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두 번째 삶
“저건……?”
내 손에 들린 검을 본 팔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넌 아마 모를 법도 하겠구나.”
지금껏 봐왔던 교단의 성법기에는 각자의 이름이 있었다.
성서(聖書) 타나크가 그랬고.
성마(聖亇) 엔릴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그 두 성법기와는 달리,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이 검에는 이름이 없다.
처음 이것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난 베르켈도.
이 검에 심장을 꿰뚫린 나 아키몬드도.
그리고 전후 베르켈의 업적을 칭송하는 역사가들 역시, 이 검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다른 호칭이나 수식을 붙이지 않은 채, 그저 성검이라 부를 뿐.
“크워억-!”
달라진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낀 듯, 팔리만의 곁에 선 검은 거인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발을 돋는 순간, 이미 지척에 다다른 거인의 주먹.
우웅-!
그렇지만 그것이 발을 딛기 전에, 내 눈은 이미 그 주먹이 당도할 위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콰아앙-!
뒤이어 들려온 것은 폭음.
사하크가 펼쳐놓은 방어술식들을 전부 붕괴시킨 강권에 의한 것이었다.
툭, 투툭.
그렇지만 그 주먹은 애석하게도, 내 얼굴에 닿기 직전에 멈춰서 있었다.
“크륵?!”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이는 거인.
그의 주먹을 가로막은 것은 언데드의 영체도, 사하크가 만들어낸 새로운 마법도 아니었다.
파직! 파직!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
내 손에 들린 교단의 성서, 타나크가 만들어낸 보호막이었다.
“말도 안 돼, 아키몬드가 신성력을 다룬다고?”
그럴 리가 있나.
팔리만의 말에 그렇게 생각한 난 왼손에 들고 있던 성서, 타나크를 놓았다.
공중에 떠오른 성서는 그 자리에서 펼쳐져, 날 중심으로 형성된 보호막을 한순간에 방출했다.
투웅-!
“크워억!”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힘의 방출.
죽은 자의 몸을 재료로 만들어진 이상, 이 힘은 저 검은 거인에게 특히 강한 효과를 보일 것이다.
아무리 신성력으로 강화하고 교단의 성물을 박아넣었다 한들.
저것은 죽은 자의 육체로 만들어진 ‘언데드’였으니까.
쿠콰콰쾅-!
한쪽 벽에 처박힌 검은 거인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는 것을 보니 큰 손상은 없어 보였지만, 방어막에 직접 닿았던 피부는 고기 타는 소리를 내며 지금도 끓어오르고 있었다.
“놀랍군요.”
교단의 성물이 네크로맨서인 날 보호하는 광경.
그 사실이 납득되지 않는 것인지, 팔리만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법기는 교단의 적을 격멸하기 위한 도구. 헌데, 네크로맨서인 당신이 어째서 그것을 제 것인 양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교단의 성법기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무구.
격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그것을 다루려 한다면 보호는커녕, 방어막을 펼친 순간 몸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을 테지.
“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
그렇지만 짧게 내뱉은 난 오른손에 들린 성검을 팔리만에게 겨누며 말했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성법기는 교단의 적을 죽이기 위한 무기라고.”
그렇게 말하자 팔리만 또한 내 말뜻을 알았는지, 안색이 살짝 굳어지기 시작했다.
“너와 너희 교단 놈들이 해대는 꼴을 보고 말해봐라. 지금 교단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흉악한 적이 누구인지.”
“뭐라?”
“성법기는 각자의 의지를 가진 무구. 그리고 이 녀석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린 거지.”
개리슨의 부름에 응해 그 자리에 나타난 엔릴.
절체절명의 순간 팔리만을 구했던 성서, 타나크.
그 광경을 떠올리며, 난 오른손에 들린 성검을 그에게로 겨눴다.
“이 녀석들의 관점에선,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이단이라고 말이야.”
네크로맨서가 신관을 이단이라 부르는 광오.
