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94화 (194/209)

194. 다 해 봤거든

쿵-! 쿵-!

수십만 병사가 일제히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온 빙원이 비명을 지르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온 천지를 뒤덮은 망자의 군대가 북쪽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을 불태울지니.”

알고 있는 문구였다.

케르시아스 신성교단 경전 마지막 권에 수록된 문구.

아키몬드와의 전쟁, 교단에서 이르길 대성전을 기록한 부분이었다.

“그래, 참으로 경전이 말하던 광경과 똑같구나.”

시야가 닿은 모든 공간이 언데드로 뒤덮여 있었다.

그렇지만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한 다른 신관들과는 달리, 브리간테는 그 광경을 보고서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실로, 세상의 종말이라 부를 법 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턱을 감싸 쥘 뿐.

“그러니 이쪽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겠지.”

“준비라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성하?”

교황의 말에 신관들 몇몇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브리간테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커, 커헉!”

교황에게 질문했던 신관은 갑작스레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 자신의 목을 붙잡은 채 캑캑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가?!”

“자네, 갑자기 이게 무슨……!”

다른 신관들이 그렇게 묻는 동안에도 신관의 몸에 일어난 변화는 계속되었다.

서서히 돋아나는 핏줄과 붉어지는 눈.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도무지 눈 뜨고 봐줄 몰골이 아니었다.

“내 은총을 받아들이고, 교국 권력의 중추에 올랐을 때. 너희들은 내게 맹세했었지.”

인자한 노인이 타이르는 듯한 말투.

그렇지만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는 이곳을 뒤덮은 혹한에서도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필요할 때가 다가온다면, 언제든 그 목숨을 내놓겠다고.”

“그, 그것은……!”

“그러니 놀랄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느니라.”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신관이 몸을 비척거리는 것도 잠시.

“드디어 너희에게도 맹세를 지킬 차례가 찾아온 것뿐이니 말이다.”

뿌득-!

수직으로 목이 꺾인 신관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들이 자신들을 믿는 신도에게 하였듯, 공평히 찾아오는 죽음.

아니, 단지 그것으로 끝났다면 다행이련만.

꾸득, 꾸드득.

온몸의 골격을 비틀어댄 신관의 몸이 부풀어 눈에 익은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저것은?

“슬슬 보기 지겨워지는데.”

대행자, 케이런이 금침을 다루는 것을 보았다.

공중에 부유한 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무구들.

그 기괴한 전투법이 누구에게서 전수된 건가 싶었는데, 설마 이 녀석일 줄이야.

푸푸푹-!

교황이 앉은 마차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말뚝이 부풀어 오른 신관의 몸 곳곳에 박혔다.

박힌 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핏줄은 이윽고, 언데드가 되어버린 신관의 몸을 진정 괴물로 바꾸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어---!”

그렇게 또 하나, 검은 거인이 완성된 것이다.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서, 성하! 함께 모든 대업을 완수한다면, 저흰 성하와 함께……!”

신성력을 지닌 인간을 언데드로 만들어, 검은 거인이라는 존재로 뒤바뀌는 교단의 사술.

그렇지만 그 칼끝이 자신을 향하자, 신관들의 얼굴이 단번에 사색이 되었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새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렇지만 교황은 그들을 어르듯 특유의 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저 간 신도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먼저 간 신도들.

이 상황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 아아……!”

동료? 부하?

저 자가 원하는 것은 그런 감정적인 신뢰관계가 아니다.

저자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도구.

혹은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뿐이겠지.

“크워어어어억-!”

교황을 규탄하거나, 배신감에 치를 떠는 신관들의 목소리리가 얼마간 이어지다가 금세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메꾼 것은 괴물의 울음소리.

교황을 중심으로 선 열 명 남짓한 거인이 하늘 높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 새로 만들어진 거인들, 한 차원 더 강화된 느낌이군.

그렇게 말한 것은, 머리 위에 날 태우고 있는 사하크였다.

“그렇겠지, 보통 좋은 재료가 아니었을 텐데.”

신성력을 지닌 인간을 언데드로 변질시켜, 그것을 거인으로 가공하는 사술.

그리고 한평생 신성력을 갈고닦은 고위 신관들은, 교황에게 있어선 특히 더 귀중한 재료였을 것이다.

