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93화 (193/209)

193. 돌아왔다

휘오오오-!

동토지대의 거친 눈보라가 허락 없이 찾아온 자들을 거부하듯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흐릿한 풍경 속, 이따금씩 튀어 오르는 불꽃.

병장기와 병장기, 신성력과 신성력, 성직자와 성직자가 싸우며 만들어낸 광채였다.

으직-!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엔릴의 빛나는 몸체가 검은 거인의 머리를 통째로 짓이겼다.

“크워어어어억-!”

쿵-!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균형을 잃고 쓰러진 검은 거인.

몇 번 더 꿈틀대던 그것은 이내 힘이 다한 듯,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개리슨……!”

“말도 안 돼, 혼자서 저 거인들을 전부 상대했단 말인가……!”

눈앞에 수북이 쌓인 거인의 시체를 보며 전율하는 신관들이었지만, 그들의 뒤에 앉아있는 한 사람은 그 광경을 여유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통탄할 일이로다. 대행자 개리슨.”

교황 브리간테.

케르시아스 신성교단의 정점에 선 자.

호화롭게 장식된 마차를 이 혹한의 땅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사치인가, 아니면 그가 거느리는 힘을 헤아리게 하기 위함인가.

“신성력이란 우리 교단의 근원이자, 케르시아스 님을 향한 신앙의 증명이라 할 수 있는 것.”

약간의 분노를 담아 그렇게 말하는 교황이었지만, 그 얼굴에서는 일말의 위기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헌데, 가장 독실한 신자였던 네가 우리의 신성한 힘을 변질시키다니.”

다만 실망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발버둥 치는 그를 내려다볼 뿐.

“하물며 그것이 다른 이유도 아닌, 교단의 도구를 부수기 위해서라니 말이야.”

“후우…. 후우….”

수십 구의 거인을 쓰러트렸음에도 남아있는 거인의 수는 수천 남짓.

반면 개리슨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당장에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이젠 한계에 달한 듯하구나.”

“…….”

“네 꼴을 보아라 개리슨. 교단의 창이라 불리던 자가, 어찌 이리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전락했단 말인가?”

곳곳이 찢겨나가 성한 곳이 없는 신부복.

이마에서 흐르는 피.

타나크의 방어막은 진작에 소진되었고, 엔릴에 담긴 신성력은 언제 끊어질지도 모를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수천 구가 넘어가는 거인들.

한 명 한 명을 상대하는 것에도 전력을 다해야 하거늘, 그 수가 수천인 것이다.

“말해보라 변절자. 이 이단을 도대체 어떻게 용서받으려 하는 것이냐?”

“…이단?”

압도적인 전력 차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개리슨은 고개를 든 채 교황과 시선을 마주했다.

금과 비단을 아낌없이 사용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법의.

호화로운 교회를 통째로 들고 온 듯 거대한 마차.

그리고 그 옆을 경호하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

자신은 지금까지 저런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는 말인가.

차가운 회한이 몸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개리슨은 엔릴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교단의 가르침을 져버리고 신자들과 기사들의 육신을 언데드로 만들어버린 자가, 어느 주둥아리로 이단을 논하는 거냐.”

서슬 퍼런 한 마디에 주변의 신관들이 움찔했지만, 브리간테는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느니라.”

“……대의?”

“그래.”

자신을 둘러싼 거인들을 둘러본 교황의 모습에서는 일말의 죄악감도 보이지 않았다.

한치 의문도 없는 표정.

그 평정을 유지한 채, 브리간테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라. 대륙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저 순교자들을!”

“…….”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개리슨의 모습에, 브리간테는 양팔을 벌렸다.

“작금의 대륙이 어떤지를 떠올려 봐라, 성직자.”

“…….”

“끝을 모르는 전쟁에 고통받는 어린 양들은 늘어만 가고, 저 타락한 위정자들은 제 잇속을 채우기에 바쁜 세태를!”

개리슨을 향해 웅변하는 교황의 모습은 참으로 대륙의 안위를 생각하는 왕의 위엄을 보이는 듯했다.