그렇지만 팔리만은 내 말에 반박하지도, 제 논리를 포장하려 들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가치가 없다고 느꼈을 테지.
“………!”
그도 그럴 게, 저 새끼 지금 웃고 있거든.
“브리간테 성하의 말씀은 무엇 하나 맞는 것이 없었습니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웃는다.
항상 연기하던 사람 좋은 호인의 웃음이 아닌, 욕망과 탐욕으로 얼룩진 추악한 웃음.
“한낱 도구가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의지를 갖고 행동하니, 일이 훨씬 번거로워지지 않았습니까.”
촤촤촥-!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검은 거인의 주먹이 갈라져 검붉은 선혈을 흩뿌렸다.
이젠 준비 동작을 볼 시간도, 다음 수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저 눈이 예지하는 대로 검을 휘두르면, 그곳에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챌 뿐이었다.
“놀라운 속도입니다! 마치 미래를 보기라도 하는 듯하군요!”
저 새끼, 알면서 저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팔리만은 잡았다는 듯 입가를 비틀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는 모양이죠?”
“…! 이 새끼가…!”
쿠콰앙-!
그렇지만 이어지는 공격을 예지한다 한들, 그것에 대응하는 순발력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이 몸은 마력 한 줌 없는 범인(凡人)의 몸.
검을 휘두르기에 앞서, 이어지는 거인의 강권이 타나크의 보호막을 후려쳤다.
“쿨럭-!”
공격을 막았다 한들, 충격과 후폭풍은 막을 수 없다.
입안에 차오르는 핏덩이를 게워내면서도, 난 검을 들어 계속해서 앞을 경계했다.
“역시, 본드래곤을 불러낸 것이 한계였나 보죠?”
그렇지만 상황은 이미 최악.
‘결국 들켰나.’
방금 전 공격으로 내 몸 상태를 알아챈 듯, 팔리만은 긴장한 어깨를 푼 채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보였다.
“잘도 여기까지 연기해주셨습니다. 만신창이나 다를 바 없는 몸으로 말이죠.”
“…….”
성법기의 힘을 빌렸다 한들, 마력 한 줌 없는 소년의 몸.
압도적인 전력차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내 몸.
이것들을 확인한 팔리만은, 남아있는 두 마리의 거인을 천천히 전진시켰다.
쿵- 쿵-
서서히 다가오는 거인들.
부풀어 오른 근육과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은 당장이라도 내 몸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까진가?
이 지경까지 오니 절로 그런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기는 이미 바닥났고, 몸 상태는 이미 최악.
두 개의 성법기를 들었다 한들, 서서히 회복해가는 저 두 언데드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물러설 곳도, 돌파구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서서히 다가오는 두 거인은 내 공포심을 자극하듯, 서서히 공간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몸도, 마기도, 언데드들도 모두 소모한 채, 할 수 있는 일은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는 것뿐.
이 이상 앞을 막아서 봤자,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우…….”
그렇다면 이제, 괜찮지 않을까?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긴 채.
난 여기서 쓰러져도….
…
……
………
‘왜 계속해서 일어나지?’
“……!”
콱-!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애써 무너지려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머릿속을 꿰뚫은 한 마디는 200년 전의 오랜 기억 속의 목소리.
‘이해가 가지 않는군. 베르켈 라인란트.’
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200년 전의 아키몬드였다.
‘동료들은 이미 쓰러졌고, 서 있는 것은 너 하나.’
얼음성 심층부.
그의 눈앞에 놓인 절망적인 상황을 상기시키며, 난 계속해서 그를 압박해갔었다.
‘다시 일어선다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가 실패한다 한들 널 비난할 이도 없어.’
두 대의 타이탄, 세 명의 리치, 열 명의 데스나이트.
그것을 마주한 채 간신히 서 있는 베르켈을 향해, 난 질문했다.
‘그런데도, 넌 어째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냐?’
