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집안 꼴 참 잘 돌아간다
투웅-!
사하크를 중심으로 퍼진 풍압에 검은 거인들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심장의 마력을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거인들의 발걸음을 멈추는 힘.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었다.
“하, 하하하…! 용이라니……!”
팔리만 또한 그 광경에 넋을 잃은 듯 했지만, 본드래곤과 계약했다 해서 지금 내 상황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 클라인.
내 이름을 부르는 사하크의 목소리에, 난 눈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 앞으로 얼마 정도 유지할 수 있겠나.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묻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심호흡을 한 번 내쉰 뒤 조용히 답했다.
“10분.”
- …….
“이것도 온 정신을 마기 운용에만 집중할 경우야.”
용의 영혼과 계약하는 것은 다른 언데드들과의 계약과는 차원이 다르다.
용은 한 종을 대표하는 개체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존재.
혼의 격, 크기,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의지.
한 명의 네크로맨서가 품기에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거대했으니까.
‘애초에, 본드래곤과 계약하는 건 전생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걸 다 자라지도 않은 이 몸으로 했으니….’
순식간에 빠져나간 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시야가 흐려졌다.
반복된 전투의 피로로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언데드가 파괴된 반동 때문에 정신마저 몽롱한 상황.
‘하지만, 덕분에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만큼은, 상황을 압도할 수 있다.’
팔리만의 주위를 경계하는 검은 거인의 힘을 가늠했다.
성기사를 재료로 사용하여, 신성력으로 빚어낸 교단의 괴물.
신성력과 마기의 상성까지 고려한다면 하나하나가 최소 타이탄, 혹은 그 이상에 달하는 힘을 내포한 괴물들이었다.
“사하크.”
생각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렇지만 난 여유를 가장한 채, 뒤에 선 본드래곤에게 명령했다.
“전부 튀겨버려.”
- ……그대의 뜻대로.
쿠웅-!
내 말에 답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하크의 거체가 전진했다.
쩍 벌어진 사하크의 입에 응축되는 끝을 알 수 없는 마력.
내 언데드의 대부분을 소멸시킨 공격,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치……!”
방금 전까지 날 조롱하던 여유는 간데없이, 팔리만은 황급히 검은 거인들을 불러모았다.
‘좋아. 잘 속아 넘어갔군.’
내 몸 상태를 알았다면, 그가 해야 할 행동은 방어가 아닌 공격.
그렇지만 팔리만은 장기전을 염두에 둔 듯, 거인들을 겹쳐 신성력으로 이뤄진 방어막을 형성했다.
“크워억-!”
괴성과 함께 거인들이 한곳에 모인 그 순간.
‘그 판단이,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다.’
내 마음속 목소리와 함께, 온 세상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키이이잉---!
얼음성 전체가 진동하는 동시에, 사하크의 입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넓게 퍼지는 일반적인 브레스가 아닌, 한 점으로 집중된 마력의 정수.
쿠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빛무리가 퍼져나가고, 온 얼음성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쿠구구구……!
사하크가 사용한 것은 브레스 한 번뿐.
그렇지만 폭심지의 연기가 걷히자, 팔리만 측의 피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툭, 투툭.
이미 과부하 된 채 무너져내린 거인이 둘.
남은 세 구의 거인도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은지, 어깨나 다리 쪽을 늘어트린 채 비척거리고 있었다.
“한 번에 거인 두 체를……!”
“새끼가, 어디서 한눈을 팔아?”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물러선 팔리만.
그렇지만 그의 눈앞에 다다른 난, 이미 검집에서 노르드빈트를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큭?!”
연기와 브레스의 여파로 인해 거인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타이밍.
신성력을 뿜어낸 팔리만이 황급히 보호막을 치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이 검격에는 마력도, 마기도 들어있지 않았다.
스걱-!
수직으로 올려친 검격이 팔리만의 얼굴을 그었다.
촤악-!
얼굴 반쪽을 날려버린 검격.
공격을 성공시킨 증거로 팔리만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지만, 공격을 성공시킨 내 표정은 편치 않았다.
“쯧, 얕았네.”
원래는 몸을 두 동강 낼 생각이었는데, 시야 때문에 거리감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크워어어어-!”
남아있는 세 채의 거인이 날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내가 지체없이 뒤로 몸을 뺀 그 자리에, 엄호를 위한 사하크의 공격 마법이 집중됐다.
쿠콰콰콰콰쾅-!
연속으로 이어진 마법은 마력포.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마력은 마기에 내성을 갖춘 거인들을 상대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술식이었다.
쿠구구구…….
쉴새 없이 쏟아부은 마법과 허를 찌른 기습.
투화악-!
그렇지만 마력포의 여파로 만들어진 먼지구름이 걷히자, 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크워어어어어--!”
“크웍! 크워어억!”
그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팔리만의 언데드를 모두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후우……!”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팔리만 녀석의 평정을 깨트렸다는 것 정도일까.
“애써 준비한 언데드 치고는 좀 시시한데.”
전투를 시작하기 전 그가 내게 건넸던 말.
그것을 돌려주자, 팔리만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당신…….”
“뭐야, 이거 좀 처맞았다고 벌써 얼굴을 바꿔?”
늘상 짓고 있던 온화한 미소와는 다른, 살벌한 표정.
팔리만의 얼굴이 굳어가는 동시에, 내 얼굴에 뜬 비웃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난 네가 좀 더 음흉한 놈일 줄 알았는데, 벌써 이러면 재미없지. 안 그래?”
“……!”
짧은 도발에 팔리만의 손이 잠시 움찔했지만, 그는 섣불리 언데드를 돌격시키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좋아. 우선 기선제압은 성공했고.’