‘팔리만 녀석이 참 잘 배웠군.’

그렇게 생각하는 개리슨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브리간테의 옆에 선 신관들이 교황의 말에 맞장구쳤다.

“대륙의 혼란 속에서, 교단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왔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빈민을 구제하고, 고아들을 거두고, 난민에게 빵을 나눠주었지!”

“헌데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전쟁을 멈추던가? 제 죄를 참회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비극을 보듬었던가?!”

신관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웅변하듯 입을 모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

교황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뒤 직접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젠 우리가 직접 이 타락한 대륙을 바로잡으려 함이니라.”

“……….”

“전란의 상처를 보듬는 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 그것이 교단에 몸담으며, 우리들이 내린 결론이다.”

해묵은 핑계.

억지로 이어 맞춘 정당성.

듣는 입장에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대륙을 구제하기 위해서 대륙의 인간들을 도구로써 사용했다는 건가? 잘도 그따위 궤변을 지껄이는군.”

“수만 명이라는 작은 희생으로, 수십억의 생명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뜻을 정녕 모르겠느냐?”

작은 희생.

흘러나오는 실소와 함께 몸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대의를 위한 희생.

어쩔 수 없는 손실.

자신이 몸담았던 교단은 그런 명목하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쿠우-!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개리슨은 엔릴을 들어 교황을 향해 겨눴다.

“한때는 당신을 존경했소. 브리간테.”

“…….”

“폭주하는 군중의 야만을 견디며 그들에게 빵을 건네던 모습은, 진정 참된 성직자의 귀감이라 생각했었지.”

교단의 길이 엇나갈지언정, 교단이 품은 대의가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리 생각했기에, 개리슨은 아무런 고민 없이 이단을 쳐죽일 수 있었다.

이단을 쳐부수는 망치로써, 교단을 지키는 방패로써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구원했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틀렸군.”

“틀렸다고?”

“당신들은 성직자도, 세상을 구원할 만한 재목도 아니다.”

고민하지 않는 자는 타락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자는 악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책임이 결여된 신념은 단지 아집으로 남아, 듣는 이를 괴롭게 할 뿐이다.

“욕망에 미쳐있는 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성자의 얼굴 가죽을 뒤집었을 뿐인 버러지들.”

“뭐가 어쩌고 어째?!”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그따위 망발을……!”

“동요하지 말라.”

다시 한번 손을 든 교황의 몸짓에 다른 신관들의 말이 멈췄다.

“그래봤자 한낱 이교도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니라.”

그렇지만 이어지는 교황의 한 마디에, 그들은 비릿한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개리슨을 구경하고 있었다.

“크워어어억-!”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거인의 주먹.

쳐낸 뒤엔 제 2, 제 3의 공격이 자신을 향할 것이다.

자신을 천천히 가지고 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금 이들은 자신을 완전히 말살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단.”

지금껏 그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왔던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개리슨은 허리를 편 채 다가오는 거인들에게 맞섰다.

변형시킨 자신의 힘은 저 괴물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으니까.

몸이 움직인다면,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쿠콰아아앙-!

충격을 이기지 못한 동토지대의 빙원이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끝이군.”

엔릴에 가로막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확히 꽂힌 거인의 주먹.

타나크의 장벽도, 신성력으로 만든 보호막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

제아무리 대행자 개리슨이라 한들, 무사하지 못할 공격이었다.

“죽이지는 마라. 산 채로 성물을 박아, 곧 있을 의식의 재료로 사용할 터이니…….”

“의식이 뭐, 어쩌고 어째?”

그 순간.

자신의 말 중간에 끼어든 목소리에 교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낯선 목소리였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혼을 울리는 듯한 음성.

투화악-!

거인의 주먹이 만든 먼지구름이 걷히자,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꾸득, 꾸드드드득.

거인의 주먹을 가로막고 선 것은, 레어메탈로 이루어진 거대한 몸체.

