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이번엔 잘 해봐
- 더 큰 위협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시간이 없군.
쓰러져있는 클라인의 모습을 살피며, 사하크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다고?”
그 말에 개리슨이 되묻자, 사하크는 긍정하듯 커다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 동토지대 외곽을 배회하는 언데드들이 소멸하고 있네. 혼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한순간에.
언데드를 영혼째 소멸시키는 권능.
개리슨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힘이었다.
“교황의 군대가 지척에 다다랐다는 말이군.”
죽어 없어진 팔리만이 있던 자리에 눈을 흘긴 개리슨은 거칠게 혀를 찼다.
“놈의 상태가 어떤지 말해라, 언데드.”
- 말할 필요도 없다 생각하네만.
마지막 용족의 생존자를 언데드라 부르는 무례.
오만한 용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당장 싸움이 일어났을 법 하지만, 사하크는 개의치 않다는 듯 그의 말을 받았다.
- 마기를 다루는 네크로맨서가 성법기를 사용한걸세. 신성력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구를.
“…….”
- 그마저도 사용하기 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이지.
기름통에 물을 들이부은 격이다.
그렇게 생각한 개리슨은 죽어가던 팔리만이 한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라.”
그 말을 되뇌이면서도, 개리슨은 눈을 들어 무너져가는 본드래곤의 몸체를 응시했다.
“그런데도 네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지?”
- 불확실하고, 위험한 방법이 남았지.
불확실성, 그리고 위험이라.
그 말을 들은 개리슨의 입가가 비틀렸다.
순례길을 떠나던 날.
성법기를 쥔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던 날.
크리펠에서 자신을 설득하던 날.
그때의 클라인의 모습이 차례대로 겹쳐 보인 끝에, 그는 탄식하듯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 가증스러운 네크로맨서가 늘상 써오던 방법이군.”
저벅, 저벅.
천천히 클라인에게로 걸어온 개리슨은 소년의 머리맡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성서, 타나크.
신성력이 충만한 그의 손에 닿자, 탁한 빛을 내던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빛을 내며 공중에 떠올랐다.
“드디어 내 성법기를 모두 쓸 수 있게 되는군.”
촤앙-!
이어서 허공에 손을 뻗자, 개리슨의 손에 빛나는 망치가 쥐어졌다.
성법기 엔릴.
산산이 부서졌던 성자 가울의 마지막 무구가, 그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복구되어있었다.
“먼저 가서 시간을 벌 테니, 넌 놈을 깨워라.”
- 케르시아스의 대행자가, 케르시아스의 신성력을 담은 저 괴물들을 막겠다는 말인가?
곧바로 되묻는 사하크의 말에 개리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오른손에 들린 망치를 들어 보일 뿐.
“이건 더 이상, 케르시아스의 무구가 아니야.”
케르시아스에게서 빌려온 힘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벼려낸 무구.
이제 그것은 성자 가울이 아닌, 개리슨의 망치가 되어있었다.
투웅-!
한 줄기 폭음과 함께 개리슨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가 이동한 궤적을 따라 그어진 빛나는 선.
하늘로 뛰어오른 개리슨은, 단숨에 교황의 군세가 주둔한 곳으로 돌진한 것이었다.
- 복수 대신 정의를 선택했는가.
개리슨이 떠나간 자리를 지켜보던 사하크는 다시 한번, 쓰러져있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았다.
“도련님, 죽는 거예요?”
뒤이어진 것은 소녀의 질문.
클라인의 머리를 끌어안은 하녀, 아린은 크게 뜬 눈을 들어 골룡의 시선을 마주했다.
- 그것은,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아는데요?”
나지막이 묻는 소녀의 말.
잠시 눈을 감은 골룡은 그에 화답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잠들어있던 자들.”
스스스스스……!
그 말과 함께 피어난 한 줄기 검은 연기가, 투명한 얼음성의 벽면에 무엇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윈터폴 왕성 제 11 근위병단, 토비 대릴슨.]
[하이델베르그 시 경계사단, 실비아 다 벨테어.]
[록펠리아 군도 해군, 카를로스 정.]
[제 2연구소 연구원…….]
[눈상어 기사단 단장…….]
[…….]