곁에 두고, 지위와 권력을 주며, 차근차근 가공할 정도로.

- 막지 않아도 되는 건가?

“막아? 내가 뭣 하러?”

그렇게 말한 난 어깨를 으쓱였다.

“제 스스로 교국의 미래를 박살 내고 있는데, 두 팔 벌려 환영이라도 해 줄까 싶은데.”

교국의 고위 신관들은 정치와 책략에 능한 능구렁이들이다.

만에 하나 살아나간다면, 훗날 잠재적 변수가 될 수도 있던 것들.

그런 이들이 한순간에 지성을 빼앗긴 괴물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를 생각한다면, 내 입장에선 오히려 잘된 격이지.

이다음에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가, 너무도 뻔히 보이거든.

“모든 신도들은 의식을 준비하라.”

저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교황의 의견에 반하는 자도 없었다.

신관이었던 자들.

교단의 부패한 권력을 차지했던 자들.

권력에 굴복해, 저 악의에 희생된 무고한 자들까지.

그 모든 생명이 그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그의 명령에 복종할 뿐.

“크워억-!”

일렬로 선 채 몸을 낮춰, 원형으로 교황을 감싸는 구도.

“저 당돌한 새끼.”

그 배열을 눈여겨보자, 곧 교황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자리에서 강림의식을 하겠다?’

교단이 이곳에 온 목적은 하나, 케르시아스의 강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지 없는 신을 강림시켜 자신들의 발아래에 복속시키려는 것.

그렇기에 그들은 나와 내 군대와 정면으로 맞붙을 필요가 없다.

요컨대, 의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되는 거다.

거인들의 신성력과 육신을 한 곳에 끌어모아, 신의 형상으로 화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것이겠지.

‘얼음성은 지척에 있고, 강림시킬 묘대도 있으니, 안에 들어갈 필요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난 사하크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크륵!”

내 존재를 알아챈 거인들이 날 쳐다봤다.

“크으으으……!”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느니, 이 군단의 중추인 날 죽이면 된다는 판단.

이윽고 거인들이 일제히 전투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나오는 건 병력의 절반 정도. 나머지는 의식용 제물인가.”

그렇게 말하며, 난 그들의 맞은편에 섰다.

교단의 대행자와 백중세를 이루는 언데드가 수천.

무한히 재생하는 육체에, 마법을 통째로 찢어버리는 힘.

정신계 마법도, 듣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의 상징.

아마 저것은 교단의 역사에 비추어봐도 최대 규모의 전력이라 부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제 손으로 박살 내도록 안배해 줘야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난 앞에서 숨을 고르는 거구를 향해 말했다.

“야, 신부.”

“뭐냐, 네크로맨서.”

대행자, 개리슨 비어크만.

그의 등에 대고 말하자, 딱딱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폼이란 폼은 다 잡고 뛰쳐나가더니, 왜 그 모양 그 꼴인 건데?”

물론, 거기에 호응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

“왜, 이제 와서 없던 동정심에 불이라도 붙었냐? 죽으면 내가 염이라도 해 줘?”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이교도가, 같잖은 농담을 지껄이는군.”

짧은 대답과 함께 곰 같은 신부의 거구가 몸을 일으켰다.

이야, 그 몸 상태로 웃고 있냐?

오랜만에 보는 소름끼치는 얼굴에 절로 안심이 됐다.

“나보다 먼저 뒤지면 장례는 치러주마. 특별히 북방 이교도식으로 말이야.”

“그렇다면 난 네 시체를 남쪽 끝 화산 구덩이에 던져주마. 아니면 다음 생은 무지렁이로 환생하게 해달라 빌어볼까.”

전투 직전 살벌한 덕담이 오가고, 그다음 순간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끝내 건넨 말은, 단 한 마디.

“죽지 마라.”

“네놈이야말로.”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언데드 군단과 수천 구의 거인이 서로를 향해 일제히 튀어 나갔다.

- 키야아아악-!

“크워어억!”

쿠콰아아앙-!

내리꽂히자마자 폭발하는 검은 거인들의 주먹, 그리고 신성력으로 이뤄진 보호막.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돌진한 자리가 폭탄이라도 맞은 듯 터져나갔다.