“크륵?!”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거인이 다음 공격을 준비했지만, 그 사이에서 튀어나온 기사의 검이 한 박자 더 빨리 그 목을 파고들었다.

스걱-!

단 한 번의 검.

단 하나의 동작.

불사의 육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인의 몸이, 그 간단한 동작을 버티지 못한 채 허물어졌다.

- 얼음성의 보조를 받았다고 해서 반신반의했건만, 지난번 전투와는 완전히 딴판이로군.

그렇게 말하며 검을 세운 것은 데스나이트, 레이븐.

- 이젠 혼자서 스물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어.

날렵하게 깎인 갑주와 그림자로 이뤄진 망토를 두른 그와 함께, 같은 복장을 한 기사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무기를 들었다.

- 이거 참, 현역 시절로 돌아간 기분인데?

- 거짓말 치기는, 현역 때에 비해 두 배는 넘게 강해졌잖아?

- 설마, 제국의 기사가 아키몬드의 깃발을 들고 싸우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군.

- 너 살아있는 거 아니거든? 어디서 은근슬쩍 산 사람 행세야?

마치 마실이라도 나오듯 평이한 말투.

그렇지만 일제히 검을 세워 전투를 준비하는 그들의 자세는,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

“저, 전군 돌격! 저 언데드들을 당장 부숴버려라!”

아연실색한 신관들이 내뱉은 명령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일까.

화륵-!

하늘 위에 떠오른 수십 개의 불꽃이 교황과 함께 그들이 서 있는 마차를 향해 쇄도했다.

지금까지 보던 붉은 불이 아닌, 시커먼 불꽃.

거인들을 앞세워 그것을 막아냈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크워?! 크워어어억-!”

불에 타 사라지고 있다.

성혈과 성물의 힘으로 무한히 재생하는 육체가, 마치 종잇장처럼 불에 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 하하, 이것 참. 묵은 체증이 싹 가시는 느낌이군!

내장은 진작에 삭아 없어졌을 텐데 말이지.

실없는 농담과 함께 공중에 떠오른 것은, 검은 로브를 두른 해골.

아이신기오르의 언데드 리치, 앙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 골렘, 데스나이트, 그리고 리치. 이 언데드들은 설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팔리만이 쓰러질 때, 그 악마 또한 같이 쓰러졌을 터인데!”

아무런 정보 없이 이곳에 다다른 것이 아니었다.

팔리만을 강화한 성혈은 교황이 내린 축복임과 동시에, 그가 채운 족쇄.

생사를 넘나드는 클라인과 팔리만의 전투는 이미 교황의 눈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여지고 있었으니까.

양측 모두 힘을 소모한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여 가진 힘을 전부 투자한 것이었다.

헌데, 어째서 살아있는 것이지?

심지어 언데드들은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나!

“벌써부터 놀라면 곤란하지. 사이비 새끼들아.”

휘오오오오---!

소년의 한 마디와 함께, 빙원을 메꾼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그들이 사라지고, 수백 년 만의 태양빛이 어두운 동토지대를 밝게 비췄다.

망자의 한으로 가득한 이곳에 햇빛이 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애석하게도 교황과 신관들에겐 그것을 헤아릴 겨를이 남아있지 않았다.

“………!”

“이게, 무…. 슨……?”

흐릿한 시야가 걷히자, 자신들을 둘러싼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클라인의 고위 언데드를 선봉 삼아, 언데드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

빙원 너머.

자신들의 시야가 닿는 저 끝까지.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에 달하는 대군이 그들을 포위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와 함께 날아오른 것은, 검은 연기로 몸을 두른 골룡.

쿵-!

그것이 내려앉는 동시에, 그 머리 위에 올라탄 소년이 교황과 성직자들을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신성교단.”

클라인 라인란트.

아니, 이제 그 이름으로 그를 부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자신을 굽어보는 소년이 보인 저 차가운 얼굴은, 아마 200년 전에 봤던 것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내가 돌아왔다.”

교단을 굴복시킨 네크로맨서, 아키몬드.

200년의 시간, 그리고 한 인간의 생을 넘어.

그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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