조롱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렇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뭐였더라.
글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클라인 라인란트.”
과거를 생각하던 몽롱한 의식 속.
차가운 팔리만의 목소리가 날 향해 흘러들어왔다.
“언데드도, 본드래곤도, 몸마저도 한계에 달했을 텐데, 당신은 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겁니까?”
“……하하.”
흐린 눈을 애써 들어 올려 녀석을 보자, 익숙한 질문이 내게로 되돌아왔다.
200년 전, 내가 그에게 건넸던 질문.
마치 거울 속 세상을 보듯 반대가 돼버린 상황이 우스워,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쎄, 왜일까.”
“……?”
비명을 질러대는 몸을 다잡으면서도, 난 그 이유를 답할 수 없었다.
“원수의 자식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아니면, 이제 와서 있지도 않은 영웅심에 불이 붙었나?”
“…….”
츠츠츠츠……!
손에 쥔 성검에 빛이 더해져 갔다.
그렇지만 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쓰러지려는 몸을 다잡은 채 그들의 앞에서 어깨를 폈다.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거창한 이유들을 생각해 봤는데…. 전부 아니더라고.”
대륙에 강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자는 많다.
개중에는 베르켈보다도 강한 검사도 있고, 헤아릴 수 없는 힘을 휘두르는 존재 또한 있을 터.
그렇지만 영웅의 조건은, 단순히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터였다.
“난 단지…. 오래전에 엎질러버린 것들을 주워 담으려 발버둥 치는 거야.”
촤륵-!
검을 들어,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수백만 언데드의 군세 앞에서 당당히 검을 들었던 그들과 같이.
홀로 남은 절망 속에서, 의연히 검을 들었던 북부의 기사와 같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서, 난 검 한 자루를 손에 쥔 채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곱씹으며,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는…. 하찮은 악당의 넋두리일 뿐이지.”
파츳-!
기묘한 감각이 내 두 눈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의 고통과 피로를 잊게 만드는 청량한 기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던 정신이 맑게 개었다.
“내게 주어진 이 두 번째 삶에선,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투확-!
전투의 여파로 자욱하게 낀 먼지가 흩어졌다.
이미 지척에 다가온 두 거인.
그렇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내게는 더 이상의 불안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저들을 막을 수 있다는 확신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그럼 그 말마따나, 후회 없이 죽여드리죠. 아키몬드.”
드물게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분노? 실망? 어째서?
그 이유를 생각해내기도 전에, 팔리만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쿠구구구구……!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 공격.
나와 사하크의 몸을 동시에 날려버리기 위해, 두 거인은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 위력의 공격을 준비했다.
“크워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내던져진 공격.
막는다 해도, 흘려낸다 해도. 심지어 피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꾸드드득-!
저들의 몸에 박힌 성물은 이미 한계까지 과부화된 상황.
스치기는커녕,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온몸이 가루가 되어 녹아내릴 테니까.
후웅-!
그러니 난 막는 대신, 그들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클레어가 남긴 눈이 바라보는 곳으로.
200년 전, 내 심장을 꿰뚫었던 검이 인도하는 곳으로.
괴물이 된 날 이끌던, 수많은 의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
새하얗게 물든 시야 속에서 빛나는 것은 손에 들린 검과 그것이 만들어낸 잔상뿐.
- 아아.
다시금 풍경을 바라본 내 시야에 잡힌 것은, 횡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두 거인의 모습.
그리고 사선으로 그어진 채 허물어지는 팔리만의 몸이었다.
- 200년을 인내한 맹약이, 이로써 실현되었으니.
털썩-!
사하크의 말과 함께, 한계에 달한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귀는 먹먹해져 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고.
시야는 이미 검게 물들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 이제 난, 안심하고 그대에게 다음을 맡길 수 있겠군.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서히 빛으로 화하는 사하크의 몸.
그리고 쓰러진 날 바라보는 아린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