내 몸 상태가 한계에 달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썬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
팔리만이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었다.
‘수세로 돌아선 지금, 어떻게든 마기를 갈무리한다. 조금이라도 더 얼음성의 마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
“하, 하하…! 하하하하……!”
고개를 푹 숙인 팔리만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보자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때.
“역시, 당신은 최고입니다. 아키몬드!”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든 팔리만의 얼굴을 보자, 혐오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너, 이 새끼…?”
철퍽! 철퍽-!
터져버린 오른쪽 눈과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찐득한 피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다.
점액과 같은 농도.
그 진득한 피가 바닥에 닿자, 방울진 액체에서는 실과 같은 촉수가 수십 가닥씩 돋아나고 있었다.
“크리펠에서 본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하셨죠?”
“…….”
찍-!
바닥에 떨어진 피는 스스로 근육을 만들고 골격을 만들어, 작은 생명체로 화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짓밟아 죽인 팔리만은, 얼굴을 감싼 손을 치워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줬다.
구륵, 구르륵.
벌어진 상처 부위에서 솟아난 붉은 촉수.
넘실대는 그것은 마치 아린의 그림자처럼, 마치 별개의 생물인 양 이리저리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팔리만 엘.
최연소로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남자이자, 유일하다시피 한 차기 교황 후보.
그 지성과 능력은 교황의 권위를 위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는 기꺼이 교황의 개를 자청했다.
그 정도의 야망을 지닌 자가, 어째서 교황의 발아래에서 만족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지금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였다.
성혈?
아니, 그깟 모조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생전의 아키몬드가 도달한 반신의 경지?
아니, 저것은 아래에서 위로 승화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전락한 몰골이다.
“넌 팔리만 엘이 아니야. 그렇지?”
“…….”
“팔리만 엘이라는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전혀 다른 존재.”
난 이미 그와 같은 존재를 알고 있다.
지금도 내 그림자 속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존재.
저 녀석은 아마, 아린을 모방해 만들어진 복제품일 것이다.
“크리펠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교단이 만들어낸…. 케르시아스의 새로운 육신.”
교황이 선발대로 그를 먼저 이곳에 보낸 이유.
그리고 이곳까지 끌고 온 성기사들과 성물로 강화한 수많은 징집병들까지.
케르시아스를 강림시키고자 하는 교단의 의식은, 진작에 시작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제물’들과 함께 교황이 도착한다면, 너희 교단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손에 쥘 수 있는 거로군.”
얼음성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신의 육체와 신의 심장.
이렇게까지 가까워진 시점에서, 두 존재는 이미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조금 다르군요.”
“?”
그렇지만 내 말을 들은 팔리만은 입가를 비틀었다.
팔리만? 케르시아스?
둘 중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존재가 된 그는, 새하얀 법복을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교단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
“팔리만 엘의 껍질을 뒤집어쓴 케르시아스가 아니라, 케르시아스의 껍질을 뒤집어쓴 팔리만 엘이지요.”
꿈틀대던 촉수가 상처 속으로 들어가고, 노르드빈트가 베어낸 상처는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아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손에 쥐는 것은 교단이 아닌…. 제가 되는 것이지요.”
“…진짜 너네 집안 꼴 참 잘 돌아간다.”
그의 말뜻을 알아챈 순간.
팔리만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과장된 몸짓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소개 올리겠습니다, 아키몬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올려묶은 머리를 풀어헤친 팔리만의 모습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팔리만 엘.”
검은 머리는 흰색으로, 검은 눈은 타오를 듯한 금빛으로.
붉은 옷과 대비되는 그 모습은, 지상에 강림한 신을 자처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성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기나긴 인내의 시간을 넘어, 이 세상의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입니다.”
쿠우-!
그 말과 동시에, 팔리만을 중심으로 거대한 신성력의 격류가 퍼져나갔다.
쩌저저저적-!
이미 한계에 달한 본드래곤의 거체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사하크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이 미친 새끼가 설마, 이 자리에서…!”
신을 강림시키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이다.
완성된 신의 몸, 중심부가 된 심장.
그리고 그 심장을 채울 혼.
‘몸과 심장은 한자리에 모였다. 남은 것은 영혼뿐. 그렇다면…….’
교단이 원하는 신을 만들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혼이 필요하다.
신앙심으로 가득한, 케르시아스를 숭배하는 자의 혼.
그렇기에 교황과 그 군대를 저지한다면 가능성이 있다 여긴 것이다.
그렇지만, 강림의 주체가 교단이 아닌 팔리만이라면?
‘여기 있는 혼을, 강림의 제물로 쓸 생각이다.’
뿌득-!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가정 중에서도 설마 하던 최악의 수.
북부인들의 혼이, 다시 한번 저들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사하크.”
그리고 최악의 수임과 동시에.
확실하게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기회.
“내 시신이 있다는 건, 그것 또한 남아있다는 말이지?”
- …….
내 물음에, 사하크는 두 눈을 감았다.
파츳-!
눈앞에 나타난 작은 빛무리.
난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잡은 뒤, 천천히 옆으로 손을 가져갔다.
- 내게 남은 마지막 과업은, 지켜보는 것이다.
츠츠츠츠츠……!
손의 움직임을 따라 생성된 그것은, 백색으로 빛나는 검.
- 200년 전의 맹약이 실현될지, 아니면 시대의 악의가 오랜 약속마저 집어삼킬지.
사하크의 목소리와 함께 내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 마지막 용이 이 자리를 지켜볼 테니, 그대는 검으로써 대답하라.
성자 가울이 지닌 세 개의 성법기 중 마지막 하나임과 동시에, 아키몬드의 심장을 꿰뚫은 검.
- 기사, 클라인 라인란트.
성검이었다.