먹물처럼 퍼지는 것은 그들이 생전에 지녔던 이름.
옆에 새겨지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던 몇 줄의 문구였다.
- 200년의 시간 동안, 증오와 원한에 고통스러워하던 망자들이여.
사하크가 부르자, 아린 역시 뭔가를 눈치챈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스스스……!
하나둘 모여드는 검은 연기.
미약하게나마 사람의 영상을 띈 그것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정신을 잃은 클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자는 그대들의 의지를 받들어 괴물이 된 자. 그대들의 한을 풀고자 온 대륙을 상대로 싸웠던 자다.
사하크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에도 검은 연기는 점점 수를 불리고 있었다.
어느새 얼음성을 한가득 채운 그들은 이제, 자신을 두르던 검은 연기를 응집시켜 각자의 형태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 그 몸을 바쳐 그대들의 의지를 대변하던 안내자가, 이제 스스로 그의 길을 걸으려 한다.
오오오오오---!
낮고 탁한 소리가 공명하듯 얼음성을 울렸다.
야유인지, 회한인지, 아니면 탄성인지조차 알 수 없는 소리.
- 그러니 그대들을 묶어둔 족쇄로써, 200년간 함께해온 이웃으로서 청하니.
그렇지만 사하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들에게 말했고.
- 이제 그만 그 묵은 한을 벗고, 그대들의 안내자에게 길을 밝혀주지 않겠는가.
마지막 용의 한 마디에, 공명하던 영혼들의 하울링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파츳-!
검게 새겨진 이름들이 하나둘 빛을 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새긴 선과 도형은 그것을 보조하듯 퍼져나가, 쓰러진 소년을 중심으로 공식과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의 등불, 우리의 안내자, 망자의 왕이여.]
[그대가 우릴 위해 책임을 다하였듯, 우리 또한 그대를 위해 맡은 바 책임을 수행하니.]
[이제 우리의 혼을 바쳐, 그대의 의지를 실현하리라.]
얼음성과 그 주변에 남아있던 망자, 백 칠십 이만 사천 육백 구십 구 명.
푸른 빛과 함께 떠오른 것은 그들의 이름과 혼이요.
그 중심에 새겨진 것은 아키몬드에게 보내는 전언이니.
그 옛날, 아키몬드과 그들이 맺었건 계약문이, 다시금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이로써, 200년의 맹약이 완수되었으니.
공중에 떠오른 클라인의 몸과 그곳으로 몰려드는 무한한 마기.
그것을 본 사하크는 만족한 듯, 사하크는 만족한 듯 눈을 감았다.
- 나 또한 안심하고, 그대에게 다음을 맡길 수 있겠군.
츠츠츠츠……!
골룡의 몸에 새겨진 술식이 찬연하게 빛났다.
삶의 마지막.
마지막 남은 용은 심장에 담아둔 모든 마력을 클라인의 몸에 그것을 주입했다.
- 맹세로 빚어, 예언이 인도한 자. 클라인 라인란트.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자신에게 손을 내민 한 기사의 모습.
드디어 그를 따라갈 수 있겠군.
그리 생각하며, 사하크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 망자의 왕에게, 맡아두었던 왕좌를 환원하노라.
***
문득 느껴지는 향기에 피곤에 절어있던 눈이 절로 뜨였다.
“……여긴.”
시약을 끓이는 매캐한 냄새.
하루 종일 피워대는 램프 때문에 후끈한 열기.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북부의 찬바람과 이곳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내 몸을 덮은 코트자락까지.
“뭐야, 너 왜 벌써 일어났어?”
“야야 여기 봐! 우리 막내 일어났다.”
막내.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던 사람들이 누가 있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흐릿한 시선을 애써 바로잡자, 언제나 꿈에 그리던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선…. 배?”
“아이 거 참, 천천히 좀 깰 것이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퀭한 눈을 커다란 안경으로 가린 채 힘없이 손을 흔드는 여자 선배가 한 명.
왜 기사단이 아니라 연구소에 들어왔는지 모를 건장한 금발 떡대가 한 명.
그리고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담배를 꼬나문 한량이 한 명.
익숙한 풍경, 익숙한 공기.
그리고 200년이 지났음에도 익숙하고, 또 그리운 사람들.
