위협이 사라진 얼음성이 내뿜는 힘은 무제한.

방금 전의 전투로 소모한 혼은 애저녁에 복구되어 있었다.

“그러니 한낱 네크로맨서가, 새로 태어난 신에게 묻겠는데.”

언데드의 군세를 이끄는 클라인과, 그에 마주 선 아린.

그 구도를 본 개리슨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클라인은, 아린에게 새로운 계약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아린을 향해 내밀어진 손.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아린은 잠시 후.

“따라갈래요!”

늘 그랬듯 맑은 웃음과 함께, 양손으로 그것을 맞잡났다.

“괜찮겠어?”

“물론이죠!”

한 치 망설임 없이 그렇게 답한 아린은, 날개를 활짝 편 채 말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도련님의 하녀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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