- 키이이익!

수십 구의 언데드들이 파편이 되어 비산했지만, 언데드는 동료의 죽음에 동요하지 않는다.

촤르륵-!

곧바로 포위진을 형성한 스켈레톤이 거인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창병을 든 이가 움직임을 제한하는 사이, 마기로 이뤄진 사슬이 거인의 사지를 묶는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200년 전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아키몬드.”

캉-!

거인이 휘두른 팔 한 번에 창병은 휩쓸려 나가고, 사슬을 뿌리치자 다시 수십 명의 스켈레톤이 거기에 딸려 나가 하늘을 날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교단은 끊임없이 널 연구하고, 또 준비해 왔으니까.”

용맹하게 달려드는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 것으로는 저 괴물을 막을 수 없다고.

스켈레톤은 언데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체.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강화하고, 또 성물로 구조를 변경시킨 저 괴물에 대적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그 증명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들이 기꺼이 몸을 던지는 이유는, 그들이 죽지 않는 언데드의 몸을 하고 있어서 뿐일까?

애석하게도, 그것은 아니었다.

쿠콰앙-!

“크워어어억-!”

포위망을 뚫고 뛰어오른 거인의 몸이 나에게로 쇄도했다.

지척까지 다가온 주먹.

데스나이트도, 리치도, 사하크의 방어막조차도 채 반응하지 못하는 속도였다.

저 속도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처음엔 그저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파츳-!

‘보인다.’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의 눈.

그리고 얼음성과 연결된 순간, 내 혼에 새겨진 수많은 망자들의 각인이 신체를 한계까지 활성화시킨다.

기사들이 파장을 맞춰 마력을 동조시키듯.

난 이곳에 모인 망자들과 내 혼을 동조시킨 것이다.

스걱-!

감각에 몸을 맡긴 채 사선으로 검을 올려 치자, 거인의 왼팔이 하늘로 날았다.

“……!”

“200년 전과는 다를 거라고?”

파죽지세로 병진을 뚫어대던 거인의 팔이 잘려 나간 상황.

의식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있는 와중에도, 교황의 표정은 지금 내게 일목요연하게 보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으니까.

“아니, 너흰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뭐라?”

육성으로 내뱉는 동시에, 검은 거인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데스나이트, 키예스의 고속검.

거인의 팔을 날린 틈새를 파고들어, 거인 하나를 잡아낸 것이었다.

“추종자들을 도구처럼 다루고, 선인의 가면 속에 진짜 얼굴을 숨기며 제 이익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지.”

“…….”

“그리고 그걸로도 배가 다 차지 못해서, 제 품에 맞지 않는 힘에게까지 혀를 낼름거리는 그 천박한 탐욕까지.”

내 말을 듣자 교황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 내가 보인 것은 미소.

그것도 비웃음과 약간의 동정이 담긴, 비릿한 비소였다.

“너나 황제 같은 버러지들. 이미 옛저녁에 전부 다 만나 봤고, 전부 부숴봤거든.”

“하, 같잖은 허세를 부리는군.”

쿠우-!

브리간테의 말이 더 이어지는 순간, 거인들의 진격이 멈췄다.

교황이 멈추라 명한 것이 아니라, 힘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진격이……?”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브리간테를 보며 말했다.

“얼음성을 이용해서 개짓거리를 하려고 했던 인간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었는 줄 아냐?”

“……뭐?”

있었다.

지금의 두 배, 세 배는 되는 병력을 끌고 와서, 신의 심장을 찬탈한 뒤 신의 몸을 얻고자 했던 자가.

“넌 200년 전, 그 쥐새끼가 한 짓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쥐새끼.

내가 내뱉은 멸칭에 브리간테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게 누구를 일컫는 말이었는지를, 그 또한 눈치챈 탓이겠지.

“선대 교황, 프라한.”

“……!”

성당 하수구에 파묻혀, 살려달라고 엎드려 구걸하던 버러지같은 겁쟁이 새끼.

200년 전에 이미 맞닥트렸고, 막아냈다.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했고, 승리했다.

“네 그 잘난 계획이라는 거. 이미 200년 전에 실패했던 일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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