“아키몬드. 이제 정신이 좀 드냐?”
날 보며 히죽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 한동안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 건가.”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언제였는지를 알아챈 난, 이어지는 허탈함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이건…. 그날의 풍경이군.”
그날.
역병이 윈터폴에 퍼지기 시작하고, 기사단의 절반이 그들의 창칼에 쓰러진 날.
나와 선배들은 왕국을 지킬 마지막 수단으로써, 얼음성을 가동시키기로 했다.
“얼음성의 중추가 되는 신의 심장.”
“…….”
“스승님의 유산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방대한 마기가 필요했고, 우리들의 힘은 한정적이었지.”
지척에 다가온 위협.
그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한 우리들.
난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매일매일을 보냈고, 결국 그 피로에 못 이겨 하룻밤 잠을 청했었다.
“그리고 내가 잠든 사이 선배들은, 얼음성에 자신의 혼을 녹였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배들의 면면을 살폈다.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고, 어쩔 줄 몰라 하며 팔을 쓸고, ‘커흠!’ 헛기침을 해대는 사람들.
그 뻔뻔한 상판을 본 난 한번 헛웃음 소리를 낸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걸 보여주면 어쩌라는 거야….”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그날, 내가 잠들지 않았더라면.
그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났더라면.
그랬다면, 난 이 사람들과 함께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괴물로 전락할 일 없이, 평안하게 사라질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서라도 말려보라는 건가? 돌이켜보라고? 이 환상 속에서?”
그리고 그 가정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걸 보여줘봤자, 아무것도……!”
“이놈이 아까부터 쫑알쫑알 뭐라는 거야?”
따악-!
퉁명스러운 한 마디와 함께, 묵직한 딱밤이 내 머리를 두드렸다.
“?!”
익숙한 느낌.
황급히 뒤를 돌자, 그곳에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하던 얼굴이 있었다.
“스승, 님……?”
빈민가의 하수구에서 날 구한 사람.
언젠가 난 세상을 구할 거라며 큰소리친, 속을 알 수 없는 노친네.
나와 내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얼음성의 심장이 되었던, 착해 빠진 멍청이.
겨울 숲의 현자, 가울.
그것이 내 스승의 이름이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느냐?”
“해야 할 일이요……?”
그렇게 되물은 순간.
난 내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웅혼하고 거대한 힘.
세상 모든 것이 발아래에 놓인 듯한 전능감.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익숙한, 언데드와의 연결고리까지.
“얼음성과 연결되었어.”
성뿐만이 아니었다.
동토지대를 떠돌던 얼음성의 망자들.
사하크의 힘으로도 붙드는 것이 고작이었던 언데드들이, 각자의 의지를 되찾은 채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 빨리도 알아채는구만.”
툭 하고 내뱉은 스승님의 말에 고개를 들자, 날 둘러싼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우우우웅-!
얼음성의 심부.
빛나는 신의 심장과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선배들의 모습.
“안돼, 이번만큼은……!”
그것을 말리려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선배들은 날 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미 한 선택은 되돌릴 수 없어, 아키몬드.”
그 말에 내가 잠시 굳어있자, 피식 웃은 선배들이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몰라.”
“다른, 선택….”
내 되물음에 선배들은 활짝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잘 해봐. 알았지 클라인?”
과거가 아닌, 지금의 내 이름을.
“…예. 그렇죠.”
내 대답과 동시에, 그들은 지체 없이 걸어간다.
과거에 날 구하고, 날 위해 희생한 자들.
그리고 난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뒤, 눈을 감았다.
- 일어났는가, 클라인.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자, 눈앞의 풍경은 다시금 뒤바뀌어있었다.
투명한 얼음성 꼭대기에 위치한 얼음 왕좌.
얼음성과 술자를 연결하는 중추.
저벅, 저벅.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성 밖에는 이미 무장을 갖춰, 일사불란하게 도열한 망자의 군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 …….
시야를 가득 메운 언데드의 군세.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일제히 손에 쥔 무기를 들어 올린 뒤.
쿠웅------!
그것을 바닥에 찧어, 자신들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 가자.
그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자, 자연스럽게 망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200년 전에 못다 한 일을, 끝마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